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이런 후배가 있습니다

나의 소소한 제주 일상 : 밥 한 번 먹자고

by 고미


가끔 그런 사람이 있다. 통화를 시작하면 기본 한 시간은 훌쩍 넘어가고, 말이 끝나면 괜히 마음이 환해지는 사람.


나에게는 그런 이성 후배가 하나 있다. 남사친과도 다르고, 20년 넘게 알고 지냈지만 그 흔한 ‘의리의 짐’ 같은 건 없다. 서로 지근거리에 있는 것도 아닌데 묘하게 잘 이어져 왔다. 아마도 딱 맞는 거리 덕분일 거다.


이 친구는 내 얘기를 진중하게 듣고, 본인의 실수도 숨기지 않는다. 성취나 기회가 생기면 나보다 먼저 알려주는 성격이기도 하고. 그렇게 묵묵히 오가는 마음 덕분에, 어느 순간 나도 관계에 대한 나름의 ‘선’을 갖게 됐다.


예전의 나는 관계에 기묘한 불안이 있었다.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순간에 괜히 머뭇거리고, 역할을 떠안는 데 너무 다정해서 문제였다. 관계가 느슨해질까 봐 뒤를 지켜주고, 존재를 드러내는 게 어색했다. 그러다 보니 오해를 만들고, 종종 이용당하기도 했다.

버겁고, 서운하고, 억울하다고 투덜거리거나 가라앉아 있을 때마다 후배가 툭 던지는 말이 있었다.

“선배가 왜요?”


그 짧은 한마디가 어느 날은 방패 같았고, 어느 날은 거울 같았다. 돌이켜보면, 지금의 그 후배를 만든 건 내 말 한 줄, 내 선택 하나였다. 힘들다며 전화를 해오면 ‘마음 가는 대로 해’라는 말을 건넸다. 책임 없는 말이라 할 수도 있지만, 그 말은 늘 긴 대화 뒤에 도착한 결론이었다.


그는 그 말을 붙잡고 움직였다. 무슨 책임없는 말이냐 할 수도 있지만 그 말의 앞과 뒤, 한참을 듣고 생각을 고를 시간을 만들어 여러가지 경우의 수를 조각했다.

기가 막힌 위킹 홀리데이의 기억 속에서 카메라를 꺼내 사진전을 열게 하기도 했고, 산을 좋아하는 취미를 글로도 쓰게 했더니 어느 순간 그룹장 경험을 매주 쏟아놓은 적도 있었다.

차와 백패킹 부심을 읽고 ”할 수 있을 때 다 해봐. 후회없게“하고 부추긴 덕분에 삶이 풍성해졌지만, 연애를 뒷순위로 미루게 됐다는 하소연을 제공했다.


그가 땀 흘려 쌓은 결과물들 앞에서, 나는 종종 말을 잃었다. 나는 그저 말로 응원했을 뿐인데, 그는 온몸으로 살아내고 있었다. 말뿐인 위로를 건네던 나와, 그 말을 기어이 현실로 만들어내는 그의 등이 겹쳐 보였던 탓이다. 그 단단한 실체 앞에서 설명으로 채우려 했던 내 세상이 얼마나 가벼운지 들킨 기분이었다.


이런 과정을 겹겹이 지나고 나니, 이상하게 내 사고방식도 달라졌다.

요즘의 나는 굳이 모든 걸 말로 정리하지 않는다. 모든 장면을 해석하려 들지 않고, 모든 오해를 바로잡을 힘도 들이지 않는다.

말을 아끼는 쪽이 더 많은 것을 지키는 순간이 있다는 걸 몸으로 알게 된 것이다.

한때는 이해받는 일이 중요했다. 왜 그 선택을 했는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왜 그 마음이 되었는지를 설명해야만 존중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스스로를 설득하듯 말했고, 상대가 납득할 때까지 마음을 풀어놓았다.


지금은 말은 많다고 닿는 게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애써 붙잡지 않는다. 나를 오해한 채 떠나는 사람을 굳이 돌려세우지 않는다. 설명하지 않는다고 관계가 끊기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서로의 경계를 존중하는 방식에 가깝다.


설명이 필요 없는 관계는 이미 단단하다. 말을 덧붙이지 않아도 뜻이 닿고, 침묵 속에서도 불안이 자라지 않는다. 이상하게 말이 길어질수록 그 관계가 애쓰고 있다는 신호일 때도 있다.

지금의 나는 이렇게 산다. 말보다 시간을, 해명보다 태도를, 드러내기보다 꾸준함을 선택한다. 약속을 지키고, 부탁하지 않은 일도 묵묵히 해두고, 변명 대신 시간을 쌓는다.


그렇게 남는 것들이 있다.

말보다 오래 가는 신뢰, 설명보다 분명한 태도.

오랜 시간 쌓인 관계가 나를 이런 사람으로 데려다 놓았다.


이제는 긴 설명 대신 따뜻한 차 한 잔을 내밀고, 말없이 마주 앉아도 어색하지 않다.

침묵이 길어져도 불안하지 않고, ‘그래서…’ 하고 이어가던 말이 몇 번 비틀려도 괜찮다.

관계의 거리는 억지로 좁히는 게 아니라, 서로의 자리를 존중할 때 자연스럽게 맞춰진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아마 앞으로도 할 얘기는 계속 생길 거다.

다만 그 얘기를 꺼내는 순간과 방식은, 우리 사이에 놓인 그 적당한 거리가 자연스레 알려줄 거라 믿는다.


#조카_바보 #애 보느라_ #워커홀릭은 안 따라 해도 #모처럼_만나_누가 더 힘든가_배틀은_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