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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ppy Jul 23. 2023

상대평가와 절대평가

스무 살의 사담

  여름방학을 맞아 사람들이 방학을 보내는 방식은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해외/국내 여행을 다니며 학기 중에는 쉽게 할 수 없었던 다양한 활동들을 하기도 하고, 자기계발의 시간을 가지기도 한다. 본가가 지방에 있는 경우에는, 오랜만에 본가에 내려가 힐링을 하고, 아니면 방학만큼은 그냥 푹 쉴 수도 있다. 혹자는 계절학기를 듣기도 한다 (꺄울)

  각자가 주어진 시간을 굉장히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니 정말 다양한 모습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가까운 사람들의 이야기는 직접 전해 들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근황은 인스타그램으로 알게 된다. 어디를 갔고, 누구를 만났고...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근황을 정말 손쉽게 볼 수 있다.

  그렇게 인스타그램을 하다 보니... 이제는 인스타그램에 들어가기 싫으면서도 들어가게 되는 단계에 도래해 버리고 말았다. 많은 곳을 여행하고, 돌아다니고, 여름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상대적 박탈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만 별 계획 없이 여름방학을 맞이한 건가? 별 생각이 없었는데,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해외여행을 가는 것 같으니 나도 가야 할 것만 같았다. 이런 기분에 휩싸이다 보니 어느 순간 고등학교 때의 상대평가와 절대평가가 문득 떠올라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 우리의 촉각을 곤두세우게 했던 수많은 평가들을 거쳐야 했다. 고등학교 때의 평가 방식은 주로 상대평가였고, 가끔 절대평가였다. 상대평가는 말 그대로 1등급부터 9등급까지 세밀하게 나누는 방식이며, 절대평가는 A/B/C로 나누어 일정 점수 이상을 받으면 등급에 관계없이 성적을 받는 형식이었다. 필자가 다닌 고등학교의 특성상, 수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거의 대부분이었기에 때문에 상대평가는 정말 치열하게 임해야만 했다. 다들 정말 치열하게 공부했기 때문에, 100점을 받았는데도 만점자가 20명이 넘어서 1등급은 없었던 (물론 기말고사 난이도 조절로 최종적으로 이런 일은 없었다) 에피소드도 있었다. 내가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친구들이 얼마나 잘하느냐도 중요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절대평가에 임하는 태도는 그래도 여유로웠다. 물론 절대평가라 하더라도 너무 어려운 과목이라 눈물 참아가며 해야 했던 것도 있지만, 그래도 친구들과 함께 공생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게 절대 평가의 큰 장점이었다. 이런 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가 고등학교 시절 제일 좋아했던 과목은 절대 평가 과목이었다.

  그 때 한 절대평가 과목을 공부하기 위해 친구들과 4명이서 스터디를 꾸려 공부하기도 했다. 개념을 복습한 다음에 예제를 풀어 와서 답을 맞춰 보고 (답지가 없었다) 풀이 과정을 공유하는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했다. 타임랩스를 찍어 둔 영상이 있는데, 아이들이 모두 재미있게 공부하는 게 느껴져서 행복했다.

  어쨌든 고등학교 때까지의 나는 상대평가나 절대평가에 익숙해져 있었다. 같은 과목 공부를 하는 친구들끼리 평가받는 것에 익숙하고, 가시화된 성적으로 나오는 것이 당연했던 것이다. 이런 내 '평가'의 방식은 대학교에 오면서, 특히 이번 방학을 지나며 조금씩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같은 과목을 공부하지 않는다 (같은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이 이번 방학을 보내며 지금까지 나를 힘들게 했던 부분이다. 과거에는 모두 같은 과목을 듣고 있었기에, 문제를 하나 맞추고 틀리는 것에서 평가할 수 있었다. 이번 시험은 누가 누구보다 잘 봤다... 와 같은 것들을 정량적으로 따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학교 생활을 하면서 전혀 그렇지 않았다. 우선 학기 중에는 듣는 과목부터가 달랐다. 같은 학과 동기여도 각자의 관심사에 따라 전혀 다른 과목을 들었다. 필자는 사회과학대학 소속이지만, 그와 관계없이 동기들 중 누군가는 물리천문학부 과목을 듣기도, 언어학과의 과목ㅇ르 듣기도 하면서 학점으로만 모든 걸 비교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이건 방학이 되면서 더 심해졌다. 나는 계절학기를 듣기 때문에, 7월까지는 오랜 시간 동안 여행을 가거나 무언가를 하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그런데 내 주변의 사람들은 유럽 등 먼 곳으로 여행을 다니는 사진들을 인스타그램에 찍어 올렸다.

  그래서 나는 괜스레, 내가 방학을 제대로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학을 맞이해 놀러 가야만 할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나는 다른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자꾸 고등학교 시절의 상대 평가를 하려고 들었다.

  그러다 조금 더 생각을 해 보았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상대평가의 개념은 통하지 않는다. 이제는 나 자신의 절대적인 점수에 신경을 써야 하는 절대평가의 시대가 도래하지 않을까?

  이 때 말하는 절대평가의 개념이란, 나의 생활을 다른 이의 생활과 비교하며 평가하는 것이 아닌, 내가 목표하고자 했던 나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평가라는 어감이 좀 그렇기는 하지만... 그냥 대충 이런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편할 것 같다.

  같은 대학이라도 전공이 다르고, 같은 전공이어도 생활과 목표는 전부 다르다. 실제로 내 주변의 경우만 보아도, 같은 학과를 나와도 몇십 년 후의 삶의 모습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아간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평가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방학을 보내도 1달 넘게 여행을 다녀 온 사람이 더 잘 보냈는지, 아니면 계절학기를 들은 사람이 잘 보냈는지, 자기계발을 한 사람이 더 잘 보냈는지 확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절대평가의 개념이 대두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학기/방학이 나 스스로 만족할 만한 학기였는지, 그 과정에서 특별한 아쉬움이나 배운 점은 없었는지 되돌아보고 성장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다. 이제는 아무도 나의 생활과 노력을 동일한 기준에서 정량적으로 평가(?) 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새삼 상대평가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음을 느꼈다. 누구는 어떤 직업을 가졌고, 어디에 살며, 누구와 결혼했고, 집은 어떻고...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런 비교가 심하다. 그 사람의 과목과 나의 과목이 같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끼워맞추며 상대평가를 하다 보면 행복할 수 있을까?

  상대평가에서는 어디에나 나보다 높은 점수를 받는 사람이 있고, 낮은 점수를 받는 사람도 있다. 인생을 상대평가로 살아간다면 어떨까. 높은 점수의 사람을 보며 부러워하기에는 나의 인생도 충분히 빛나고, 낮은 점수의 사람을 보며 안도감을 느끼거나 깔보기에는 그 사람의 인생도 나름의 길대로 빛나고 있다.

  절대평가로 살아간다면 어떨까? 우선 공생이 가능해진다. 내가 너보다 잘 살아 보여야 등수가 올라가고 등급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얻어갈 수 있는 느낌이 크기 때문에 (물론 여기서도 모두 A가 나오면 의미가 없는 것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나는 꼭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질투하거나 잘나야 한다는 강박 없이 그 사람의 장점을 인정하고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다.

  그리고 나의 삶에 충실해질 수 있다. 모두가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의 길이 열등한지에 대한 고민에 덜 사로잡힐 것이다. 나와 타인을 인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공생의 삶을 통해 더 행복해질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아예 주변 시선을 신경쓰지 않은 채로 살아가라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배려하지만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 되면 더욱 좋겠다는 뜻이다.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창구가 늘어나는 만큼, 절대평가로 나의 '중용'을 지키기란 물론 쉽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고민도 해 보고, 시행착오를 겪다 보면 시간이 흘렀을 때 그래도 조금은 '나의 삶'을 충실히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깊어지는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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