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oppy Jun 03. 2024

어바웃 배설과 종착역

어바웃 시리즈

안에서 밖으로 새어나가는 순간부터는 더 이상 ’나 혼자만의 생각’이라고 옹호받을 수 없게 된다. 배설의 정의인 이것은, 말 그대로 배설의 책임성을 강조하고 있는 듯하다.

‘배설’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흔히 화장실과 관련 있는 단어라고 생각하지만 (…) 사실 ‘배설’이라는 단어의 뜻은 ‘안에서 밖으로 새어 나가게 함’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가끔 ‘생각을 배설하다’ 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유독 이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볼 일이 많아졌던 것 같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출하는데, 이 정도가 유독 ‘배설’이라고 느껴진 일이 많기 때문이다.

내게 배설은 그다지 긍정적인 단어는 아니다. 당장 정의에 있는 ‘새어 나가다’ 만 보아도 그렇다. 우리는 흔히 ‘비밀이 새어 나가다’의 뜻으로 꽤 많이 사용하는데, 이 경우에도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차라리 ’표출‘이나 ’배출‘이었으면 모르지 배설은 어딘가 감추어야 할 것을 차마 감추지 않고, 혹은 감추지 못하고 내보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배설은 무엇인가?

생각의 배설




우리는 가끔 유명인들의 실언을 보곤 한다. 꽤 임팩트가 세다면 ’000 어록‘이라는 하나의 밈으로 승화되어 그 사람의 실언을 비꼬기도 하며 나중에 그 연예인과 관련된 기사가 나왔을 때에도 댓글에는 실언한 내용이 달린다.

비단 연예인의 일 뿐만은 아니다. 평소에는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실망하고, 전만큼 그 사람에 대해 신뢰가 가지 않는 경우가 생긴다. 이렇듯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생각을 도가 지나치게 ‘배설하는’ 경우가 생긴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배설하는 생각을 들었을 때에는 내가 다 마음이 좋지 않다. 나는 분명 저 사람을 멋있다고 생각했고, 속속들이 알지는 못하지만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을 동경했는데 배설한 생각은 내 상도를 벗어나 있을 때, 예전만큼 멋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안타까움과 실망감이 몰려온다.




그렇다고 생각을 말하면 안 되는가? 과연 침묵은 금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완전히 동의하기도 쉽지 않다. 어렵고 민감한 문제에 입을 닫으면 아무런 위험도 없지만, 말 그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다만 그 용기가 상도에 벗어나거나 왜곡된 편향으로 나아가면 그건 그 순간 배설이 된다는 것이다.

감정의 배설

가장 말하고 싶은 부분은 감정의 배설이었다.

요즈음의 사람들 중에는 화가 많이 내재되어 있는 사람들이 적잖이 많은 것 같다. 어떤 유명인의 논란이 터지면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온통 몰려와 비판부터 비난 그리고 원색적인 조롱과 혐오를 서슴지 않는다. ‘이 사람이 댓글창을 보면 살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보는 내 가슴이 쿵쾅거릴 정도의 수위이다.

사실 사람들은 ‘그 사람’에게 화가 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배설할 창구가 필요했던 건 아닐까?




그러면서도 문득문득 무서워지는 순간이 있다. 나는 원색적인 비난을 하면 안 된다고 다짐을 해도, 유튜브와 각종 인터넷에는 한 종류의 정보만 흘러넘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공공의 적을 만들어 ‘합당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사실 사람들에게 상당한 쾌감을 가져다 준다. 요즈음 말하는 도파민인 셈이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그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뉴스만 보고, 부정적인 쪽으로 생각하게 되는 모습을 스스로 발견했다. 그 사람을 정말로 부정적으로 생각해서였을까, 아니면 그 가십과 비방이 왜인지 모를 쾌감을 가져다 주어서였을까? 지금은 그 사건에 대해 말 그대로 중립적인 시각을 견지하려고 조금 더 노력하고는 있지만, 한순간 그렇게 생각하는 내 모습을 마주했을 때는 정말로 부끄러웠다.

심리학에서는 사람들의 이러한 양태를 에코 체임버 (echo chamber) 효과라고 명명한다. A vs B 중 A의 입장에 서게 되는 순간부터는 A를 지지하는 증거만 선택적으로 더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결국 답이 A 와 B 중 무엇인지를 알고자 A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A를 지지하기 위한 A를 찾는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왜곡하는 이러한 행위는 그 결과에도 본인에도 결코 이롭다고 할 수 없는 행위이다. 특히 사회 전반적인 논란이 발생했을 때 이런 일이 많이 발생하는 것 같다. 어제까지만 해도 A의 입장에 서서 B를 비판/비난하던 사람들이 어떤 일을 계기고 B의 편에 서서 A를 비판/비난하고 ‘이럴 줄 알았다’며 이전에는 취급하지 않았던 증거들을 창고에서 꺼내 오곤 한다.

그렇다고 이 사람들을 무작정 비판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회의감이 든다. 우선 나 자신도 누군가를 가르칠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닌 것도 있지만 이전에 읽었던 소설의 한 대목이 떠올라서이다.

‘땀 흘리는 소설’ 중 “어디까지를 묻다” 라는 단편 소설이 있다.

아나운서가 되기 위해 부모님의 지원을 받았지만 결국 실패하고 카드 회사의 상담원으로 취직한 ’나‘는 갈수록 말수가 없어진다. 하지만 택시 기사의 ‘어디까지 가느냐’는 질문에 미친 듯이 말을 토해낸다. 수많은 고객들에게 욕설과 폭언, 성희롱에 시달려야 하는 일상 속에서 그녀는 무방비한 감정 노동에 노출된다. 오래 하면 이 일도 익숙해질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녀는 과연 이 감정 노동에 익숙해졌을까?

이 단편 소설을 읽으면서 주인공은 감정을 배설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으로 축적되어 왔던 감정을 어찌 보면 엉뚱한 곳에서 새어 나가게 한다. 그녀가 이렇게 감정을 배설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 생각보다 힘든 일, 고객들의 폭언/폭설… 그 외의 요인들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이런 것들이 떠오른다.

결국 사람들은 쳇바퀴처럼 서로에게 감정을 배설한다. 조금이라도 갑의 위치가 되었을 때, 조금이라도 비방의 정당한 이유를 획득하게 되었을 때 얻는 ‘명분’은 사람들을 배설하게 만든다. 이런 배설은 전혀 이롭지 않다. 결국 서로에게 오물만을 전가하고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배설은 근본적으로 사람들의 감정을 해소시킬 수 있는가? 




배설의 종착역은 어디인가? 그리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말과 생각도 때로는 배설이 아닐까?

새어 나가는 것과 스스로 나타내는 것의 차이점에 대해 고민해보게 되는 주제인 것 같다.

이전 28화 어바웃 아웃라이어와 회귀식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