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올의 흰머리도 소중하단 말이죠
오랜만에 미용실을 갔다
그렇게 낯가리는 성격은 아니라
선생님이랑 친해져서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가 선생님이 머리를 다듬으면서
내 머리 옆쪽에 있는 몇 가닥의 흰머리를 보고
“염색같이 하시면 좋은데요~”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정말 진지하게
“ 지금 흰머리 기르는 중입니다”
라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선생님의 안 그래도 큰 눈동자가 왕방울만 해지면서
나를 외계생명체 보듯이 쳐다보셨다
‘당신은 그런 걸 왜 기르고 앉아있는 거냐’라는 말을
입이 아닌 눈빛으로 충분히 할 수도 있다는 걸 느꼈다
진짜 기르는 건데
진심으로 한말인데
너무 놀라셔서 내가 다 놀랐다
나는 백발노인이 되는 게 꿈이다
물론 중간중간 유혹들이 있겠지만
아주 특별한 이슈가 없는 이상
나의 백발에 대한 로망은 변함없을 예정이다
관리하지 않고 나에게 투자를 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연스럽게 될 일을 굳이 힘써가면서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그 시간에 더 재미있고 가치 있는 것에 집중하고 싶다
내가 봐왔던 정말 멋있는 어른들
그런 분들처럼 나도 내 늙어가는 모습을 인정하고
당연하게 여기면서 자연스럽게 늙고 싶다
이래놓고 내일모레 갑자기 염색하러 갈지도 모를 일이지만
백발이 섹시한 건 정말 불변의 법칙이다
그 세월에 걸맞은 행동, 매너, 지식을 가졌을 거라는 믿음이 기본값이기 때문에 그렇다
(미용실 선생님에게 충격을 준) 나의 백발사랑의 근원을 생각해 보면
우리 할머니로부터 시작된 것 같다
할머니는 내 인생 최고라고 인정하는. 백발을 할 자격이 있는 분이다
뇌출혈로 쓰러지셨다가 기적적으로 일어나셨을 때도
할머니는 몇 시간이고 본인이 할 수 있는 운동을 하시고,
눈앞에 있는 건 모조리 소리 내어 읽으면서 스스로의 정신을 지키셨다
90살이 넘은 나이에도 아이같이 웃으시는 소녀 같은 할머니
긴 과거의 이야기들로 할 말이 너무 많으실 텐데
그저 묵묵하게 삶을 지키며 살아가시는 분
역시 인생에는 롤모델이 있어야 하나보다
내 백발 로망의 씨앗은 아무래도 우리 할머니가 심어주신 것 같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다
그것의 뚜렷한 증거물이 흰머리라서 좋다
간혹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을 지칭하는 신조어들이 생겨났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멋지고, 존경받을만한 진짜 어른들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젊은 세대들이 나이 드는 것에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까
힘든 삶이고, 반복되는 삶이다
재미가 그렇게 있는지도 모르겠다
눈 깜짝하면 나이 든다고 하지만
현생은 하루하루 버티는 존버의 삶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모두 다 각자
짧고도 긴 지구여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백발 혹은, 취향에 따라 흑채를 뿌리더라도
지긋한 나이가 될 때까지 잘 살아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