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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ppy May 26. 2023

따뜻하고 요상한 [Big Fish]

팀 버튼 감독 작


내가 가장 따뜻하면서도 요상하다고 느끼는 영화, Big Fish를 오랜만에 소개하고자 한다.

(줄거리)

사랑하는 아내와 곧 태어날 아기 사이에서 가정을 꾸린 윌.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급히 고향으로 내려간다. 

윌은 언제나 거짓말 같은 허풍만 늘어놓는 아버지가 달갑지 않다. 자신이 태어났을 때 강에서 엄청나게 큰 물고기과의 사투를 벌였다는 이야기, 엄청나게 큰 거인과의 우정 이야기, 현재 윌의 엄마를 만나기 위해 서커스에서 일했던 일 모두가 허무맹랭한 거짓말 투성이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했던 얘기에 진실이 한 스푼이라도 들어가 있는 걸까? 윌은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과거를 다시 한 번 따라가 본다.


어째서인지 잊을 수 없는 이 영화는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을 펼치고 있다. 


1. 겉만 아니라 속도 따뜻할 수 있었던 팀 버튼

내가 생각했던 팀 버튼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나는 팀 버튼에 대한 편견 아닌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기괴한 그림체를 사랑해 디즈니를 견딜 수 없었다는 팀 버튼의 이야기만 듣고, 이 사진과 같은 영화만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유령 신부 같은 작품을 보면서 겉은 특이해도 속은 따뜻한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는데, 팀 버튼은 겉도 속도 모두 따뜻할 줄 아는 감독이었음을 이 영화에서 느꼈다.

 이 영화의 분위기는 대체로 환하고 찬란하다. 오늘처럼 날씨 좋은 날 공원에서 산책한다면 이런 분위기일 것만 같다. 특히 윌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구애하는 장면은 지금 봐도 '햇살 같은 로맨틱함'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듯 하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지다 슬퍼지고 싶을 떄에는 이 영화를 보는 걸 추천한다. 이렇게 따뜻한 색감에서 진한 감동을 뽑아낼 수 있는 영화니까...



2. 허풍쟁이가 되는 사랑

윌의 부모님

 윌은 늘 허풍쟁이 같은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는다. 어차피 모두가 진실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저런 이야기를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들은 이런 아버지의 모습이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자신이 아버지가 되는 순간 윌은 다시 한 번 깨닫는 것 같다. 왜 자신의 아버지가 허풍쟁이가 되었는지 말이다. 

  윌이 태어나던 날 밤, 아버지인 에드워드는 빅 피쉬와의 사투를 벌이느라 그의 출산 장면에 함께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 에드워드는 그 날 출장 때문에 오지 못했다.

"재미없지? 물고기와 반지 같은 걸로 꾸며진 얘기와 그냥 진실 중 하나를 고르라면 나라도 더 환상적인 쪽을 택했을 거야" 라고 말하는 아버지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윌은 비로소 무언가를 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이 부자를 보면서 참 안타까웠다. 서로의 주파수가 맞지 않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해 동화를 만들어 냈지만,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보다 직접적이고 사실적으로 아버지를 대하고 싶은 아들은 아버지에게 답답하다는 시선을 보낼 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관계도 이와 같지 않을까?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은 같지만, 이를 표현하는 주파수가 달라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슬픈 상황. 이후 여러 경험을 통해 내 주파수의 범위가 더 늘어나고 나서야 비로소, 이제는 끊겨 버린 주파수를 해독할 수있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 때 나에게 전해 주려 했던 그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의 감정은 정말 슬플 것만 같다.

 비록 영화 대부분의 시간에서 이들의 주파수는 잘 맞지 않았으나,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기꺼이 허풍쟁이가 된다. 이걸 보면서 부모 뿐 아니라 어떤 사랑들은 사람을 허풍쟁이로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허풍쟁이가 되는 아버지의 모습은 생각보다 더 로맨틱하다.

 아픈데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멀쩡한 척 하는 사람처럼, 힘들지만 힘들지 않다고 말하는 허풍처럼 말이다!



3. 이 이야기들이 아버지의 인생이 되었어요

마지막 장면

아들은 끊임없이 아버지의 일생을 의심한다. 하지만 마지막이 되어서야 아버지의 뜻을 이해한다.

 (스포 포함)

 어렸을 적 아버지 에드워드는 마녀의 눈을 통해 자신이 죽는 순간을 똑똑히 보았다고 전한다. 하지만 다른 이야기들은 모두 들려 주셨던 평소의 아버지와는 달리 자신의 마지막이 어땠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삭막해 보이는 병실, 에드워드는 아들 윌에게 자신이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지 이야기해 달라고 한다.

 아버지의 허풍이 사랑이었음을 알게 된 윌은, 아버지를 위한 마지막 허풍쟁이가 된다. 이들은 답답한 병실을 탈출해 윌이 태어났을 때, 에드워드가 ’빅 피쉬‘와 사투를 벌였던 강으로 향한다. 병든 노인이 아닌 행복한 남자 에드워드는 강가에서 자신의 오랜 친구들을 마주한다. 거인, 서커스단의 사람들, 마을의 사람들… 모두에게 정겹게 인사를 나누며 강으로 들어간다. 일생을 바쳐 사랑한 자신의 아내 산드라외 작별의 인사를 나누며 이제 에드워드는 자신이 빅 피쉬가 된다.

 '맞아 아들아, 그게 바로 내 마지막이었어' 흡족하게 웃는 에드워드를 윌은 그렇게 보내준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존재한다! 실제 에드워드의 장례식 날, 윌은 에드워드가 말했던 허풍 속 친구들을 마주한다. 결국 이 모든 이야기들은 에드워드의 길이 된 것이다. 

   사실 이 장면을 난 아직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원래 난 영화와 책 모두 내 스타일로 후다닥 감상해 버리는 편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받아들인 의미가 다를 때도 많다.

혹시 누군가 이 장면에 대한 생각이나 해석이 있다면 의견을 제시해 주면 정말 좋을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이 장면이 참 좋았다. 아들은 믿어주지 않았지만 꿋꿋이 지켜 온 에드워드의 이야기는 결국 그의 인생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극중에서 가장 윌에게 참 많은 동질감을 느꼈다. 영화였고, 아름다운 색감을 자랑했으니 망정이지 만약에 내가 윌이었다면 나라도 때로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 같다.

게다가 사실을 추구하는 기자로서 일하고 일는 윌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런 윌이 마지막에 아버지의 마지막을 이야기하는 장면은, 비로소 그들의 주파수가 맞았음을 보여 주는 동시에 이제 윌도 곧 빅 피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윌이 태어날 때 에드워드는 빅   피쉬와 사투를 벌였고, 일평생 이야기를 그의 삶으로 만들온 끝에 빅 피쉬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윌은 곧 태어날 아이의 아빠가 된다. 마냥 사실적이었던 윌이, 아버지를 보내주며 이제는 빅 피쉬가 될 준비를 마쳤음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이 영화는 따뜻하면서도 요상하다. 내용 자체가 요상하기는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는 색감이나 내용 모두 너무나도 따뜻하다. 화창한 낮이나 칠흑같은 밤 그 어디쯤 팀 버튼의 방식대로 풀어낸 이 이야기는 나에게 오랫동안 '빅 피쉬'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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