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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포 Aug 26. 2018

그리운 청년

누가 청년이고 누가 노인인가

    

적당히 알고 지내던 사람 중에 ‘청년신문’을 창간했던 이가 있다. 뜻밖이었다. 그에게서 ‘청년의 기상’보다 ‘겉늙은 이미지’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호기심 삼아 물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훌륭한 신문을 왜 버렸나요?”

“장사가 안 되니 버렸지요.”

“그렇게 훌륭한 신문이 왜 장사가 안 되었죠?”

“원 참, 청년들에게 신문 사볼 돈이 있습니까? 또 돈 없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누가 광고를 하겠습니까?”

듣고 보니 우문현답이었다. 

갑자기 그가 좋아졌다. 그를 겉늙게 만든 비밀을 찾은 듯했고, 무모한 일을 벌였던 이력이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 솔직담백한 태도가 은근히 끌렸다. 이전까지는 적당히 알고 지냈는데 이후부터는 제법 가깝게 지내고 있다.     

어느 시골마을 이장을 만났는데 “우리 마을 청년회장도 겸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나이를 물었더니 “60이 갓 넘었고 마을에서 젊은 축에 낀다”고 했다. 청년회 가입 자격은 65세까지란다. 요새 웬만한 농촌은 이주자들을 따돌리지 않을 뿐더러 시골에 잘 정착하도록 도와주는 시스템을 가동한다고 자랑했다. 그 중심을 청년(60대)들이 잡고 있다는 것이다.

'청년. 이는 듣기만 하여도 설렌다'는 시구가 있는데, 어언 태곳적 이야기가 돼버렸다. 요즘 청년들은 취업을 위해 눈이 충혈되어 있고 아르바이트다 뭐다 바빠서 미래를 설계할 짬이 없다. 정의가 무엇인지 고민할 시간도, 일기를 쓰며 나를 돌아볼 여유도 없다. 시골 노인들과 도시 청년들 중 누가 진짜 청년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시골 마을 골목길을 걷는데 세월 묵은 시멘트 담장이 갈라지고 있었다. V자 형태로 갈라진 담장 시멘트 속에 또 다른 담장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주아주 오래 전에 쌓았던 돌담 토담이 시멘트 속에 숨어 있던 것이다. 오랫동안 갇혀 있던 토담이 삐쭉 고개를 내밀고 "이제 나가도 돼요?" 하고 묻는 것 같았다. 마을 이장이 말했다.

“70년대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시멘트로 덮어 버렸던 담장들입니다. 시멘트들이 부서지고 갈라지면서 옛 토담들이 드러나고 있는 건데, 일부러 내버려 두고 있습니다. 저것도 역사이니 눈으로 배우는 거지요.”

시멘트가 낡으면 흉흉하기 짝이 없다. 그 속에 숨어 있던 토담의 아름다움이 상대적으로 비교되어 빛을 발하고 있다. 저렇게 예쁜 담장을 시멘트로 가둬 버리며 ‘우리 마을 만세’를 불렀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청년이란 무엇인가. 

세상에. 네이버 검색을 해보니 온통 창업과 취업 정보로 도배돼 있다. ‘청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네이버의 답이 그렇다. 우리는 온갖 정보를 그런 식으로 취하고 산다. 


청년이란 무엇인가. 

할 수 없이 인문과학 분야에서 찾아봤더니 이런 내용이 나왔다.  

청년은 ‘새로움’과 ‘신문명’의 건설을 의미했다. 청년이란 용어는 1910년대에 부상했다. 일제강점기 때 월남 이상재 선생은 이 용어를 듣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때까지 우리나라 남자들은 소년기를 지나자마자 결혼하여 곧장 장년이 됐기 때문에 청년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찌감치 늙어버리고, 허세만 부리다가 죽어갔던 것이다(뭐 그런 주장도 있다는…). 청년은 나이로 규정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고 여자청년, 청년여자란 용어도 쓰였다. 청년은 1923년경부터 사회주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쇠퇴하지만, 훗날 다시 살아나게 된다. 한국은 영원한 청년국가여야 한다는 주장도 새롭게 제기됐다.

 

국어사전은 청년을 ‘신체적ㆍ정신적으로 한창 성장하거나 무르익은 시기에 있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다. 역시 나이와 무관해 보인다. 토담을 덮었던 시멘트는 당시 새로움의 상징이었다. 그것이 낡고 늙어 부서지자 토담이 다시 등장했는데, 나이로 치면 토담이 훨씬 많은 셈이다. 그야말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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