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당해녀 이어도사나 신물질로드-제주해녀항일운동 90주년 3
꽃이/피는 건 힘들어도/지는 건 잠깐이더군/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아주 잠깐이더군//…//꽃이/지는 건 쉬워도/잊는 건 한참 이더군/영영 한참 이더군(최영미 '선운사에서'중)
시인은 사랑을 노래했다지만 읽은 나는 그랬다. 그날 그 때 한 껏 피어났던 그대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목소리를 내기까지가 힘들었을 뿐 그들을 잊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아니 잊을 수가 없다. '대한 독립'이라는 거창한 대의명분을 내밀지 않더라도 자신과 주변 등 지켜야 할 것에 대한 사명만큼은 누구보다 강하고 단단했던, 여성 그리고 독립운동의 현장에 있던 그대들이다.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이라 했던 저항시의 한 토막을 그들을 위해 풀어놓는다.
-1930년 제주 섬에서 일어난 일
해녀항일운동은 1930년 '성산포 사건'으로 촉발됐다. 당시 성산포에서 해녀조합이 해녀들이 수집한 우뭇가사리를 부정판매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영세한 해녀와 출가 해녀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1920년 조직된 해녀조합은 해녀들의 인권 보호 등의 역할을 수행했지만 1920년대 중반 일본인 제주도사(島司)가 조합장을 겸하는 등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공식적인 '수탈 기구'로 변질된다. 해녀가 채취한 미역, 천초, 감태, 전복 등은 대부분 조선해조주식회사에 의해 판매되는데, 이중 50%는 수수료 명목으로 회사에 지불하고, 18% 가량은 조합 수수료 명목으로 납부해야 했다. 조합비, 사공 임금, 거간 사례비 등을 제하다 보면 정작 해녀들에게 들어오는 실수입은 전체의 20% 정도에 불과했다.
공동판매는커녕 일본 상인의 독점이 비일비재했고 경매 입찰을 하더라도 제대로 가격을 주지 않는 일이 허다했다. 성산포 사건도 그런 과정에서 불거졌다. 조합 측에서 경매입찰을 했지만 지정 가격이 원래 시간의 절반에 불과 했는데다 이마저도 이행되지 않으면서 해녀들이 해녀조합에 대한 격문을 살포하고 도사 면담 요청에 탄원서를 보내는 등 억울함을 호소하기에 이른다.
- 나라 잃은 설움에 더해
1931년 구좌면 하도리에서도 비슷한 부정 사건이 발생했다.
해녀어업조합에 대해 불만을 품어왔던 해녀들은 분개하여 1차로 항의문을 발송했다. 그러나 조합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구좌면 해녀들은 그해 6월 해녀조합의 비리를 폭로하고 요구조건을 관철하기 위해 대중적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당시 제주도 해녀들은 관제 해녀어업조합에 맞서 자생적으로 해녀회를 조직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이웃 종달리와 연평리·세화리 등에 진상을 알렸다. 해녀들이 직접 마을을 돌며 상황을 알리고 “우리들의 생활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단결해야 하며 싸워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런 해녀들의 조직적 활동을 통해 각종 집회가 열리고 농민회·해녀회 등의 모임을 통해 각종 관제조합을 쳐부수자는 결의들이 채택된다. 그렇게 1931년 12월 20일 하도리 해녀들은 회의들은 해녀조합에 대한 요구조건과 투쟁방침을 정하고 해녀조합 사무소가 있는 제주읍으로 향한다. 경찰의 제지를 염려해 발동기선을 타고 이동했지만 폭풍으로 배가 나아가지 못해 첫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멈추지는 않았다.
1932년 1월 7일 현 세화리 전항동 옛 오일장터(구좌면 세화장터)에서는 세화주재소 경찰의 저지를 뚫고 모인 300여 명의 해녀들이 호미와 비창을 들고 격앙된 목소리로 해녀조합의 불합리함과 시정을 요구했다. 이 불씨는 같은 불만을 품고 있던 구좌·성산 해녀들에게 옮겨 붙었다. 지정판매일인 1월 12일 신임 제주도사인 다구치가 순시차 구좌면을 통과하는 것에 맞춰 호미와 비창을 든 해녀 1000여명이 현재 '해녀항일운동기념탑'이 세워진 일대에 모였다. 해녀들은 대표를 선출하여 ‘해녀어업조합의 운영권 확보’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요구 조건을 내세웠다.
“우리들의 요구에 칼로써 대하면, 우리는 죽음으로써 대한다”
사태는 도사 일행이 해녀들의 요구 조건(지정판매 반대·해녀조합비 면제·도사의 조합장 겸직 반대·일본 상인 배척 등)을 잘 해결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진정되는 듯 했지만 돌아온 것은 관련자 검거 등 실력 행사였다.
1월 23일부터 사건의 조사와 함께 제주도내의 청년운동가들을 배후세력으로 규정하고 하도리 오문규, 종달리 한향택과 한원택, 세화리 문도배와 문도후 등을 각종 죄목을 붙여 대대적으로 검거하기 시작했다. 전남경찰부에서 응원 경찰이 파견되기도 했다.
이에 격분한 해녀들은 검속자를 탈환하기 위해 세화 주재소로 몰려들었고 무장경관까지 현장에 출동하면서 해녀 34명을 포함한 50여명이 다시 검속된다. 1월 27일에는 종달리 해녀 100여명이 검거된 이들을 석방하라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으나 이 시위를 끝으로 해녀항일운동은 일제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다. 이중 주동자로 낙인 찍힌 해녀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등은 옥살이를 하게 되고 이외에 검속된 해녀들만 100여명에 이르렀다.
결국 같은 달 23일 해녀 1500여명이 세화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해녀항일운동이 막을 내린 것은 그로부터 나흘 후인 27일, 목포경찰대까지 제주에 들어오는 등 무력으로 진압되면서다.
-시대를 앞섰던 여성들
해녀항일운동은 말 그대로 '여성 중심의 첫 생존권 투쟁'이었다. '항일운동'같은 역사적 사명을 대놓고 내걸지는 않았지만 제주는 물론이고 우리나라 근대사의 큰 획을 그었던 사실이다. 내용이 어찌됐건 일제의 강제 수탈에 항거했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부여가 가능하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수집해보면 그 의미가 분명하다. 감정적인 판단으로 항쟁을 주도한 것도 아니었고 사건을 전개해 가는 방법에 있어서도 그 시대를 살았던 '여성'들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조직적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90년, 해녀항일운동은 때가 되면 조명되는 ‘역사'가 됐다. 사회주의 색채가 있다는 이유로 오랜 세월동안 정부로부터 외면당하는 사이 기억은 바래지고 생존자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는 등 '아픔'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