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바웃 시리즈
우리는 늘 현실을 살아가고 현실적인 결정을 내리려 노력하지만, 때로는 지나치게 현실에만 매몰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나의 바람대로만 이루어지는 '가능세계'를 상상하면서 사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렇게 현실에 대한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현실 자체에 대한 의문이 뭉게뭉게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우리가 바라보는 현실은 진짜 현실인가? 우리가 현실적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정말로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것에 대한 첫 번째 문제는 미래를 위한 현재의 저축과 투자라는 개념에서였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저축이 미덕'이라는 소리를 흔히 듣고 자란 사람이다. 초등학교 때인가, 용돈기입장을 적어 오라는 숙제를 내 주었던 것 같다. 항상 절약하는 것을 생활화하고 저축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많이 접했기 때문에 나에게 저축은 미래를 위한 현실적인 최적의 투자인 셈이었다. 그렇게 나는 지금도 가계부를 쓰고 소득을 기록하며, 괜한 지출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다 (그러나 가끔 보복심리에 기인한 엉뚱한 소비가 튀어나오곤 한다..대략 1달에 한번... 이건 절약의 삶이 아닌 것이긴 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소한 소비에서는 내가 돈을 얼마나 쓸 수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도움이 된다고는 하지만, 이 수치에만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대표적인 것이 '자기계발을 위한 투자'이다. 사실 현실적으로 저축이 늘면 늘수록, 소비가 줄면 줄수록 당장 지표 상에는 이득이 되는 것은 맞다. 그런데 그게 과연 장기적인 관점에서도 현실적인 이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금 당장 밥을 부실하게 먹으면 식비를 줄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러다가 부실한 영양 공급으로 몸이 아프게 되면, 아끼려고 했던 식비의 곱절은 더 병원비로 지출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현실적인 투자라고 하기 어렵다.
지금 당장 공부를 하지 않으면 교재비를 줄일 수 있다. 그러나 미래의 내가 가질 경쟁력을 위해서는 자격증을 하나 더 따고, 무언가 '스펙'을 하나 더 만들어 두는 것이 이롭다. 운동을 가는 것도, 피부 관리 아닌 관리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보면 '현실적인 현실 대비'는 단순히 선형적인 수치만으로 나타내기는 참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매일 지친 나를 위한 심신의 보상으로 과도한 소비를 한다는 건 절대 내가 생각하는 '미래를 위한 투자'는 아니지만... 어디까지가 올바른 저축이고 어디서부터가 미래를 위한 현실의 타협이 필요한 지점일지 고민해보게 된다.
중용으로 넘어가기 전, 저축과 투자라는 카테고리에서 생각나는 또 한 가지 문제도 존재한다. 나는 돈이 생기면 무조건 통장에 넣어두는 편이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냥 제일 쉽고 안전하기 때문이다. 그게 가장 바람직한 저축 중 하나고, 동시에 이자를 얻을 수 있으니 나름의 투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많이들 투자를 한다. 코인을 사기도 하고, 주식을 사고팔기도 하고, 어느 정도 자본이 모인 사람들은 부동산을 가지고 소위 말하는 갭투자를 하기도 한다. 이 외에도 내가 말하지 않은, 혹은 잘 알지 못하는 수많은 투자의 방법이 존재할 것이다. 지금 나는 학교에서 '주식심리학'이라는 과목을 듣고 있기는 하지만 솔직히 아직까지 주식의 '주'자도 모르겠다. 보장된 안전함을 좋아하고, 스릴에 대해서는 스트레스로 반응하는 사람으로서 용기가 잘 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단순히 통장에 넣어두는 돈의 이자만으로는 충분한 수익을 올리기 불가능한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에 아주 적은 금액이어도 투자를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니까 과거보다 '현실적인 대비'를 위한 투자는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더 복잡해진 셈이다.
이렇게 보면 과거에 내가 생각했던 '현실적인 대비'는 단순한 수치도 아니고, 아주 복잡한 데다가, 더 많은 것들을 요구하고 있다. 요즈음 이런 문제 때문에 정말로 많은 생각을 하고 머리를 쥐어싸맬 때도 있는데, 결국 그럴 때마다 돌아가는 것은 중용의 원리이다.
중용의 사전적 정의부터 살펴보자. 중용이란 '치우침이나 과부족 없이 떳떳하며 알맞은 상태나 정도'를 뜻한다. 요즘 말로 하면 '알잘딱깔센'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있게) 정도가 될 것 같다. 너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삶, 이것이 우리 모두가 원하는 삶이고 현실적으로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살면서 가장 많이, 자주 맞닥뜨리게 되는 문제는 돈의 중용일 듯하다. 어쩌다 보니 계속 글에서 돈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만큼 사람들 모두에게 넓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문제이니만큼 그런 것 같다. 아무튼!
지금 나는 따로 알바를 하지 않는다. 나름 알바의 일환으로 사촌동생을 1주일에 한 번씩 과외해 주고는 있지만, 사실 이건 진정한 의미에서의 알바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돈을 쓰라면 얼마든지 쓸 수 있다. 하지만 내 용돈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무언가를 끊임없이 소비하고 만족하기 위해서는 알바를 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작년에는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한 알바 앱을 깔아서 계속 들어가 보기도 하고, 가끔 이력서를 넣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알바를 따로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더 이상은 무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시간이야 낼 수는 있지만, 그렇게 되면 지금 내가 소화하고 있는 일정들의 퀄리티가 낮아질 수도 있고, 아무런 여유도 없이 일을 하면 나중에 더 큰 적자 (ex. 몸의 아픔, 몸의 아픔...) 가 날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을 잔뜩 사고 소위 말하는 플렉스를 하는 정도는 아니어도, 나름 잘 먹고 주변 사람들 생일도 챙기면서 크게 부족하지는 않은 지금의 자본 상태에서 나만의 중용을 실천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이 중용도 말이 중용이지 사실 간단한 것이 제일 어렵다는 것을 또 한 번 느낀 순간이 있었다. 바로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에 대한 각자의 기준이다. 0에서 100까지 있다면, 어떤 사람은 20이하, 80이상은 중용이 아니라고 느낄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40이하 60이상이 중용이 아니라고 느낄 수 있다.
나는 이게 중용의 상태라고 생각하는데 왜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중용의 기준은 사실 뜯어보면 사람마다 너무나도 달라 가끔은 경악하기도 놀라기도 한다. 최근의 나는 내 중용의 기준에 대해 다시 한 번 곱씹어보게 되었다. 나는 0에서 100까지 중, 49에서 51만 중용이라고 생각하는 중용의 폭이 좁은 사람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 중용의 폭을 무조건적으로 늘리는 것이 좋은 일일까? 그래도 지금 나의 중용의 가치는 너무 옹졸하지는 않은가... 내가 생각하는 하한선이 어쩌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로만 들리지는 않았을까
나는 이 일을 시작할 때 적어도 이 정도는 있었으면 좋겠어, 라고 말하는 것들이 '게으른 완벽주의'와 같이 어쩌면 완벽하지 못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중용의 역설에 침체되어 있었던 것은 아닌가?
복잡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도대체 어떤 것이 중용이고 어떤 것이 바람직한 범위의 중용이라고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어떤 글이 떠올랐다. 내가 좋아하는 김무열 배우가 지금의 아내인 윤승아 배우와 연애 시절, 실수로 취중 메세지를 공개로 돌려버려 열애를 반강제로 인정하게 된 귀여운 사건이다. 이 때의 글이 지금 나에게도 참 인상깊게 남아있는데...
전혀 뜬금없어 보이는 맥락일 수도 있지만 어쩐지 중용을 생각할 때 나에게는 이 메세지가 떠오른다. 생각이 많아지면 괜히 어렵게 말만 늘어놓게 되지만 결국 간결한 한 마디면 될 것을...
어쩌면 지금 나는 중용에 도달하고자 뱅뱅 돌며 그 한 마디를 찾아내지 못해 괜히 말만 늘어놓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세상에서 가장 값나가는 보석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세상을 돌아다녔지만, 정작 보석은 본인이 목동이던 시절 양들을 재우던 허름한 교회에 있었던 '연금술사'의 이야기처럼 세상사에 대한 집착뿐만 아니라 중용에 대한 집착도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곳에서 중용을 찾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여러분의 중용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중용은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