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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포 Oct 12. 2021

가을의 술

술 고픈 날의 기억

#!

비는 간혹 계절의 변화를 가늠하는 잣대가 된다. 엊그제 내린 비가 긴팔 옷을 꺼내게 만들었고, 겨울이 곧 질주해 오리라는 예감을 받았다.

이런 날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가을 햇볕 다사로운 대청마루에서 가벼운 안주와 함께 술 한잔 하던 날이다.


경남 함양의 전통주 제조사 명가원을 찾은 가을날, 미국에서 온 주류바이어는 술보다 풍경에 빠져 있었다. 하동 정씨 집안의 가양주는 솔송주라는 솔잎 향의 증류주로 전통주 시장에서는  제법 인기가 있었다. 그 모태가 된 정씨 집안의 500년 고택에서 우리는 가을의 술을 마셨다.


한가로운 마루에서 책상다리로 앉아 잣과 차를 안주로 술맛을 보았다. 서산으로 이동하던 해도 잠시 멈춰 술맛을 도울 만큼 날씨도 풍요로웠다. 아, 참 좋네요. 술맛인지, 정취 맛인지… 알 수 없는 음미들이 흘러나왔다.


물론 시간은 그런 자리를 오래 허용하지 않았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우리는 지리산 계곡 쪽으로 이동해 저녁식사로 아쉬움을 달랬다. 아뿔싸, 대청마루에서 마시던 술을 안 가져왔으니 어쩐다, 그냥 소주라도 시킬 수밖에. 이슬인지 처음인지 모르겠다. 초록병의 술을 한잔씩 마시며 입맛을 돋웠는데, 누구도 두 번째 잔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서로 말하지 않았지만 이유를 알고 있었다. 갑자기 화학적 약내가 진동했달까, 맛은 비교할 때 노골적으로 드러난다(그렇지만 여전히 다시 희석식 소주를 마시고 있다. 값도 싸고 쉽게 잡히니 어쩔 수 없다).

#2

몇 년 뒤 나는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미스터 션샤인’의 아기씨를 보며 잘 만든 드라마의 가치를 음미하고 있을 때였다. 아기씨의 미모와 목소리와 대범함에 푹 빠져 있던 중 낯익은 장면이 나왔다. 기와집 고택의 대청마루, 돌담, 소나무, 그리고 아기씨 할아버지가 마루위에서 호령할 때, 깜짝이야! 놀라버렸다. 할아버지 뒤쪽 처마밑에 내걸린 현액이 확신을 주었다. 저곳은 명가원인데?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유학자 정여창에게 성종 임금이 내렸다는 현판의 글씨는 忠孝節義. 힘이 넘치는 굵직한 서체가 세월의 힘까지 얹어 무게를 더했다.

드라마에 심취해 있다가 갑자기 술이 고팠다. 다행히도 명가원에서 보내준 리큐르 ‘담솔’이 남아 있었다.


그날 이후 누군가 질문을 하면 이렇게 답했다.

“한국에서 제일 좋은 술은 무엇입니까?”

“제일 좋은 술은 모르겠지만 제일 좋아하는 술은 담솔입니다.”

그날, 지리산 계곡을 떠난 후 든 생각이다. 가을의 술은 정취를 담아 마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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