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적인 만남
눈 하나가 되고부터
좋아할 수 없게 된 말들이 생겼다.
젊어서 다행이야.
이 정도면 운이 좋은 거야.
신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시련만 주신다잖아.
그리고,
'이것도 다 운명'이라는
위로라기엔 너무도 아픈 말.
하필이면 눈꺼풀에 암세포가 자리를 잡아 분열한 것,
눈꺼풀에 멀쩡한 눈까지 함께 잘라내는 것 이외에는 확실한 방법이 없었던 것,
마침 작은 전이까지 발견되어 고민할 틈도 없이 수술을 결정해야 했던 것—
이 일련의 사건들을 굳이 '운명'이라는 말로 덧칠하고 싶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우연에 우연이 겹친 것뿐이야.'
'더럽게 재수 없는 거지.'
라는 편이 받아들이기 쉬웠으니까.
하지만
모든 것을 우연과 불운으로 밀어내고 나서도
끝내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눈 하나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없었을 만남,
이토록 가까워질 수 없었을 관계들—
그것들만큼은
'운명'이라고 믿는다.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예민해진 피부 때문에 수십 만 엔을 들여 맞춘 에피테제도, 흔한 의료용 안대도 연속해서 쓸 수 없고,
그렇다고 구멍 난 눈을 드러내고 다닐 수도 없는 상황.
무력감 속에서 또다시 우울의 파도로 뛰어들 준비를 하던 찰나,
나를 낚아채듯 구해준 게 바로 그것이었다.
[ふわふわ眼帯 綿100% ダブルガーゼー]
(푹신푹신 안대. 면 100% 이중 거즈)
부드러운 소재의 안대를 찾아 전 세계 온라인 마켓을 뒤지고 뒤졌다. 그러다 겨우 하나 찾아낸 곳이, 마침 내가 살고 있는 일본에 있었다.
'운명인가?'
[소재: 순면, 고무 카탄사
사용된 잉크는 포름알데히드가 들어 있지 않아 아기용 제품이나 반려동물용 제품에도 사용할 수 있는 안전한 잉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품 사진과 설명... 어느 것 하나 대충인 게 없었다.
하나하나 꼼꼼하고 자세하게, 만든 사람의 정성과 고민이 고스란히 스며 있었다.
'핸드메이드니까, 사정을 설명하면 좀 더 신경 써서 만들어 주지 않을까?'
눈 하나를 잃고 배운 것이 하나 있었다. 세상은 내가 다가가는 만큼 가까워진다는 것.
눈을 제거한 뒤 만난 친구와 직장 동료들, 심지어 브런치에서 만난 이름 모를 독자들까지도 모두 그랬다.
숨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꺼냈을 때, 상대도 조심스레 마음을 열었다.
주문 메시지: 저는 올해 눈꺼풀암을 발견하고 한쪽 눈꺼풀과 안구를 모두 제거했어요. 평생 안대를 써야 해서 부드러운 안대를 찾고 있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고민 끝에 결제 버튼을 누르고 나니 큰일 하나를 마친 것처럼 긴장이 풀렸다. 이불속으로 들어가 잠깐 눈만 붙이려던 게, 수면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듯 깜빡 잠이 들었다.
이상한 꿈을 꿨다.
누군가와 카페에 앉아 있었다. 가게를 가득 채운 햇빛에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와 미소를 가진 사람임은 분명했다. 그 사람은 천천히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우리는 이제 친구라고 했다.
'고마워요.'
뭐라고 입을 떼려는 순간 눈이 떠졌다. 눈에 대해서, 아니 눈이 없는 것에 대해서 편히 나눌 수 있는 친구가 필요했던 걸까.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그대로 누워 있었다. 이제 정신을 차리라는 듯 머리맡에 놔둔 휴대폰이 몸을 떨었다.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판매자 메시지: 저희 제품을 주문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도 눈에…(중략)… 비슷한 사정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보내주신 메시지를 읽고 남의 일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제가 만든 안대를 선택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조금이라도 기분이 밝아지는, 안심할 수 있는 안대를 만들어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억지로 찾아낸 기대와 긍정은 잠시뿐, 하루의 반 이상은 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죽어야 할 팔자를 거스르며 꾸역꾸역 살고 있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장 죽으란 법은 아니었나 보다.
꽁꽁 얼어붙었던 마음을
이렇게 따뜻하게 녹여주는 일도 있는 걸 보니.
구매자 메시지:소중한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감사해요. 안와가 완전히 빈 상태라 시중에 파는 안대로는 틈새로 눈구멍이 보이거나 염증이 생겨 고민이었어요…
저는 모레부터 연초까지 잠시 한국에 귀국합니다. 한동안 도쿄에 없으니 천천히 만들어 주셔도 괜찮아요.
판매자 메시지:따뜻한 말씀 감사합니다. 붙이는 안대는 고정이 되어 편하지만 매일 쓰기에는 피부에 부담이 되지요…(중략)
모레 귀국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전력을 다해 만들어 방금 발송하고 오는 길이에요. 부디 귀국 전에 도착하길 빌겠습니다!
장문의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한참을 이야기했다.
서로를 만났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 응원, 배려.
오랜만에 무척 설레었다.
'정말, 운명인가?'
설렘이 커지는 만큼 불안도 뒤따랐다.
또 괜한 기대를 가졌다가 정작 안대가 잘 맞지 않거나, 나의 어떤 문제로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 또 실망할까 봐.
한 번 더 벼랑에서 굴러 떨어지면 이번에는 다시 올라가지 못할까 봐.
역시, 아직 죽을 운명은 아니었나 보다.
공항으로 나가는 길에 혹시나 해서 열어 본 우편함에 안대가 도착해 있었다.
안대는 사진에서 본 것보다도 귀여웠다. 다행히 얼굴에도 무척 잘 맞았다.
두 장의 거즈를 이어 붙이지 않고 겹쳐서 착용함으로써, 푹신푹신한 순면이 얼굴의 굴곡에 부드럽게 밀착되었다.
마스크와는 또 다른, 얇고 부드러운 면 고무사가 자국 없이 편안하게 귀에 걸렸다.
따뜻한 옷이 생겼다.
눈을 가리기 위함이 아니라, 눈과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옷.
운명적으로 만나, 우리 조금 더 열심히 살아 보자고, 그래야만 한다고 조용히 말해주는 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