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께끼 친구

당이 필요한 날

by 포포

늘 엉뚱한 질문을 하는 친구가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질문이다.

“설탕이 좋니? 소금이 좋니?”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고 힐난하면 이렇게 말을 바꿨다.

“설탕과 소금 중에 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니?”


그것도 질문이냐고 비난하려다 멈칫, 왠지 이건 고민해볼 대목이며 가치 있는 의문이 아닌가 되짚게 된다. 서넛쯤 모여 있다면 논쟁으로 발전하는데, 정작 화두를 던진 ‘짜식’은 말이 없다. 미끼를 물고 싸움 벌이는 모습을 은근히 즐긴다고 할까.

설탕과 소금은 그나마 나은 소재다.

화상과 자상 중에 뭐가 더 아플까?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것과 (영구) 실종되는 것 중 무엇이 더 슬플까?

코딱지와 가래침 중에 뭐가 더 지저분할까?


등등 상상만으로도 아프고, 슬프고, 더러운 질문을 던지는 게 짜식의 습관이었다. 우리는 짜식을 ‘께끼(수수께끼를 줄인 말)’라 불렀고, 가끔은 ‘짜루(키가 작아서 붙은 별명일 거다)’로 부르기도 했다.

소년기를 같이 보내고, 20대 청년기까지만 해도 종종 만났던 께끼는 어느 날 실종됐다. 조용히 집을 떠났다. 아주 가까운 친구에게도 귀뜸 없이 홀연히 사라졌다. 하지만 그 누구도 녀석의 실종을 인식하지 못했다. 군대까지 갔다 온 성인이 집을 떠난 것은 너무 당연한 삶의 과정이기 때문에 그저 ‘께끼는 뭐하고 살까?’ 하며 궁금해 할 따름이었다. 10년, 20년, 세월이 흐르는 가운데 웬만한 친구들은 대략 소식을 접하게 되었지만 께끼의 소식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긴 세월, 그의 흔적을 놓고 설왕설래하던 친구들도 어느 날부터 궁금해 하지 않았다. 궁금증마저 사라져버린 친구의 이름, 별명, 흔적을 나 역시 찾지 않는다. 가끔 당이 필요할 때, 무기력한 몸을 추스르려 믹스커피 한잔을 찾을 때 문득 떠오를 뿐이다. 설탕과 소금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한가? 사라진 친구가 남긴 수수께끼를 여전히 못 풀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설탕과 꿀 중에 무엇이 나은가?”

이런 질문을 하면 답이 금세 나온다. 무조건 꿀 아닌가.

몸에도 좋고 친환경적이며 자연 그대로의 식품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우선 과학적으로 꿀이 설탕보다 몸에 좋다는 증거가 아직 없다. 벌꿀의 생산이 사탕수수의 가공과정보다 친환경적이라는 주장도 세세히 들여다보면 반론거리가 많다. 단맛이 필요한 인류에게 가장 손쉽고 값싸게 공급되는 설탕의 입장에서는 (꿀에 택도 없이 밀리는 게) 억울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정의와 불의, 선과 악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시대에 살던 이들이 가끔 부러울 때가 있다. 당이 필요한 오후, 꿀차를 마시며 사라진 친구를 음미하자니 이유 모를 미안함이 꿈틀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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