삶, 공감하기 - 인턴, 이터널 선샤인, 이프온리, 그리고
#봄_타는 #계절병 #오래갈_듯
습관처럼 일을 찾는다. 뭐든 움직여야 한다. 마음이 힘들었던 까닭에 며칠 축 처져 있다. 그래서 영화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쿠션에 대충 몸을 기대고 화면에 집중한다. 심지어 보다가 잔다. 일어나 다시 본다. 분명 피곤한데도 덜어낼 생각이 없다. 미칠 반복 속에 동백꽃 지듯 툭툭 감정 조각이 떨어진다. 살고 싶다는 시그널처럼. 소리를 죽일 생각도, 그렇다고 기척을 숨길 의지도 없다. 도를 닦는 기분이다. 이래서일지도 모르겠다. 길을 걷다 ‘도를 믿으십니까’란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다. 심지어 처음 본 낯선 사람이 차문을 붙들고 “***까지 데려다주실 수 없을까요”하는 정중(?)하면서도 섬뜩한 요청도 있었다.
종일 붙들고 있어서 다시 쳐다보기도 싫은 컴퓨터 모니터에 두 눈을 내줬다. 뻑뻑하고 소리가 나는 느낌, 따뜻한 것이 좋다고 커피도 한 잔 챙겼다. 물론 ‘칼럼을 위한’이란 핑계도 욱여넣었다. 믿거나 말거나.
오늘의 픽은 ‘이프 온리’였다. 어제는 ‘이터널 션사인’, 그리고 지난 설 연휴를 보내며 ‘인턴’을 세 번쯤 다시 본 것 같다. 그럴싸한 메시지도 없고 각각을 연결할 뭔가를 찾기도 어렵다. 다만 처음 봤을 때는 눈이 시린(보다 젊었을 때니 감정적 느낌이었을 듯) 애틋함과 컴퓨터 바탕화면으로 쓰면 좋을 장면들만 오락가락했었고, 지금은 그것과는 다른 것들이 보인다는 것 정도.
사실 이런 무모한 시간 버리기의 시작점은 ‘인턴’이었다. 손수건이란 단어가 채워지지 않았던 감정의 틈을 사정없이 비집어 들어왔다.
30대 CEO와 40여 년 경력의 70대 인턴, 그들의 세대를 초월한 우정과 평범하지만 사랑스러운 조연들의 존재가 훈훈하게 가슴 데운다. 굳이 대단한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거창한 결과물을 내밀지 않아도 사람들의 마음에 작은 꽃을 피울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봄 같다.
"필수용품이야. 그걸 자네 세대가 모른다는 건 거의 범죄에 가까워.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는 가장 큰 이유는 빌려주기 위해서야"
“요즘 젊은이들은 손수건을 안 가지고 다니지. 그런데 자네 손수건의 진짜 용도가 뭔 줄 아나?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한 거라네”...아 심장이 쿵쾅쿵쾅..
“손수건을 들고 다니는 이유는 빌려주기 위해서지”란 인생 경험은 예의 바르게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과정을 지나, 꼭 필요한 상황에 챙기지 못해 아쉬운 것이 된다. 마지막은 단단한 위로로 각인된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당신의 손수건이야”.
‘아픈 기억만 지울 수 있다’면...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Spotiess Mind). 누구나 사랑이란 걸 한다는 대전제. 그 대상은 사람일 수 있고 가장 아끼는 물건일 수 있다. 잊힌다는 것은 아픈 일이다. 잊는 것과 잊히는 것이 다른 것처럼, 나의 의지와 다르게 의도된 일은 얇은 종이에 베인 것처럼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미치도록 쓰라리다. 그래서 묻는다. ‘기억이 지워지더라도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겠다. 영화일 뿐이라고 못을 받는다 해도 현실에서의 선택권도 단 두 가지다. 잊은 척 살아가거나, 절대로 잊지 못하거나.
그리고 ‘이프 온리’. ‘곁에 있는’과 ‘소중한’을 연결했을 때 가장 먼저 무엇이 연상되는가. 아직 답을 구하지 못했다. 보이지 않거나 잃고 난 뒤에 비로소 명징해진다. 후하게 값을 치른 뒤다.
이별이란 것 역시 아플 수도, 또 소중할 수도 있다. 머릿속에 남아 감정이란 이름의 많은 조각들로 나뉠 수도 있다. 무엇이든 정해진 것은 없다. 다만 표현할 줄 모른다면, 한없는 안타까움에 미친 듯 눈물을 삼킬지도 모른다.
“해보는 거야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못해” 내가 아니라, 스누피의 오랜(?) 친구 찰리브라운이 이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