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와 대면하는 방법을 기록
인간은 참으로 연약하고 다채로운 생명체다.
작은 손톱은 뭐 하나 베어낼 수없고 이빨도 뭉툭해서 별로 강하지 않다. 피부는 어찌 그리 연약한지 얇은 종이 한 장에도 쉽게 베여 상처가 난다. 내면은 왜 그렇게 복잡한가. 각각 개별적으로 감정을 느끼며 생각하고 말한다. (동물로 치자면 키우기가 엄청 까다로운 것이다)
특히 큰 상실, 우울을 마주칠 때 감정이 태풍처럼 휘몰아치게 되는데 이때를 무지하게 마주하면 내면 속의 기괴한 형태의 괴물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 지혜롭게 넘어가면 이후 인생에서 마주치게 될 거대한 파도를 잘 넘어갈 튼튼한 배를 만들 수도 있다.
이번글은 자녀의 입장에서 [부모님의 이혼과정에서 겪은 감정 5단계]를 기록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시간들은 순탄하지 못했으며 솔직히 정말 무지하게 버텼다. 아직도 상처가 가끔 덧나고 간지러울 때가 있다. 내면에는 분노가 미쳐 사그라들지 않은 흉측한 괴물도 존재한다. 만약 힘들었던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나를 어떻게 대해줬으면 좋았을지를 늦게나마 기록한다.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보호받고 있을 때는 돈에 대한 걱정, 미래에 대한 불안이 크지 않았다. 온실 속 화초와 같았던 것도 사실이다. 엄청 잘 사는 것도 아니었지만 친구들이 교육비, 대학 등록금으로 고민할 때 나는 내가 뭐에 관심이 있는지에 고민을 했다. 배우고 싶은 건 배우고 사고 싶은 건 살 수 있었다. 부모님의 직업 특성상 여행을 자주 다닐 수 있었고 덕분에 비교적 다양한 나라, 다양한 곳을 다니며 세상을 볼 수 있었다. 돈이 부족하거나 가정환경이 어려운 친구들은 꼭 도와줘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고 수학여행을 갈 때는 혹시 용돈이 부족한 친구들은 네가 사주라고 용돈을 조금 더 챙겨주시고는 했다. 다시 말하지만 그렇다고 엄청 잘 사는 건 아니었다. 부모로서 내게 최대한 지원을 해주셨다.
그렇게 안락하게만 삶을 살았던 화초는 갑자기 천장이 뜯겨나가고 몰아치는 겨울바람을 겪어본 일이 없었다. 상황이 변하자 잎이 쪼그라들고 줄기가 말라서 박제된 장식꽃이 되어버렸다.
이혼하실 당시 나는 고3이었다. 세상에서 살면서 가장 튼튼할 것 같았던 울타리가 붕괴되는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하게 된 뒤로는 안 그래도 내향적이던 성격이 더 내향적이 되었다. '이건 현실이 아니야'라는 부정의 단계가 시작되었다.
감정을 느끼는 건 크게 5단계로 구분된다고 한다. 그 단계에 각각 내게 해주고 싶은 말들은 아래와 같다.
(단, 이 감정들은 순서대로 오지 않고 왔다 갔다 할 수 있으며 사람마다 감정을 느끼는 정도가 달라서 모두 5단계를 동일하게 겪지 않을 수 있다.)
아직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다. 혼란이 시작되고 기존의 유지되고 있던 가정이라는 형태가 모양을 달리하는 시점. 작은 자극조차 전부 크게 다가온다. 내가 열심히 하면 혹시나 이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라는 일말의 기대가 있다.
* 내게 해주고 싶은 말 : 지금 이런 상황이 혼란스러울 거라는 거 이해해.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걸려도 괜찮아.
이혼을 하는 상황은 엄마 아빠의 문제일 뿐, 그들이 널 사랑한다는 사실은 변함없어.
*하면 안 되는 말: 이젠 다 끝났어, 이미 끝난 일이야, 너도 다 컸잖아. 이제 현실을 직시해.
부모와 자녀가 이혼이라는 주제를 받아들이는 눈높이는 다르다. 부모 인생의 반절도 채 살아보지 못한 자녀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해 줄 것. 아무리 다 큰 자녀라도 그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부모님의 이혼은 인생에 산사태가 난 것이다. 최대한 감정을 안정화해야 한다. 솔직하지만 불필요한(부부끼리만 공유해야 할 정보) 내용은 자녀에게 언급하지 않는다. 부모가 상담이 필요하다면 자녀에게 말하는 게 아닌 전문 상담사를 찾아야 한다.
억울함과 고통이 한 곳으로 뭉쳐서 표출되는 단계다. 돌멩이가 굴러가도 화가 난다. 그냥 세상이 다 꺼졌으면 좋겠다. 혼자 있는 공간으로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든다.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들고 내가 세상에서 제일 초라해진다. ( 이때 내 방 곳곳에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토하듯이 그렸다고 봐야 맞다. 정말 미쳐있었다. 부모님은 네 방이니 열심히 그리라며 놔두셨다. )
* 내게 해주고 싶은 말 : 그럴만해, 화날 수 있어. 지금 화가 나는 건 이상한 게 아니야.
*하면 안 되는 말: 너 만화 나니? 화를 내면 뭐가 달라지니?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분노의 감정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어떻게 화를 표출해야 하는지를 잘 알려줘야 한다. 폭언/ 폭행 등등 다시 시간을 되돌리고 싶을 행동은 절대 하지 않는 게 원칙이다. 자녀는 모든 장면을 눈으로 녹화하고 있다. 큰 사건이 일어났던 장면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살아가면서 주기적으로 플레이가 될 것이다.
상황을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상황을 대처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단계다. 어머니는 절실한 기독교인이셨지만 이때부터는 종교를 가리지 않고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서 공부하셨고 심리상담센터를 다니셨다. 물론 그 상황에서 아무 일 없던 듯이 일상을 살았던 게 아니다. 정말 너무 힘들어하셨지만 최선을 다해서 그 상황을 견디려는 모습을 보고 내 삶에 고통이 찾아왔을 때 적용해 볼 수 있었다.
만약에 내가 그랬다면 -> 그러지 말걸 -> 그땐 그렇게 했었어야 했어.....(무한반복) 자녀로서 뭔가 할 수 있었을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계속 반복하는 단계다. 부모의 이혼에 자신의 역할을 집어넣고 책임을 지려한다.
* 내게 해주고 싶은 말 : 뭔가 후회가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야. 너무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마. 그만큼 네가 간절하다는 마음일 거야. 다만 그 결정에 절대 너의 책임은 없어.
*하면 안 되는 말: 네가 그때 그랬어야지. 이미 지나갔잖아. 그런다고 뭐가 달라져.
이혼의 원인을 정확히 모르는 상태이니 자신이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다가 스스로를 계속 자책하고 원망한다. '내 책임이야', '내가 부족했어.'라고 생각하면서 그 상황의 이유를 본인에게서 찾게 된다.
부모의 이혼에 대한 원인, 결과가 내게 없다는 걸 계속 반복적으로 인지해야 한다. 그리고 계속 감정을 내뱉는 연습이 필요하다. 굳이 말이 아니어도 그림, 운동, 글쓰기 등등 뭐라도 좋다.
현실을 인식하고 깊은 슬픔에 잠기는 단계. 공허함, 상실감, 허무함이 생긴다.
* 내게 해주고 싶은 말 : 혼자 버티지 말고 고민이 있으면 언제든지 이야기해 줘. 네 곁에 언제나 내가 있을게.
*하면 안 되는 말: 다 그렇게 살아. 너만 힘든 거 아니야. 너보다 더 힘든 사람을 생각해.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혼자가 아닌 함께라는 걸 계속 알려줘야 한다. 우울의 시간은 끝이 안 보이는 터널과도 같다. 이혼하시는 시기와 겹쳐서 건강도 박살이 나면서 밥을 먹거나 씻을 의지도 없었다. 새벽 동이 트면 잠을 잤고, 주변사람들 모두가 언젠가 등을 돌릴 배신자처럼 느껴졌다. 혼자 지하까지 땅굴을 파고 들어갔었다.
다행인 건 관심이 있었던 미술을 통해서 우울감을 해소시켰는데 공모전을 나가거나, 대회를 나가는걸 계속 반복했다. 주제가 뭐였던지 그냥 내 마음이 가는 대로 그렸다. 지금 생각하면 꽤 잔인한 그림을 그렸는데 해외에서 주최했던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대학교 입시를 준비할 때도 잔뜩 우울한 그림들을 그렸는데 그게 오히려 나만의 독특한 색깔이 되어서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게 되었다. 만약 그림이라는 돌파구가 없었다면 견디지 못했을 것 같다. 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 활동을 통해서 내 감정이 인정받는 느낌이 들었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앞을 바라보는 단계.
* 내게 해주고 싶은 말 : 네 방식대로 살아. 인생의 주인공은 너야. 외부적인 상황은 변화했지만 너 자신과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대로야.
*하면 안 되는 말: 이제 괜찮지? 시간도 지났는데 그만 생각할 때도 됐잖아.
존중. 지지가 있어야 한다. 부/모와의 관계를 재정리해야 한다. 어떤 사유로 이혼을 했던지 부모끼리 서로를 비난하는 말은 자녀에게 일절 하지 말아야 한다. 자녀는 친구도 아니고 상담사도 아니다. 부부의 이야기는 그들선에서 해결해야 한다. 부모의 험담은 곧 자녀를 험담하는 것과 동일하다. "네 엄마가.." "네 아빠는..." 그런 이야기를 듣는 순간, 뿌리(근본)에 대해서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는다. 자녀를 본인의 비밀노트, 대나무숲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상담이 필요하면 정식적으로 교육받은 심리상담사를 찾아가야 한다.
부모로서 자녀에게 해결책을 제시해주고 싶을 수 있지만 이때는 그냥 옆에 있어주고, 자녀의 감정을 들어주며 공감해 주는 게 큰 위로인 시기다. 상담이 필요하다면 전문 기관의 도움도 반드시 받아야 한다.
자녀가 본인들을 항상 보고, 배우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서로 험담하는 행동, 결혼을 후회하는 말등을 하지 말길 바란다.
자녀는 부모가 서로의 의지로 만든 축복과 같은 존재이고, 그 우주 같은 존재가 실물이 되어서 세상에 태어났다. 부모의 소유물도, 친구도 아닌 그냥 잠시 거쳐가는 생명인 것이다.
머무는 기간 동안 최대한 양질의, 균일한, 안정적인 지원과 사랑을 줘야 한다.
그래도 나는 부모님께 좋은 지원들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각자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면서 만남을 가지고 있다.
뭐든 쉬운 일이 없다. 바꿀 수 없는 상황을 원망하는 것보단, 그 상황에서 나를 어떻게 바꿀 것인지를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