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삶에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벌써 올해 신청한 청년마음건강 심리상담이 7회 차에 접어들었다.
상담을 할 때마다 그동안 혼자서 투박하게 해 나갔던 나만의 장치들이 선생님께 인정을 받았다. 그런 나만의 훌륭한 장치들이 내 마음속으로는 한가득인데 그걸 글로 적어두지 않으니 빠른 속도로 연기같이 공중분해 되는 걸 느낀다. 기록하지 않으면 나중에 다시 마음과 정신을 아프게 하는 일들이 (반드시) 내 마음을 꽉 쥐고 뒤흔들 텐데 그럴 때마다 다시 레벨 1이 되어서 보스몹까지 힘들게 깨야하는 것이다.
선생님은 내가 심리상담을 심화과정으로 들어가서 받게 되는 행동들을 스스로 해내고 있다며 상담을 갈 때마다 신기해하신다. 나는 그저 살아내고자 바둥거렸을 뿐이라고 말씀드리자 선생님은 잠시 가만히 생각하시더니 내 두 눈을 지긋히 바라보시며 지금의 당신을 만들기 위해서 그동안 정말 얼마나 많은 노력 했을지 상상이 안 간다고 하셨다.
나는 정말 미친 듯이 이것저것을 맛보고, 뱉어내며 나만의 삶을 만들기 위해서 끊임없이 헤엄쳤을 뿐이다.
주변사람들은 내가 화가 없는 사람, 혹은 감정기복이 굉장히 일정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내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것일 뿐. 속에는 악마가 살아서 종종 퇴마를 해야 한다. 나는 그걸 운동으로 해준다. 그래서 운동할 때 종종 속으로 별별 욕을 하면서 할 때도 있고, 눈물을 흘릴 때도 있다. 운동하면서 머리에 헬스장 수건을 덮고 땀 흘림과 동시에 울고 있는 사람을 보면 가엽게 봐주시길.
아주 안타까운 건 화가 날 때마다 운동하러 달려갈 수가 없다는 것이고, 시간이 꽤 필요하다는 것이다. 운동하고 씻고 하는 게 보통 2시간 이상이 걸린다. 머리를 말리다 보면 가끔 시원하게 머리를 밀고 싶은 충동까지 일어난다.
화날 때마다 이 루틴을 하면 하루 48시간이라도 모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일상생활에서 나를 화나게 하는 것들은 여기저기 숨어있다. 그것들은 예외 없이 찾아오고, 언제 없어질지도 모르겠다. 그냥 버텨야 하는 것이다. 난 이걸 잘 버티기 위해서 엉덩이에 불을 붙인다. 물론 실제로 말고 상상으로.
예시의 상황으로 최근에 일어난 일로 설명해 보겠다.
대부분의 갈등은 회사에서 일어난다. 역시 회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인데. 그것도 바로 옆에 있으면서 굳이 톡으로만 자료요청을 한다.
그럼 나는 그 내용이 뭔지도 잘 몰라서 다시 물어봐야 하는 상황이 된다.
부탁하는 사람보다 부탁을 받은 사람이 엉덩이를 움직여야 하는 아이러니가 되는 것이다.
회사는 공동체로 움직이는 곳이고 서로 한 공간에 모여서 최대한의 효율을 내는 곳이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유독 소통하는 걸 귀찮아하는 사람이 있다.
어차피 회사돈 받고 일하는 직원의 입장에서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냐만은 나는 가성비를 따진다.
부탁을 한다면 왜, 정확히 어떤 자료를, 언제까지 등등 최대한 제공할 수 있는 내용을 먼저 입력해 주는 게 상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가장 정확한 아웃풋이 나올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굳이 집이 아닌 사무실에 같은 공기를 맡으면서 모여있는 것이다.
그날도 그냥 그렇게 툭하고 자료요청이 왔고, 나는 다시 몇 차례 자료에 대해서 물었다.
그런데 상대도 전달받은 업무라 당장 필요한 건지, 어디까지 알아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거기서 매우 답답함을 느끼고 이런 과정이 내 업무시간을 갉아먹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순간 욱-하고 속에 검은 악마가 올라왔다. 그때 순간적으로 엉덩이를 딱 떼고일 어나 복도로 나갔다.
그냥 가서 마냥 숨쉬기 운동하는 게 아니라 나름의 루틴이 있다.
복도로 가면 (감정표출-> 나 다독이기-> 상대연민-> 해결책 찾기)를 순서대로 한다.
일단 감정을 표출한다. 나를 짜증 나게 하는 상황에 대해서 가감 없이 마음을 표출한다. 그게 나를 가장 우선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투박한 감정들을 두서없이 뱉어내고 나서 나를 다독여준다. '네가 돈 번다고 고생이 많다.'라면서 토닥여준다. 그렇게 나를 꼭 안아주고 나서 상대에 대한 연민도 잊지 않는다. '제대로 된 소통법을 모르는 불쌍한 사람이다. 더 큰 네가 조금 더 넓게 봐야 한다.'라고 생각한 뒤 해결책을 생각한다.
그렇게 다시 자리에 돌아와 조금은 진정된 마음으로 상대와 최대한 간결하게/명확하게 소통한다. 이때 나는 더욱 눈을 보고 마주하며 이야기한다. 여기서 포인트는 대화할 때 말꼬리를 흐리지 말고 정확하게 ("했는데..." "해서..."처럼 마침표가 없는 말투는 좋지 않다. "하겠습니다." "하면 될까요?"라고 정확하게 마무리를 하는 말투를 사용하면 좋다.) 그러면서 약간의 아쉬웠던 부분을 언급해 준다. "저도 이 부분에 대해서 사전에 전달받은 게 없어서 빠르게 드릴 수없어 죄송합니다. 이 자료는 00일까지 전달드리겠습니다"라고 내가 문제를 마무리 짓는다. 그렇게 정리하고 나면 뭔가 이상하게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만약 내가 그 자리 그대로 계속 앉아있었다면 그냥 불만만 계속 도돌이표처럼 말했을게 뻔하다.
결론적으로는 그 파일은 그렇게 빠르게 필요하지 않은 것이었고, 작업시간에 여유기간을 잡아서 이야기를 했던 터라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던 나는 내 시간을 잘 지킬 수 있었다.
결국 그분은 개인적으로 미안하다며 사과했고 나는 그렇게 서운한 마음 없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여기에서 상대가 사과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느꼈다. 또한 나도 분명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에 역시 상대의 시간을 의도치 않게 낭비했을 수도 있겠다, 조심해야겠구나- 싶었다.
엉덩이에 아주 뜨거운 촛불의 끝부분이 닿기 시작한다고 상상해 보자.
그럼 벌떡 일어나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든다.
핵심은 그 상황에서 빠르게 벗어나야 한다는 것.
계속 거기서 죽치고 앉아있으면서 상황이 나아지기를 기다리는 건 마치 '사막에 있는데 언젠가 비가 올 거라며 더워 죽겠는데도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나갔다 들어오면 상황이 바뀌냐고? 아니다. 역시 이전과 그대로 개판이고 엉망진창이다.
그냥 새싹 하나가 생긴다. 부딪힐 용기(악바리 정신, 혹은 깡다구)가 생기는 것이다.
아예 도망가버리는 게 아니라 잠시 나라는 말을 다른 판으로 옮겼다가 다시 현장으로 투입시키는 것이다.
내가 내 인생에 감독이기 때문에 장면을 순식간에 바꿀 수 있다.
회사 가기 싫어.
저 사람이 싫어.
이렇게 살기 싫어.
이런 생각들이 괴롭힐 때 다 놔버리고 싶을 때.
스스로의 삶에 감독이라는 자리를 제대로 살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회사를 다니는 일
오늘 점심 메뉴는 뭘 먹을지
어떤 걸 보고 어떤 걸 들을지
주말에는 누구와 시간을 보낼지 등등
모든 게 사실은 나라는 감독의 결제를 받은 결과다.
아무도 강제로 하라고 한 적 없다.
자신이 가진 역할에 대해 조금 더 크게 볼 필요가 있다.
나에게는 내 삶의 방향을 결정할 권한이 존재한다.
다들 본인만의 인생에 감독이기 때문에 그 역할들이 작아 보일 뿐. 사실 우리 각자가 정말 멋진 역할을 해내고 있는 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