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식사에 대한 예의

식기 전에 먹기

by 포포

오랜만에 파스타를 먹으러 갔다. 파스타 집 치고는 덤덤한 분위기, 식탁 위에 놓인 받침용 종이에 이런 글귀가 씌어 있다.

-식전빵 나오면 제발 대화 그만하시고 빵부터 드세요.


짧고 솔직한 표현이 한편 당돌하기도 하고, 약간은 장난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호기심이 생겨 다음 문구를 안 읽을 수가 없다.

-식으면 맛없어요.


요구인 듯 부탁인 듯, 매너인 듯 조언인 듯, 미묘한 표현이 왠지모르게 마음을 끌어 다음을 또 읽는다.

-음식 나왔는데 안 드시고 사진찍는 분들 계신데, 저희 매장 홍보 안 해줘도 되니까 빨리 식사 먼저 하세요. (사진 필요하시면 저희가 잘 찍은 사진 보내드릴게요.)


이쯤에서는 웃음이 빵 터진다. 이 집 재밌네. 주인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는 문구가 뒤를 잇는다. (읽는 이의 심리를 꿰뚫고 있는 듯)

-요리에 미친 선배가 요리에 미친 후배 2명을 모셔와 요리하는 곳입니다. 최고로 맛있는 음식이라고 보장할 순 없지만 최고로 착한 음식이라고 보장합니다.


이쯤에서는 진심이 전달돼 은근히 맛에 대한 기대를 하게 된다. 서빙하는 남자를 흘끔 보며 인상을 가늠한다. 저이는 요리에 미친 선배일까, 요리에 미친 두 후배 중 하나일까.

251115 파스타집.jpg

식사하는 분들께 바라는 글은 백지 우측에 짧은 행장으로 디자인돼 있다. 나머지는 여백(식탁 받침용이니 그래야 할 듯).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는지 하단에 두 줄짜리 식당 소개글이 쓰여 있다.

-저희 매장은 12년 동안 메뉴가격이 거의 동일합니다. 앞으로도 음식가격 인상보다 손님들 마음에 들도록 노력할 테니 예쁘게 봐주십쇼!

-참고로 매장 인테리어나 분위기는 별루입니다. 앞으로 인테리어에 투자하기보다 음식값을 내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첫 문장의 당돌함은 사라지고 (애초 없기도 했지만) 예쁘게 봐줄 수밖에 없어졌다.

지난 10여 년은 외식업계 고난의 시기였다. 이들의 시련도 적지 않았을 듯, 음식을 먹는둥 인테리어 구조를 살피는둥 정신이 산란했지만, 와중에도 음식은 맛있게 먹었다. 식기 전에 먹었으니까.

251115 리에또.jpg 90년대 경양식집을 연상시키는 인테리어가 은근히 정겹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식사에 대한 예의는 은근히 까다롭다. 신에 대한 예의, 농부에 대한 예의로 기도를 한다든가, 어른에 대한 예의, 주변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식탁 위의 대화법도 배우곤 한다. 실제로 필요한 예의임을 모르지 않지만 지나친 겉치레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 식당은 한마디로 ‘그따위는 접어두고’, 지금 당장 맛을 보라고 권한다. 음식은 타이밍이다, 요리는 리듬이다, 정성이다, 별의별 명언이 많지만 확실한 하나를 말한다. 식으면 맛이 없다.


모든 음식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모든 생활은 그런 것 같다. 식으면 맛이 없다. 사랑도, 비즈니스도, 공부도, 열정도… 식으면 맛이 없고 힘도 떨어진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색깔 있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