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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 May 22. 2022

동화, 그리고 '사실적 만족감'이라는 건(스포 있음)

그냥 제주 살아요 - 제주도립미술관 '엄마 가짜라서 미안해요


“엄마, 왜 절 버리시나요

왜 저를 버려야 하시나요

진짜가 아니라서 죄송해요

기회를 주시면 진짜처럼 할게요”     


“데이빗, 네가 얼마나 대단한 성공을 한 건지 아니?

너는 동화를 스스로 발견했어. 사랑으로 가득하고 소망으로 불타는 파란요정을 찾기 위한 모험을 떠나 온 거란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네 스스로 해냈잖니. 한동안 네가 어디 있는지 못 찾다가 다시 찾았을 땐 우리 정체를 밝히지 않고 간단한 실험을 하려고 했어.

명령 없이 스스로 하는 추론이 어디까지 가는지 봤지. 인간의 약점 중 하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희망을 갖는거야. 인간의 장점이기도 한 건 바로 꿈이란다. 네가 그렇게 하기 전까지 어떤 기계도 그렇게 한 적이 없어”     

영화 'A.I'중

스티븐 스필버그의 SF영화 ‘A.I’를 다시 봤다. 2001년 극장에서 만났을 때처럼, 이미 충분히 내공을 쌓았다고 생각한 지금도 줄줄 눈물을 흘린다. 그 때 보다 더 울다가 대기화면 상태인 TV와 일체가 됐다. 그저 멍. 화창한 5월의 어느날. 한낮의 기운이 ‘오늘 저녁 놀은 기대해도 좋아’하고 귀띔을 해줬음에도 불구하고 움직일 수 없었다. 아아, 이런 토요일이라니. 


영화는 배경은 미래의 지구, 과학문명이 발달했지만 기후 위기로 통제된 삶을 살아야 하는, 언젠가 찾아올지 모를 현재다. 인공지능 (Artificial Intelligence)을 가진 로봇이 인간을 위한 여러 가지 일을 한다. 그런 로봇에게 ‘감정’을 주는 것이 가능한가, 아니 줘도 되는가의 논란은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부부의 바람을 통해 ‘혹시 모를’의 답을 찾아간다.

감정이 있는 로봇을 만들겠다고 나선 한 과학자에 의해 태어난 데이빗은 불치병으로 치료약이 개발될 때까지 아이를 냉동시킨 한 부부에게 입양된다.

인간을 사랑하게끔 프로그래밍된 최초의 로봇 소년 데이빗은 부부의 사랑을 받으며 인간사회에 적응해 가지만 치료약이 만들어지고 친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면서 버려질 처지에 놓인다. ‘폐기처분’이라는 잔인한 현실 앞에 엄마는 로봇 아이를 숲에 놓아준다.

사랑하는 엄마를 다시 만나기 위한 여정은 험하고 슬프기만 하다. 수많은 고생 끝에 자신이 누군가의 모습을 본떠 양산된 수많은 로봇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데이빗은 진짜 감정을 가지게 된 특별한 개체여서 더 상처받는다.

사람이 돼서 엄마의 사랑을 찾고 싶다는 바람 끝에 피노키오 동화 속 푸른 요정을 만나지만 소원 대신 기능 정지라는 운명을 만난다.

지구상에 인류라는 생명체가 모두 사라질 만큼 오랜 세월이 지난 어느날,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된 기계 생명체들이 얼음 속에 보존된 데이빗을 발견하고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엄마를 만나게 해준다. ‘단 하루’라는 조건부 소원이었지만, ‘잘자’라는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다시는 깨지 않을 깊은 잠에 빠진다.     

영화 'A.I' 중


영화를 보면서 몇 번이고 “어쩌면…” “왜 하필…”하는 질문을 던진다. 답은 없다. 먹먹하다가 또 분노하다가, 애태우다가, 결국 눈을 감았다. 이미 개봉한지 20년도 더 된 영화다 보니 다양한 평이 여기저기 남아있다. 초반에는 감정을 가진 로봇 아이에 대한 안타까움과 과학만능주의에 대한 비판 같은 얘기가 많았다면 언젠가부터 반려를 통한 접근을 하는 경우가 늘었다. 쉽게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책임지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반성을 읽는다.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렸는지는 없다. 다만 옛날 기준으로 강산이 두 번을 바뀔, 지금 같으면 수십번 뒤집어졌다 돌아왔다 했을 시간 동안 시선을 붙들 흡입력이 있다는 점에 탄복한다.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으로 폴란드의 사회학자이자 철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을 떠올렸다.     

“외로움으로부터 도망치는 사람은 고독의 기회를 놓친다. 사람이 생각을 '그러모아' 숙고하고 반성하고 창조하는 능력, 그 마지막 단계에서 타인과의 대화에 의미와 본질을 부여하는 능력에 바탕이 되는 숭고한 조건을 잃는 것이다. 그러나 고독을 한번도 맛보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박탈당했고 무엇을 버렸고 무엇을 놓쳤는지조차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데이빗의 경험에 동화한 때문인지 모르겠다. 바우만은 현대인을 ‘각자 자신의 보호막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 공허함을 드려다본 정의다. 인터넷이 만든 세계는 끝이 보이지 않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까지 관계의 범위는 확장됐지만, 접속이 끊기는 순간 느끼는 감정은 복잡미묘하다. 이유 없이 불안하고 더할 나위 없이 공허하다. 인터넷 속도에 집착하고 혼자 알지 못하는 것들에 강박을 느낀다. 행여 어떤 흐름에서 밀려나지 않을까 조급해 하는 것도 모자라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 맞다는 확증편향에 취해 있음을 부정한다. 어쩌면 데이빗이 좇았던 파란 요정과 엄마에 대한 기억이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대책 없이 진지해지기 전에는 미술관에 있었다.

제주도립미술관이 오는 8월 21일까지 미술관 1·2 전시실에서 진행하고 있는 ‘엄마! 가짜라서 미안해요’전을 찾았다.

우리나라 극사실주의 회화 탄생부터 현재까지의 흐름을 다룬 대규모 기획전이다.

국내 극사실주의 화가 37명의 작품 119점이 전시실에 나왔다. △한국 극사실-회화 탄생과 전개 △한국 극사실-회화 명맥 잇기 △한국 극사실-회화의 새로운 세대 등장 등 모두 3그룹으로 나눠 각각의 주제에 맞는 작가들의 작품을 배치했다.

'탄생과 전개'에서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다양한 전시에 참여하며 캔버스 화면에 형상과 손의 회복을 주장했던 작가 14명의 대표작품을 중심으로 전시됐다. 강덕성, 고영훈, 김강용, 김홍주, 박장년, 배동환, 변종곤, 서정찬, 이석주, 조덕호, 조상현, 주태석, 지석철, 차대덕 작가 등이 섬세한 붓끝을 다스린다.

두 번째 그룹은 극사실-회화가 국내에서 다시 주목받은 시기인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활약하던 강형구, 김강용, 김창영, 서정찬, 이재삼, 이정웅 작가의 작품으로 구성됐다.

마지막으로 현재 미술계에서 극사실-회화를 대표하는 강강훈, 김성윤, 김영성, 문창배, 박성민, 박종필, 박지혜, 박창범, 안성하, 유용상, 윤병락, 이광호, 이진용, 이흠, 이희용, 정명조, 정창기, 한영욱, 허유진 작가가 허구와 진실의 경계가 확실하지 않은 세상에서 '원본 없는 가짜'를 창조한 작품들도 대중과 만난다.


그 전시 제목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A.I'에서 주인공 로봇이 인간 가족에게 전하는 대사를 따왔다고 해서 무심코 다시 보기를 선택했다.

무슨 의도였는지는, 그 분야 전문가가 아니어서 모르겠다. 어쩌면 작품들 속에서 데이빗이 그랬던 것처럼 작가들이 스스로 찾은 ‘동화’를 찾아보자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기에는 작품, 아니 오랜 시간과 공을 들여 섬세하게 옮겨낸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것들은 흔히 복원·복제라 부르는 것들과는 대놓고 거리를 둔다. 그 안에서 진짜와 다른 것을 찾아내려는 집요함을 조심스럽게 누르고 눈 앞의 것을 위해 누구보다 섬세하게 색을 고르고, 붓을 움직였을 그들의 집중력을 본다.

현실에 실재하는 것을 완벽하게 재표현하는 과정은 희생을 담보한다. 빛을 볼 줄 알아야 하고 호흡을 멈추고 순간을 읽는 훈련을 반복해야 한다. 그래서 작품 속 주된 소재는 일상 생활에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과학기술을 빌리지 않고 오로지 사람의 힘으로 창조해 내는 것들이 대상의 소소함을 넘어 은근한 공감으로 이어진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코로나19로 2년 가까이 살아가는 모든 것들에 거리를 뒀던 때문인가, 남의 인생사는 물론이고 별 일 아닌 하루, 특별할 것 없는 일상에 과몰입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진짜를 더 진짜처럼 묘사한 그것애 끌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사실적 만족감이라고나 할까. 데이빗의 가장 행복했던 ‘하루’같은.           

행복은 참 사소하다.
늘 보던 것이 오늘따라 더욱 아름답게 보이기도 하니까. 어쩌면 나는 늘 스쳐 지나가는 것과 그 순간들 사이에서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이 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뒤돌아보는 것에서 스치는 모든 것에서 아름다움이 나오니까. 또다시 그 순간들을 놓치고 싶지 않으니까. 사소한 것을 자주 바라보자. 아주 조금은 느슨해도 좋다.
                                                               - 박수정‘어쨌거나 계절은 바뀌고 다시 돌아올거야’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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