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도 미룰 수가 있습니다만?

미루고 미루다가 불안까지 미루는 사람

by poppy

불안이 예고도 없이 갑자기 찾아올 때가 있다.(사실 이 친구는 매번 말없이 찾아온다.)


그 종류는 제각각이지만 큰 공통점을 꼽자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내가 괜스레 불안에 빠져서 허우적댈 때 드는 생각들 중에 몇 개를 적어본다.

°지금까지 내가 이뤄놓은 것들이 다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을 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것 같다)

°소중한 사람들이 나에게 실망하거나 멀리 떠날 것만 같을 때

°건강이 바닥으로 내팽개쳐 저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될 때

°우울이 나를 집어삼켜서 내가 나를 이기지 못하는 경지에 다다를 때

°큰 사고가 나서 평온한 내 삶이 산산조각 날 것 같을 때


참.. 직업을 드라마 작가를 했어야 했나 보다.

불행으로 가는 시나리오를 동시에 몇 개를 구상하는지 참 재주도 좋다.


이런 나는 큰 문제가 있는 인간인가?





방어기제 알아차리기


생각해 보면 심리상담을 받으러 상담소를 찾아가면 선생님들은 항상 어린 시절, 과거를 물어보신다.

좋은 과거든, 불행한 과거든 지나왔던 시간이 현재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과거부터 나는 불안도가 높았다. 쉽게 놀랐고, 덩치는 또래에 비해 한참 큰 체격이었지만 항상 소심했다.

부정교합이나 체중 때문에 외모 콤플렉스도 있었고 부모님이 사이가 좋았던 날은 커갈수록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고삼 때 이혼하신 부모님 때문에 입시를 망해버릴 거라 생각했지만, 나는 그 속에서도 국내, 해외 각종 공모전에 닥치는 대로 미친 듯이 참여했었고

그 덕분에 가고 싶었던 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을 했었다. 불안하면 끊임없이 더욱 바쁘게 움직였다.

이렇게 보면 불안은 나에게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 자원이 되어준 것이다.


인사이드아웃 2에 보면 불안이 가 등장한다.

그 친구가 미친놈처럼 키보드를 두들기며 폭주하는 장면에서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불안은 나에게 적이 아니었다.


날 지키고자 했던 보호 본능이었고, 누구보다 내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 감정을 알아차리지 않고 무시하고, 지나치고, 방관하면 그때서 폭주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럼 불안이 많을수록 좋은 것인가


과유불급이다. 뭐든 적당히가 좋은 것이다.

지렁이처럼 길어지려 하는 불안은 지난번 상담 때 배웠던 [2초 단위로 불안 자르기]를 계속 연습한다.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불안을 실제 글로 적어본다.

막상 적어놓고 보면 생각보다 보잘것없는 불안이 많다.


당장 눈앞에 있지도 않은 상황 때문에 잠을 설치고, 입맛을 버리거나, 폭식,과음등등 으로 나를 해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생각은 제어하기 쉽지 않은 영역이다. 하지만 불가능하지 않다. 상담사 선생님은 내가 하는 일상루틴들이 꽤 [수행]과 닮아있고 이미 그런 작용을 하고 있다고 하셨다.


*식사할 때: 그냥 씹고 삼키는 것이 아닌, 눈으로 먼저보고 입에 넣는다. 입안에서 왼쪽-오른쪽 사이좋게 저작활동을 하면서 재료의 향을 느끼고, 씹는 소리를 듣는 것. 그러면서 내 기호를 알아차리 것.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관찰한다. 김밥 한 줄을 먹을 때도, 샌드위치를 먹을 때도 동일하다. 가끔가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메뉴가 발견되었을 때는 가고 싶어서 찜해뒀던 가게에 가서 먹어보는 것도 좋다. 타인과 대화할 때는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먹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회사 점심식사는 시간이 제한되어있어 되도록 혼자 먹는다.)


*나만의 리추얼 찾기: 양치질, 세수, 머리 말릴 때 : 당연한 것을 반복하는 게 아니다. 있을 때 잘해줘야 한다. 이빨을 닦을 때도 작은 칫솔로 도자기를 닦는 듯이 하나하나 닦아주기.


*운동할 때: 너무 깊은 생각에 빠지지 않고, 숫자를 반복해서 세거나, 키워드(건강, 회복, 중심 등등)를 반복해서 되뇐다. 크게 입 밖으로 소리 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생각정리할 때: 부모님, 가정환경, 선천적인 건강상태는 선택할 수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받아들임. 그들과 반드시 필요한 최소한의 선을 긋는 연습. 타인의 선택은 내 의지와 상관없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 부모나 가족이라도.


행동은 내가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

가끔가다 정말 끔찍한 악몽을 꿨을땐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다. 해석도 찾아보지 않는다. 그리고 '응^^ 개꿈..ㅎ'이라며 무시하고 만다. 해몽을 하거나, 누군가에게 말을 하면 왠지 그 꿈에 스스로 힘을 실어주는 느낌이 들어서 그렇다. 그만큼 내 말과 행동에 힘을 믿는 것이다.

그렇게 지나가면 진짜 신기하게 가물가물해지고 흐려진다.



불안을 미룬다. [장바구니 담아놓기 방법]


소비습관도 잡는 일석이조 두 마리 토끼 잡기가 가능하다.

불안하면 뭔가를 사는 버릇이 있었다. 특히 사회 초년생 때는 불안하면 그렇게 뭔가를 사고, 쟁여뒀다. 곧 전쟁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지금 돌아보면 그건 돈을 직접 벌어서 사용해 보고, 저금하고 불리는 방법을 배워보지 않아서 돈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불안했던 것 같다.


앞서 말한 '불안이 행동하는 에너지가 된다'라는 것도 맞는 말이지만 ,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영역밖의 불안을 처리할 때는 불안을 장바구니에 담아둔다. 바로 결제하지 않고 하트만 눌러두는 것이다.

그리고 속으로 말한다.


"맞아. 그 일은 언젠가 반드시 일어날 거야. 근데 내가 백발 할머니가 되어서 죽기 10일 전쯤에."

이렇게 생각하고 몇십 년 뒤로 미뤄버리면 처음에 불안은 당황한다. 내가 이렇게 대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항상 넘어진 아이를 달래는 부모님 마냥 내가 더 어쩔 줄 몰라했었다.


지금은 좀 다른 방법을 시도 중이다.

죽기 10일 전부터 일어날 미래의 일을 몇십 년도 앞서서 미리 걱정하면서 나를 곪아터지게 해서야 되겠냐고. 네가 나를 사랑해서 하는 일들이 오히려 더 힘들게 한다고. 멈춰주었으면 좋겠다며 내면 속 불안에게 제안한다. 그럴 수도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인정하되, 저- 멀리 미뤄두니(이 정도면 사실 거절이다) 약간 멋쩍은 듯 이리저리 쭈뼛거리다가 사라진다.


진짜 만약 백발 할머니가 되어서 (난 97살까지 살 거다) 10일 전부터 고통이 찾아온다면 그게 그다지 무섭지 않을 거 같다.


불안과 소통하고, 협상하는 과정을 계속 거치면서 나에게 또 한 발짝 다가가는 느낌이다. 마치 나와 연애하는 느낌이다. 알다가도 모르겠지만 이건 상대를 바꿀 수도 없으니까. 운명이다 생각하고 계속 공부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