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공감하기 '책' - 케서린 메이 ‘우리의 인생이 겨울을 지날 때’
그녀와 차를 한 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영국인인 그녀는 홍차를, 카페인의존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는 커피를 고르겠지. 적당히 눈치를 살피다가 아이 얘기로 말문을 튼다. 한참을 그 상황에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애썼다’고 손을 꼭 잡아주리라.
겨울이 시작됐다.
그저 평범한 문장 하나가 가슴이 툭 치고 간다.
언제부터였을까. 두 손 가득 커피잔을 쥐었다. 그윽하게 세상을 담은 부드러운 갈색 위로 뽀얀 김이 오르락내리락한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따스함 때문이었을까, 엄지손가락이 잔을 따라 움직인다. 살살 문지르다 꾹 누르는 야릇한, 그런 건 없다. 마음이 ‘미’정도의 음을 내며 숨을 고른다. 편안해진다.
무엇이 그리 만들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온기가 그렇게 만들었는지, 쓰다듬는 듯한 느낌 때문인지, 커피에서 스며 나온 멜라노이딘의 부드러운 갈색이 그리했는지 뭐가 됐든 당장은 그 편안한 기분에서 빠져나오기 싫다.
# 잡생각으로 무거워진 머리에 책을 담다
주말 모처럼 책을 들었다. 생각이 많아질 때 멀리하는 것 중 하나다. 지난해는 답답한 무언가를 견디지 못해 미칠 뜨개질로 세상없을 반짝이 작품을 만들었었다. 연말을 건너 새해에 접어들고 나서도 그런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덕분에 목도리만 대여섯개 떴다. 애꿎은 손목만 고강도 노동을 했다. 이 정도면 좀 쉬게 해줘야 한다. 그래서 꾹꾹 리모콘을 눌러대다가 영화 ‘러브레터’의 설경에 취해 버렸다.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어딘가에서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었으면…. 이내 등줄기를 따라 한기가 든다. 추운 것도, 더운 것도 어느 것 하나 맞지 않아 환절기를 심하게 타는 터다. 그런데도 하얀 눈 속에 운명을 둘 생각을 한다. 눈물이 핑 돈다. 마음이 약해지다 보니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 모든 것에 감정이입이 되고 만다.
그저 ‘잘 지내냐’는 말에 가슴이 저릿하고, ‘나도 잘 지내고 있다’는 말에 울컥한다.
영화는, 삶은 그렇게 조금씩 사라지는 과정이라 말한다. 1995년 개봉 당시만 하더라도 거리에서 우체통 보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추억의 사회관계망(SNS) 플랫폼 싸이월드에 감정을 소모하기 이전, 텍스트의 시대였다. 편지지를 챙기고, 여러 색깔 펜을 들고 ‘첫 문장’을 놓고 한참을 고민하던 때였다. ‘보내는 이’와 ‘받는 이’, 꼬박 며칠은 걸려야 닿는 사정도 그냥 이해가 됐던 긴 호흡의 시절이다.
이제는 조금은 경박한 알림음에 ‘숫자 1’이 사라지는 순간으로 관계의 간을 보는 시대다. 속보 경쟁도 모자라 단독 싸움에 정보도 넘친다. 숨돌리기 어렵다.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는 기다려주지 않고 달리기만 하는 속도의 그림자일지도 모른다.
#얼어붙은 시간 속에서 희망을 찾는 법
모처럼 책 한 권 읽었다고 온 몸의 감각이 감성을 향한다. 헤매지 않으려면 풀어진 정신을 단단히 붙들어야 한다.
책 제목에 쉽게 흔들리는 손이 ‘우리의 인생이 겨울을 지날 때’를 골랐다. 원제는 ‘Wintering(윈터링) : 얼어붙은 시간 속에서 희망을 찾는 법’이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특별하면서도 특별하지 않은 일들 속에서 이겨낸 것이 아니라 견뎌낸 담담한 기록이라는 표현이 맞을 듯 싶다.
글쓴이(Katherine May)는 영국 남부 켄트 위트스터블의 바닷가 마을에서 남편, 아들과 함께 수많은 계절을 품고 풀면서 글을 써 온 여성이다. 마흔 번째 생일을 앞두고 일상에 느닷없이 닥친 일들-갑작스런 남편의 맹장염, 실직, 아들의 등교 거부 등-을 마주했던 경험을 글로 옮겼다.
그녀의 겨울은 ‘얼어붙음’이다. ‘다시 봄이 올 거야’하는 희망찬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부딪히게 되는, 혼자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을 겨울이라 설정하고 그 상황에서 눈을 피하지 않는다. 그녀를 따라가다 보면 살면서 '겨울'이라고 지칭하는 수많은 것들을 경험한다는 사실에 공감하게 된다. 내 의지나 감정과 관계없이,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얼어붙음의 순간들. 부딪히기에는 날 선, 낯선, 매서운 것들과 부대끼고 상처를 입는다. 피한다고 하더라도 빈틈을 사정없이 파고드는 바람 같은 후회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알몸으로 선 나무를 닮은 회한 따위가 숨통을 틀어쥔다. 살고 싶다는 실낱같은 바람은 동상으로 썩어들어 절단 말고는 해결할 방법이 없는 손가락처럼 더는 내 것이 아닌 것이 된다.
# “나는 그저 조금 헤매고 있을 뿐이야”
“나는 그저 조금 헤매고 있을 뿐이야”
살면서 힘든 일 하나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애써 피할 수는 있겠다. 가능한 이겨내기 위해 부단히 싸우기도 한다. 글쓴이의 겨울나기는 바깥에서 답을 찾기 보다 받아들이는 용기를 꺼내는 일이다. 얼어붙을 것이란 것을 알지만 피하지 않고 그 안으로 걸어들어가는 일은 어쩌면 스스로를 상처내고 자연치유를 기다리는 쉽지 않은 과정일지 모른다. 달고 짜고 시고 하는 여러 맛 중에 혀 가장 뒤쪽 미각 세포에 이르러 비로소 느끼는 쓴맛처럼.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무자비할 정도로 분주히 돌아가는 오늘날의 세상에서, 우리는 겨울의 도래를 영원히 뒤로 미뤄두려고 한다. 겨울을 온전히 느끼려고도 하지 않고, 그것이 우리를 어떻게 헤집어놓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혹독한 겨울은 때로는 우리에게 이롭게 작용한다. 따라서 무턱대고 겨울을 무의미하고 신경이 마비되는, 의지박약의 나날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이 시기를 무시하거나 없애버리려는 시도도 멈춰야 한다. 겨울은 실재하며 우리에게 물음을 던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겨울을 삶 안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p.20~21)
그리고 하나. 글쓴이와 비슷한 경험을 공유했던 탓에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이런 사정에는 국경이 없었다. 1년 넘는 시간, 멀쩡할 수 없었던 하루하루, 마치 전쟁을 치르듯 사춘기 아들과 뒹굴었다. 코로나19로 원격수업이 확대되면서 학교에 가지 않을 이유가 늘었기 때문이라 생각했던 것은, 학교라는 틀이 맞지 않은데다 심지어 또래 집단에서 소위 ‘루저’로 몰리며 버티기 힘들어진 사정이 겹치며 끝내 폭발했다. 학업중단숙려제에 음악상담까지 할 수 있는 카드를 모두 꺼냈지만 학교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아파하는 아이를 보며 엄마라는 이름이 한없이 무거워졌다. 같이 상담을 받으며, 전문가를 통해 아이의 마음을 엿보며 간신히 무게를 덜었다. 엄마라는 같은 입장이 아니라, 그녀가 생각하고 풀어낸 것들에서 그만 위안을 받았다.
“아무리 나 자신의 시간을 절박하게 원할지라도, 아들을 망가뜨리면서까지 학교로 돌려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아이의 만족할 줄 아는 능력보다는 미래를 위한 자격 조건에 대해 걱정하는 것이 응당 엄마에게 기대되는 태도겠지만,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잠재력을 계발하는 것과 불행해지지 않는 것 두 가지가 서로 충돌하는 개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행복은 우리가 배우는 것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기술이다. 그것은 어두운 구석으로 몰아두어야 하는 우리의 일부, 의도적으로 순진하게 구는 사람이 지닌 부끄러운 영역이 아니다”(p.164)
# 5월 어느날 오후 티타임을
윈터링(wintering)은 계절병 얘기가 아니었다. 살면서 시시때때로 다가오는 겨울 같은 순간들을 모두 아우른다. 엄마이기도 하지만 사회, 그리고 조직의 한 구성원으로 잔인하리만큼 자주 겨울과 직면하는 상황조차 닮았다.
“여성의 목소리는 언제나 남성의 목소리가 결코 받지않는 도전에 직면한다. 여성이 너무 부드럽게 말하면 친절한 생쥐 취급을 받고, 반대로 목소리를 높이면 앙칼지다고 욕을 먹는다. 마거릿 대처가 정치 인생을 시작할 때 권위를 내보이기 위해 웅변 수업을 들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녀의 목소리는 국가가 가진 여성에 대한 공포의 무게를 짊어져야 했고, 여성들이 제대로 된 판단력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p.292~293)
그녀와 차를 한 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영국인인 그녀는 홍차를, 카페인의존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는 커피를 고르겠지. 적당히 눈치를 살피다가 아이 얘기로 말문을 튼다. 한참을 그 상황에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애썼다’고 손을 꼭 잡아주리라. ‘여성의 목소리’에 대해서도 할 말은 참 많다. 동·서양의 차이부터 여전히 보수적인 집단에 대한 성토와 싸우는 삶에 대해 주고 받다 보면 조용하지만 힘찬 싹이 트는 소리가 들리겠다.
행복할 권리가 있다면 슬픔을 인정할 의무도 있다. 슬프고 힘든 것은 무시하고 이겨낸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두 번은 얼어붙지 않는 것을 이야기 한다. “겨울에는 지혜를 얻게 되며, 겨울이 끝나고 나면 누군가에게 그 지혜를 전해줄 책임이 있다는 것. 마찬가지로 우리보다 먼저 윈터링을 겪은 사람들에게 귀 기울이는 것도 우리의 책임이다. 아무도 손해보지 않는 선물 교환과도 같다”(p.169)는 그녀의 말을 확인하는 사이 푸드덕하는 새의 날갯짓 소리가 들린다. 어쩜 그녀의 이름은 봄(5월)을 품고 있다. 그만 웃음이 난다. 그렇게 잠시 숨을 돌리고, 그리고 하나 둘 셋을 세면.... 이제는 긴 겨울에서 벗어나 눈을 뜰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