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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포 Jun 25. 2021

식물과 작물

그리고 사람과 神 사이

#1

동물과 식물의 차이는 누구나 감각적으로 인지한다. 복잡한 과학적 기준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게 구분할 수 있다. 

식물은 한 곳에 고착해 광합성 활동으로 영양분을 섭취하고, 동물은 자유로이 이동하면서 먹이를 섭취한다.


식물과 작물의 차이는 더 간단하다. 식물은 자연 생태계 속에서 고착 생활을 하는 생명체 전반을 말하고, 작물은 그 중에서 사람이 인위적으로 재배하는 식물들을 말한다.

 

지구의 생태 순환 원리에 맞게 제각각 살아가던 생명체들은 저마다의 교배 방법으로 종족 번식을 해왔다. 하지만 작물은 그들과 근본이 다르다. 사람에 의해 키워지고, 사람을 위해 열매를 맺는, 인위적 노력의 산물로 종족 번식과는 거리가 멀다.

      

#2

지구 최초의 작물은 무엇일까.

현재까지 알려진 것은 밀이다. 조금 넓게 잡으면 밀, 보리, 콩 등의 곡물들이다. 수렵과 채집으로 자연 생태에 따라 생존하던 동물적 인간들이 한 곳에 정착해 집단생활을 하면서 문명이 시작되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곡물을 인위적으로 양산하는 것이 필요조건이었다. 그 첫 번째 대상이 밀이었다는 주장은 4대 문명의 발상지가 모두 밀 재배지였다는 점에서도 일리가 있다.   


독일의 생태학자 한스외르크 퀴스터가 쓴 <곡물의 역사>는 ‘최초의 경작지부터 현대의 슈퍼마켓까지’ 역사를 통틀어 정리하면서 이런 결론을 내렸다.

 

“결국 곡물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고, 곡물에 모든 것이 달렸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그렇다."    


#3

최초의 작물은 정말 밀일까. 쌀이 밀보다 훨씬 뒤에 재배된 작물이라고 믿는 근거는 많다. 밀보다 복잡한 재배방법, 논이 밭보다 후에 등장한 경작지라는 것도 상식적으로 납득이 된다. 그런데 우주는, 생태계는 여전히 우리의 지식에 경종을 울리는 의외의 사실을 종종 등장시킨다.

 

1990년대 후반 청주에서 발견된 ‘소로리 볍씨’가 1만2500~1만5000년 전 무렵의 재배용 볍씨라는 주장이 나왔고(충북대 박물관,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그 타당성에 대한 과학적 논란이 한창 진행 중이다. 최초의 밀 재배 시기를 1만 년 전 내외로 잡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최초의 작물이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인류가 처음으로 재배한 작물은 무화과라는 주장도 있다. 하버드대의 오퍼 바르-요세프 교수 연구진이 사이언스 최근호에 발표했다는데, 무화과의 재배 시기를 1만1400년 전으로 주장하며 각종 근거들을 던져놓았다.


가령, "무화과는 단위결실(씨없는 열매) 돌연변이가 일어난 다음부터 열매에서 새로운 나무가 생기지 않는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무화과나무를 심어 가꾼 것"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무화과가 존재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꽃이 없으니) 씨앗을 자생하지 못하는 식물의 번식은 사람이 개입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므로, 최초의 작물은 무화과일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것을 21세기에 와서야 과학자들이 인지했다는 것도 의아하다.   


#4

최초의 작물이 밀이든, 쌀이든, 무화과든 무슨 상관이랴. 최초는 그만두고 눈앞의 식탁이 풍성하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최초를 탐구하고 분석하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생의 본질을 보고자 하는 거룩한 본능이다.


1만 년 전 혹은 그 이전의 어느 시기에, 어떤 사람이 처음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분명하다. 이후 인간의 생활양상이 바뀌고 역사의 패턴이 바뀌는 데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그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인가.


#5

그는 사람이었고, 사람이 식물의 나고 자람을 컨트롤할 수 있다고 믿으며 구체적으로 실행한 첫 번째 인간이었음은 분명하다. 어느 한 곳이 아니라 지구의 몇 곳에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한 몇 명이 있었으리라는 짐작도 가능하다. 네 명이든 열 명이든 상관없이 그는 인류사 최초의 벤처인이자 가장 위대한 발명가였다. 아인슈타인도, 에디슨도, 스티브잡스도 그에 비하면 잽이 안 된다.  


그가 첫 수확을 하고 손바닥 위에 놓인 결실을 보면서 느낀 희열은 어땠을까. 그는 자신이 신이 되었다고 여겼을 것이다. 후손들의 미래 생활도 어렴풋이 그려졌을 것이다.


신(神)의 파자가 禾+申라는 점도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최초의 작물을 만들어낸 최초의 농부만큼 희열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농부들은 자신이 재배한 수확물을 보며 희열을 느낀다. 그 희열만큼 신이 되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미친놈 소리를 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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