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공감하기 - 발레리 트루에 <나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책에서 흙 냄새, 나무 냄새 좀 맡아볼까 했던 것을 잊고 정신없이 활자 사이로 눈을 집어넣는다. 인공눈물에 의존해야 할 만큼 마구 사용해 힘든 눈에게는 미안하지만 놓치는 것은 없어야 한다.
그런 마음을 알았을까. 책은 귀를 열 것을 조언한다.
세상의 모든 나무에게는 각자 하고 싶은 말이 있고, 우리는 그 것을 정확히 헤아려 들어줘야 할 의무가 있다. 고대사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모자라 시대적 배경까지 꼼꼼히 살핀 이유는 현재 우리의 삶과 연결된다. 어제는 물론이고 오늘이라 부르는 매분 매초가 나무에 새겨져 역사가 되고 있다.
# 적당한 간격…주고받을 '거리'
숲이 사라진다. 이보다 더 아픈 말은 없다. ‘생명 존중’이 본성인 사람은 수 백 만 년 동안 숲 속에서, 숲과 더불어 살아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숲에 가면 마음이 안정되고, 건강해짐을 느낀다. 숲을 망치는 일을 너나없이 안타까워하고 다시 살리는 일에 공감하고 감동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단지 그 것뿐 만은 아니다.
나무는 사람과 닮았다. 씨앗에서 싹을 틔우고 튼튼한 줄기와 우거진 가지로 속 깊은 그늘을 만들었다 다양한 이유들로 정해진 듯 자연으로 돌아간다. 사람 역시 정자와 난자가 만나 생명이 되고 세상에 태어나서는 나이에 맞춘 생활을 하고 가족을 이룬 뒤 다음에 역할을 넘기고 하늘 소풍을 떠난다.
적절한 '돌봄'과 '간격'이 필요한 것도 닮았다.
나무와 나무 사이 적당한 간격이 있어야 건강한 숲을 만들 수 있듯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사랑하는 마음을 주고받을 거리가 필요하다.
나무 사이 간격은 바람이 흐르고, 햇살을 나누고, 물과 영양분이 공유되는 공간이다. 사람간 거리는 이해와 존중, 배려를 말한다.
만약 그 간격이 너무 좁거나 너무 벌어지면 나무는 곧게 자라지 못하거나 기대지 못해 쓰러진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만남과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면서도 힘든 일이다. 적당히 소통하면 사랑이 싹트지만 그렇지 않으면 욕심과 집착, 시기 질투, 미움 같은 아픈 단어들에 휘둘리게 된다.
# 희망을 키우는 일
"참으로 보기 드문 인격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여러 해 동안 그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는 행운을 가져야만 한다. 그 사람의 행동이 온갖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있고, 그 행동을 이끌어 나가는 생각이 더없이 고결하며,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그런데도 이 세상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잊을 수 없는 한 인격을 만났다고 할 수 있다" -‘나무를 심는 사람’ 서문 중
프랑스 작가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는 사람(The Man Who planted Trees)'이 던지는 여운은 깊고 크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희망을 잃은 황무지에 나무를 심는 노인의 이야기다. 30여분 짜리 짧은 애니메이션은 담담하고 소박한 파스텔톤 화면은 월트 디즈니나 저패니메이션에 길들여진 이들의 시선을 끌기에는 미약하게 느껴질 정도지만 감동은 다른 얘기를 한다.
1900년대 프랑스에 사는 양치기 노인은 메마르고 거친 땅에 홀로 나무를 심는다. 도토리 10만개를 심으면 2만개에서 겨우 싹이 텄고, 그 중 절반은 다람쥐가 갉아먹었다. 살아남은 도토리에서는 참나무가 자라 조금씩 땅을 채우기 시작했다. 노인은 또 자작나무를, 너도밤나무를, 단풍나무를 심었다. 매일 씨앗 심기를 30년, 세상을 뒤엎은 큰 전쟁도 새 생명이 움트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오히려 바닥을 허옇게 드러냈던 도랑에 다시 샘물이 솟고, 거친 모래바람을 가라앉힌 자리에 산들바람이 생명을 옮긴다. 그렇게 죽었던 땅은 살아났고, 떠났던 사람들은 하나 둘 제자리로 돌아온다.
노인이 나무만 심은 것이 아니라 희망을 키웠다.
# 나무 심자=잘 살자
'아낌없이 주는 나무'(쉘 실버스타인 1964년)는 아름다운 단순함과, 인간의 자만과 욕심,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나무가 있고, 그 나무가 사랑하는 소년이 있었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나뭇잎으로 왕관을 만들어 쓰고, 매달려 놀던 소년은 한동안 나무를 찾지 않는다. 청년이 되어 나타난 소년은 돈을 요구했고, 나무는 열매를 내준다. 다시 오랜 시간 돌아오지 않던 소년은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찾아와 '살 집'과 '멀리 떠날 배'를 이야기한다. 나무줄기까지 베어 떠났던 소년은 노인으로 돌아온다. 나무는 줄 것이 없어 미안하고, 노인은 필요한 것이 없다. 편안히 쉬고 싶다는 마음 뿐. 그렇게 나무의 밑동에 몸을 맡기면서 서로가 행복해진다.
나무가 주는 것은 더 있다.
나무 한그루는 성장하면서 서서히 대기 중의 탄소를 제거한다. 소나무 한 그루는 이산화탄소를 연간 5㎏을 흡수하고, 수명이 40년인 활엽수는 평생 1t가량의 탄소를 제거한다. 게다가 나무들은 오염 물질을 빠르게 걸러내고, 뿌리로는 물을 흡수해 대기로 증발시킨다. 이 수증기는 구름이 되어 불필요한 햇빛 에너지를 반사한다.
그리고 나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묵묵히 세상을 지켜보고 또 품어왔다. 인류라는 이름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자리를 지켰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아주 쉽다. TV토론처럼 뱅뱅 돌리거나 캐물을 필요도 없다. 나이테. 태고의 시간을 품고 기억하고 있는 그 것만 펼치면 된다.
이런 사실을 깨달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 신간을 담은 택배가 도착하고, 그 중 간택을 받지 못한 책들이 모여 있는 안에서 익숙한 색 하나를 찾은 것이 이런 행운을 줬다.
#나이테에 귀 기울이며
<나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나무의 나이테를 들여다보며 지난 인류사의 지도를 그리는 연륜연대학자들의 이야기다. 미국 애리조나대학교 나이테연구소 교수로 재직 중인 발레리 트루에가 썼다. 나이테 연구를 통해 지난 2000년 동안 지구 날씨가 어떻게 변화해왔으며 이것이 인류 문명과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밝히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고백하자면, 나이테를 연구하는 학문이 따로 있다는 걸 이번 처음 알았다. 1930년대 생겨난 ‘연륜연대학(Dendrochronology)’은 그리스어로 나무라는 뜻의 ‘Dendros’, 시간이란 뜻의 ‘Chronos’에서 유래한 말로 나이테를 이용해 과거의 기후를 연구하고 생태계와 인간에 미치는 영향을 밝힌다. 연륜연대학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과학’이다. 정체 모를 나노 입자도, 닿을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진 은하도 없지만, 손으로 나무를 쓰다듬고 맨눈으로 나이테를 바라보며 1만 년의 시간을 유영하는 일은 그 어떤 과학보다 신비롭다.
저자의 눈을 따라가 보면 나이테에 켜켜이 새겨진 넓고 좁은 간격과 패턴은 ‘모스부호’가 된다. 나무는 ‘뚜뚜뚜 뚜-뚜뚜’하는 소리를 내는 대신 품을 내주거나 접는다. 나이테 간격이 넓을수록 나무는 풍부한 물과 양분을 품은 채 어떤 위협도 없이 성장했다. 반대로 가물거나 너무 춥거나, 비바람이 몰아치는 상황에 노출될수록 나이테는 좁아진다. 스트레스가 심할 경우 나이테 만들기를 포기하기도 한다.
나이테는 그 때의 음유시인들처럼 로마 제국의 흥망성쇠까지 노래한다. 지중해성 기후를 더없이 누렸던-여름 작열하는 태양아래 올리브, 레몬 나무의 열매가 영글고 가을에는 그 열매로 포도주와 올리브유를 만든다. 비가 많고 기후가 온화해 밀과 같은 곡물 농사를 지을 수 있었던 겨울까지 더없이 풍족했던-로마제국이 몰락하기 시작한 때는 ‘추운 여름’과 가뭄이 닥치면서였다고 촘촘하게 들어선 나이테는 기억한다. 책에서 흙 냄새, 나무 냄새 좀 맡아볼까 했던 것을 잊고 정신없이 활자 사이로 눈을 집어넣는다. 인공눈물에 의존해야 할 만큼 마구 사용해 힘든 눈에게는 미안하지만 놓치는 것은 없어야 한다.
그런 마음을 알았을까. 책은 귀를 열 것을 조언한다.
세상의 모든 나무에게는 각자 하고 싶은 말이 있고, 우리는 그 것을 정확히 헤아려 들어줘야 할 의무가 있다.
고대사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모자라 시대적 배경까지 꼼꼼히 살핀 이유는 현재 우리의 삶과 연결된다. 어제는 물론이고 오늘이라 부르는 매분 매초가 나무에 새겨져 역사가 되고 있다.
‘우리는 화석 연료를 태움으로써 자연적인 탄소 순환의 한 단계를 드라마틱하게 가속시키고 균형을 깨뜨렸다. … 지구 기온이 상승하고, 빙하의 만년설이 녹고, 해수면이 높아지고, 폭염, 가뭄, 홍수, 극소용돌이가 빈번해지고, 산불철이 길어졌다. … 이 시기의 인간은 지구 시스템에 일어나는 가장 강력한 변화의 원동력이 되어 지질 기록에 영구적인 흔적을 남겼다’
#잘 듣는 것에서 시작하다
반성의 시간. 하지만 지난 시간을 거치며 쌓고 다지고 채워진 것들은 최악의 결과를 피할 수 있도록 하고, 적응할 수 있는 혁신적인 방법을 발견하도록 해 준다. 생존력의 영역이다.
말로는 알겠는데 어떻게 들어야 하나. 연륜연대학은 복잡한 학문이다. 인문·사회·역사·문화 등을 다 아우르면서도 기초가 되는 것은 과학이다. 연구자들은 나이테 샘플을 사포질하고 고정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서 나무와 대화를 한다. 그걸 일반인이 할 수 있을까. 하려면 못 할 것도 없지만 이렇게 정리된 내용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이야기가 가능할 듯 싶다.
예를 들어, 1999년 ‘세계적인 바이올린 제작자 스트라디바리가 남긴 전설적인 바이올린 메시아가 위작일 수 있다’는 스튜어트 폴렌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악기 보존 전문가의 말이 파문을 일으켰을 때도 나이테가 입을 열었다. 최소 2000만달러 이상의 감정가를 가진 이 바이올린은 런던의 유명한 악기 제작자이자 수집가 집안인 W E 힐 앤드 선스가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애슈몰린 박물관에 기증한 것이었다. ‘자동차 왕’ 헨리 포드가 제시한 백지수표를 거절하면서 미래를 위해 내놓은 메시아의 위작 여부는 한 가문의 명예만 좌지우지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미 260여년 전 죽은 스트라디바리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이 때 위작 여부를 가려준 것이 다름 아닌 ‘나이테 연구가’인 연륜연대학자들이었다. 메시아에 남아 있는 나이테를 분석한 결과 1680년대의 흔적을 찾았다. 이는 메시아의 제작 연도로 기록된 1716년보다 앞선다. 어느 순간 손이 축축해진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명탐정의 규칙>을 읽었을 때, 딱 그 만큼의 흥분을 가라앉히기 어렵다.
제법 자란 나무처럼 책은 두툼하다. 그만큼 할 얘기가 많다는 말이기도 하다. 원래 대화라는 것은 경청(敬請)에서 시작한다. 20대 대선을 앞두고 많이들 하는 말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