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공감하기 - '여성'이라는게 이유가 돼?
아저씨들은 특히 권력을 쥔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여서 나쁜 짓을 합니다.
불리한 일은 은폐하고 몰래 담합하고 검은돈을 주고받죠.
거기에 여성이 하나 끼면 아저씨들이 그러기가 힘들어져요.
나쁜 짓에 가담하질 않거든요. 단단한 결속일수록 흔들리게 되죠.
후로미츠씨가 여기에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요, 아저씨들을 감시하는 사람. 사나이의 낭만이 최고인 사람들과 어울리기는 힘들겠지만 그거 아무것도 아니예요. 후로미츠씨는 다른 사람이예요. 다른 사람으로 살아주세요
서사 작품 속에서 개별적인 사건을 나열하는 경우가 있다. 스토리(story)는 일반적으로 어떤 사건들이 일어났는가를 시간 순서대로 나열한 것인데 반해 플롯(plot)은 외적인 동시에 심리적인 것으로서 양자 관계의 발전 양상이 작품 속에서 질서를 갖추게 된 것을 말한다. 신데렐라의 내용은 하나이지만 다루는 방식에 따라 여러 가지 구성이 생겨나게 되는 것을 플롯으로 설명할 수 있다.
스토리텔링 애니멀에게 참 쓸모있는 요인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건조한 사실이 아니라 의미가 부여된 스토리이고,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 중에 틀을 만드는 것이 플롯이니 말이다. ‘있는 그대로’만으로 오늘을 설명하고 이해하기는 어렵다.
* 진실은 사람 숫자 만큼 있다
우연히 보기 시작한 일드 ‘미스터리라 하지 말지어다’. 스다 마사키라는 개성 넘치는 배우가 출연한다는 것에 일단 선택. 첫 에피소드부터 ‘흠칫’하게 만드는 대사가 눈을 떼기 힘들게 한다.
주인공은 쿠노 토토노라는 카레를 좋아하는 평범한 대학생이다. 악성 곱슬머리에 사교성도 없어서 애인은커녕 친구도 없는 밋밋한 청년은, 그러나 세상을 정해진 대로만 보지 않는다. 아직 그 이유가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은 이내 ‘아 그래, 그럴 수 있겠다’는 공감으로 이어진다. 그 것이 다시 절대 풀리지 않을 것 같은 미스터리의 실마리가 된다. 이 이상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일단 입을 다물기로 한다.
다만 제20대 대선을 거치고 다시 선거를 앞두고 있는 입장에서 드라마에 나온 대사를 공유하는 것 만큼은 해야 겠다.
쿠노군의 매력이라는 것이 그동안 내가 사랑했던 ‘명탐정 코난’을 뒤집는 일이다.
지하조직이 만든 비밀약을 먹고 아이가 된 이후에도 “진실은 언제나 하나”를 외치는 명탐정의 대사를 쿠노군은 “정말이냐”고 되묻는다. 그리고 말한다. “진실은 사람의 숫자만큼 있다. 다만 사실은 하나다” 궤변 같은 말이지만 그의 말을 따라가다 보면 진짜라고 믿고 있었던 것의 틈이나 흠 같은 것이 보인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아니 더 심각하게 ‘여성’의 역할을 제한하는 일본 사회에 던지는 경종(?)도 그 중 하나다. 경찰 형사1과에 배치된 이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사직서를 준비하던, 여순경 후로미츠와 나누는 대화는 의미심장하다.
- 어차피 저 같은 건 아무 것도 못한다고. 여자라고 무시하지 마세요
+ 무시한 적 없습니다. 후로미츠씨가 무시당하지 않게 신경써야 할 대상은 이 경찰서의 아저씨들입니다. 그것이 후로미츠씨가 존재하는 의미입니다.
- 제가 존재하는 의미요? 괴롭힘 당하거나 마스코트, 잡일 담당 숫자 채우기 또 다른 게 있나요?
+ 제가 편견덩어리라 말을 거르지 못하는데요
아저씨들은 특히 권력을 쥔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여서 나쁜 짓을 합니다
불리한 일은 은폐하고 몰래 담합하고 검은돈을 주고받죠
거기에 여성이 하나 끼면 아저씨들이 그러기가 힘들어져요
나쁜 짓에 가담하질 않거든요 단단한 결속일수록 흔들리게 되죠
후로미츠씨가 여기에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요 아저씨들을 감시하는 사람.
사나이의 낭만이 최고인 사람들과 어울리기는 힘들겠지만 그거 아무것도 아니예요
후로미츠씨는 다른 사람이예요. 다른 사람으로 살아주세요
* 다름을 인정하는 것
다름을 인정하고, 다를 수 있는 상황을 살피는 것.
언젠가부터 알면서도 피하거나 모른척 했던 것에는 사실 다 이유가 있었다…는 얘기가 따끔하면서도 흥미롭다.
지난 연말연초 시간 쪼개 봤던 영드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있었던 것 같다. ‘미스 스칼렛의 사건 일지’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으로 아버지의 탐정 사무소를 이어 받게 된 일라이자는 탐정의 뜨거운 심장과 차가운 머리를 가졌지만 성별 하나 때문에 번번이 무시를 받는다. “여자는 안돼” “여자라서 안돼” 법도 제도도 아닌 관행이란 이름의 창살이 일라이자를 따라다닌다. 불편한 시선 가운데서 무시당하는 일이 일어나도 자초한 일이니 감수하라는 말을 듣는다. 미드 ‘본즈’시리즈의 본즈 박사나 패트리샤 콘웰의 소설 속 검시관 케이 스카페타가 봤다면 입에 거품을 물지도 모를 상황-검시 현장에 여성이 들어왔다는 이유로 쫓겨나고 사건 현장에 있었었다는 이유로 벌금형을 받는-이 속을 답답하게 한다.
이 상황 역시 쿠노군의 눈으로 들여다본다면 여성의 등장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이 흔들릴지 모른다는 어설픈 위기감이 표출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모든 것에 이유가 없다. 다만 ‘여성이라’가 유일한 변명이다.
생계형 탐정이었던 일라이자는 사건을 맡기 위해, 정확하게는 돈을 벌기 위해 어린 시절 친구이자 경찰청의 경위인 윌리엄 웰링턴을 돕기로 한다. 그랬다고 그 친구가 일라이자를 인정했는가 하면 그런 영화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일라이자의 활약으로 별 것 아닐 것 같은 일들의 숨겨진 비밀이 드러나지만, 번번이 윌리엄의 공으로 돌아간다. 아하 뭐 대충 이런 내용이 반복된다. 화려한 뭔가는 없는데 가슴이 끌리는 느낌이랄까.
남녀 역할이 유별했고 신분 있는 여성의 직업 생활을 용납하지 않았던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사회의 편견을 깨고 때론 적절히 그 편견을 이용하며 사립 탐정의 길을 만드는 주인공.
여기까지 보면 여성을 전면에 내세운 히어로물 같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에 마음을 뺏겼다.
여성…은 좋은 상대를 만나 적당히 결혼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평판을 밥 먹듯 신경 써야 했다. 참정권을 얻기 위한 노력이 ‘미친 짓’으로 치부되고 그 마저도 남성이 던진 몇 마디에 진정성을 두고 부대낀다.
여성을 억압하는 불공평한 사회 법률, 남녀 교육 차별과 너무 사소하고 일상적으로 나타나 항의할 타이밍조차 잡기 어려운 몹쓸 말들….
참정권을 확보하기 위해 나섰던 여성 운동가가 그 열정이나 노력과 달리 사회적 한계를 상식이나 합리적이란 이름으로 풀어내지 못해 ‘폭력’을 행사하는 부분이나 별 것 아닌 이유에 무너져, 단호하게 의지를 지키지 못하는 동료들을 묘사한 부분은 아쉽고 아프다. 다만 그랬었기 때문에 사회적 흐름에 잠깐 편승했지만 풀어낼 방법을 찾은 여탐정의 선택이 두드려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보다 솔직히 찌릿했던 건, 신문기자의 등장. 이른바 직업병의 영역이다.
부서와 자신을 조명하는 기사에 경찰 높은 자리에 계신 누구의 이름을 꼭 언급해 달라는 대사에 그만 빵하고 터졌다. 승진을 미끼로 부하를 쥐락펴락했던 상관은 별 것 아닌 당연한 일로 냉큼 받아들인다. ‘안습’이란 단어는 이럴 때 쓰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사 거리를 놓고 주고 받는 내용.
-(사건 일지를 뒤지며)사창가에서 방화로 보이는 불이 났네요
+흥미롭네요. 그런데 누가 죽었나요
-…아니요
+그럼 못 쓰겠어요.
…아 그렇군요.
+ 기사가 되려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잔혹하거나 예상하기 어려운 특이한 것이 필요해요.
+++++++++++++++++++++++
그때도 그랬구나. 아니 지금쯤 바뀌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