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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 Feb 17. 2022

“나는 기계치입니다”

삶, 공감하기 - '적당히'효과

에스프레소 커피가 배출되지 않는 무려 4가지 이유를 숙지하고 적절하게 대응해야 하는 상황을, 분명 글로 읽었는데 뭐가 뭔지 모르겠다.
느닷없는 난독증과 일 핑계까지 더해, 커피 머신과 친해지기 위해 나름 이틀 이상의 노력과 각별한 애정을 쏟아부었다는 핑계를 늘어 놓았을 뿐 사실 애먼 기계와 사용설명서에 누명을 씌워 기계치임을 애써 부인하고 있는 나와 마주한다.

‘목적지가 오른쪽에 있습니다’. 익숙한 기계음을 따라 눈을 돌렸지만 정작 보이는 건 잔뜩 우거진 수풀 뿐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 언제부턴가 길은 점점 좁아지다 못해 바퀴 네 개로도 접근하기 어려울 정도로 날 것이었다. 초행이라 믿을 건 내비게이션 밖에 없었다. 심지어 무성한 나무 군단이 당장 돌아가라 으름장을 놓기 시작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몇 년 전 강원도 출장에서의 일이다. 하필 날이 저물 무렵이라 어둑어둑한 산길을 후진으로 빠져나오느라 갖은 애를 다 썼다. 다시 주소를 입력하고 어찌어찌 목적지를 찾아갔다. 산을 빙 돌아 반대쪽, 깊숙한 위치에 있던 마을이 나타났다. 어깨에서부터 등 근육까지 제각각 비명을 질러댄다. ‘좀 좋은 내비게이션을 구하지 그랬어’. ‘내가 이럴 줄 알았겠냐’고 변명을 하면서도, ‘그래도 그 덕에 여기까지 왔잖아’하고 애써 위안을 한다. 이미 예정했던 시간은 반나절이나 지난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자료 조사를 마쳤다. 그럼 되는 일이다.     

어처구니없는 실수담을 얘기할 때마다 등장하는 일을 꺼낸 이유는 생일선물로 내 손에 들어온 커피머신 때문이다.


# 생일, 커피머신을 선물 받다


지독한 커피 마니아인 걸 안 지인들로부터 쿠폰 선물을 받는 것은 다반사였지만 이번은 아예 반짝반짝 빛나는 홈카페용 장비가 파트너 대열에 올랐다. 한 눈에 봐도 위풍당당하다. 미리 준비해둔 것처럼 제자리도 꿰찼다. 하지만 무슨 영문인지, 내비게이션 때문에 벌어졌던 웃지도 울지도 못했던 일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적당히’효과다.     

상자에서 본체를 꺼내고 보니 따라 나오는 것이 한 둘이 아니다. 이럴 땐 제품 설명서만 한 것이 없다. 가장 첫 페이지, 제품의 구성부터 탐독한다. 스팀레버가, 제어판이, 압력계가 이렇게 생겼구나. 스팀완드에 필터바스켓, 토파 필터, 포타 필터 핸들, 탬퍼는 들어 봤던 것도 같은 이름들이다. 일단 익숙해질 때까지 쳐다 보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다.

그저 설명서를 펼쳤을 뿐인데 왜 겁부터 나는 걸까. 물탱크에 물을 ‘MAX’를 넘지 않게 넣고 포터 필터와 필터 바스켓을 제 위치에 놓은 뒤 전원 연결, 전원 버튼을 누르고 예열이 완료되는 과정은, 단숨에 이뤄졌다. 뭐 이쯤이야 한 것도 잠시 스팀레버를 돌려 스팀 완드에서 3~5초간 물을 빼주는 단계부터 난항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반응이 없다. 급하게 전원을 끄고 이번에는 설명서에 밑줄을 긋기 시작한다. 혹시 빠트린 것은 없을까 싶어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천천히 해본다. 그래도 조용하다. 설명서 마지막 부분에 있는 ‘문제 및 해결방법’으로 급전개. 아무리 살펴봐도 뭐가 원인인지 알 수가 없다.

이쯤되면 저절로 반성 모드가 된다. "내가 멍청한 걸까? 아니면 기계가 똑똑한 걸까?" 차라리 후자였으면 하는 심정이지만 전자일 경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혹시 하는 마음에 몇 분 기다려봤다. 작동한다. 간단한 이유였다. 물탱크 안 물이 밸브를 통해 정해진 자리로 이동하는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만약 이 아이가 말을 할 줄 알았다면 ‘대기 중입니다’하고 목에 힘을 잔뜩 준, 비웃음 섞인 콧소리를 내지 않았을까. 음성 지원 기능이 없다는데 안도한 것도 잠시, 다음은 전동 커피그라인더가 부릅 하고 눈에 불을 켠다. 원두까지 챙기기는 했는데 문제는 ‘얼마나’다. 적당량의 원두를 넣고…분쇄도를 확인하면서 눌렀다 떼기를 반복하면서. 분명 자주 듣던 말인데 왜 이렇게도 어려운걸까. 원두를 너무 미세하게 분쇄하거나 원두의 양을 많게 하거나 템핑을 강하게 하는 경우 추출이 안 될 수도 있으니…라던가 원두를 너무 과도하게 미세하게 분쇄할 경우 추출 구멍에 원두가 껴서 추출에 방해가 될 수 있으니…라던가 에스프레소 커피가 배출되지 않는 무려 4가지 이유를 숙지하고 적절하게 대응해야 하는 상황을, 분명 글로 읽었는데 뭐가 뭔지 모르겠다.

느닷없는 난독증과 일 핑계까지 더해, 커피 머신과 친해지기 위해 나름 이틀 이상의 노력과 각별한 애정을 쏟아부었다는 핑계를 늘어 놓았을 뿐 사실 애먼 기계와 사용설명서에 누명을 씌워 기계치임을 애써 부인하고 있는 나와 마주한다.

# 그래, 기계치다 어쩔래


기계치는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세월이 흐를수록 '구관(舊官)이 명관(名官)이다'라는 구차한 변명을 앞세우며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종종 거울 표면에 장착된 터치스크린으로 내용을 입력하고, 프로그램에 따라 음악이 흐르며, 욕조에는 자신이 미리 정해놓은 온도에 따라 물이 알맞게 채워져 주인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는 스마트 욕실이나 자동으로 식품 상태를 관리하고, 종종 스스로 통계까지 내어 주문에서 배달까지 인터넷으로 자동처리 해주는 스마트 냉장고는 있다면 편할 거란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이내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만 준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예측을 불허하는 자연의 재앙과 나와는 궁합이 맞지 않아 갑작스런 기계의 반란이 부를 변수나 오차를 인정하고 고개를 젓는다.

아직 ‘장비빨’을 내세울 때가 아니라는 변명이 궁색해진다. 지금은 시간만 있으면 ‘우아하게’ 나만의 커피 타임을 즐긴다. 어떠냐고. 물론 훌륭하게 좋다. 에러 신호가 뜨기 전까지의 유예 기간이다.     

“우리 집에서 사용 설명서 없이 전원 버튼만 켜서 사용할 수 있는 기기는 더 이상 없다. 토스터 하나조차 말이다. 전의 토스터는 거의 원시적이라 할 만큼 작동 방법이 간단했다. 작은 철제 상자 안에 빵을 한 장 혹은 두 장 정도 넣을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게 다여서, 토스터를 넣고 그냥 버튼을–버튼의 위치도 눈에 쉽게 띄는 구조였다 – 누르기만 하면 작동됐다. 그게 끝이었고, 그 이상의 것은 필요 없었다”

“요즘 기기들의 개발 속도는 너무 빨라서 우리가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는다. 익숙해질 만하면 새로운 기기가 등장해 우리를 다그치기 때문이다. 결국 그 어떤 기기에도 제대로 익숙해질 여유 없이 우리는 늘 새로운 것들을 알아가기에만 바쁜 것 같다”

독일 저널리스트 루츠 슈마허는  ‘난 단지 토스터를 원했을 뿐’에서 이런 생각을 적었다. 순간 무릎을 탁 쳤다. 기계화와 첨단화가 우리 일상에 깊숙이 스며든 현실이 과연 여유와 행복이란 결과를 낳았는가. 왜 수많은 기계들에 굳이 필요하지 않은 기능이 경쟁적으로 추가되고 있는지. 그 부수적인 기능이 불편함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더 가져야 하고, 뭔가를 내 것으로 만드는 것으로 존재감을 느끼는 '호모 컨슈머리쿠스('Homo Consumericus' was used by Gad Saad)'에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는 건지. 우르르 쏟아지는 질문 공세에 내린 커피 한 모금을 급하게 삼킨다.

# 편하려다 복잡해진


커피 한 잔이라도 집에서 우아하게 즐기고픈 작은 니즈가 이렇게 큰 일을 만들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무슨 기계든 손만 대면 망가진다’는 것만 기계치가 아닌 세상이 됐다. 루츠 슈마허는 "모든 면에서 석기시대가 지금보다 나았다"고 부르짖는다. 현대인은 평균 수명은 길어졌지만 하루 4시간만 일했던 석기시대인보다 여유롭지 못하다는 게 그 이유다. 기계치인 그가 새 기기를 맞닥뜨릴 때마다 겪는 에피소드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신형기기들이 시장에 출시될 때마다 예외 없이 새로이 추가된 기능들이 고민을 끌어낸다. 어쩌다가 버튼을 잘못 누르고 원상복귀 시키지 못해 강제로 전원을 껐다가 다시 켜는 일은 흔해서 경험담에 넣을 수도 없다. 결국 자신이 기능을 잘 모르거나 첨단 기능에 대한 적응력이 부족해서 생긴 잘못이 ‘기계치’의 범주에 들어간다. 이 정도면 기계치 아닌 사람을 찾는 것이 더 쉬울 지도 모르겠다.        

  




손만 대면 망가진다! 기계치들의 특징 5     

1. 매뉴얼을 읽지 않는다     

처음 접하는 기기는 눈으로 먼저 스캔하고 바로 작동을 시작한다. 전원 버튼만 찾으면 이후는 일사천리로 척척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다. 단순한 기기라면 큰 상관없지만 여러 기능이 복합적으로 있는 기기라면 결국 사용법을 제대로 몰라 누군가에게 부탁하거나 이리저리 만져보다가 포기하고 만다. 매뉴얼에는 기본 구성품, 작동법, 주의사항, 나타날 수 있는 증상 등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많으니 꼭 읽고 따로 보관해두는 것이 좋다.     

2. 무조건 힘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손만 댔다 하면 기기를 망가뜨리는 대표적인 유형이다. 사용법 숙지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조건 힘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다 보니 툭하면 제품의 고장, 파손을 유발하고 만다. 결국 이로 인한 손해는 본인일 뿐인데도 안 되면 다른 해결 방법을 찾지 않고 오로지 힘으로만 승부를 보고자 해서 비슷한 상황들이 반복된다. 대부분의 기기는 무리한 힘을 사용하지 않게끔 만들어졌다.     

3. 한두 가지 기능만 사용한다     

기계치들의 특징 중 하나는 복잡한 기능에는 큰 관심이 없는 것이다. 처음 구입할 때는 다양한 기능이나 스펙에 반해서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구입하지만 결국 사용하게 되는 것은 그 제품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일 때가 많다. 인터넷에서도 다양한 정보를 접할 수 있고 얼마든지 시도해볼 수 있지만 기기를 붙잡고 새로운 기능을 탐색하고 사용해보는 것 자체가 이들에게는 귀찮거나 어려운 일일 수 있다.     

4. 남들보다 기기 교체주기가 짧다     

평범하게 사용하는 것 같은데 기기의 교체주기가 남들보다 짧은 편이다. 사실 본인은 평범하게 사용한다고 하지만 기계 잘알못은 오로지 기계를 사용할 줄만 한다. 즉, 주기적으로 기계를 청소해주고 관리해주는 일 없이 무조건 사용만 한다. 그러니 당연히 과부하가 걸리거나 먼지 등으로 인해 고장이 쉽게 날 수밖에 없다. 충전 어댑터를 필요 이상으로 많이 꽂아 놓고 있진 않은지, 혹은 제품이 방전된 채 오랫동안 방치하진 않는지 등 제품 각각의 올바른 관리법 정도는 알고 있어야 제품의 수명을 늘릴 수 있다.     

5. 기기의 발전을 따라가기가 어렵다     

평소에 접해보지 않던 카테고리의 아이템들은 눈길조차 두지 않는다. 현재 쓰는 것에 큰 불편함이 없고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굳이 어려워진 기능을 학습하고 스트레스를 받아 가면서까지 최신의 제품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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