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의 준비, 지쳐 있었다

by 포마람

한 번은 일반의에게 진료를 받았다. 나에게 교수님이 배정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았다. 또다시 두 달의 기다림, 바뀐 교수님은 어떤 분일까? 도무지 새로운 교수님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려 대학병원까지 걸어가는데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저 줄타기 위에 선 사람처럼, 한 발은 설레고 한 발은 휘청거렸다. 머릿속은 온통 복잡했고 가까스로 병원에 도착했다. 키오스크에 주민번호를 입력하고 도착확인증을 받았다. "이수현님, 도착이 확인되었습니다." 기계음을 뒤로 한 채 얼른 담당교수님을 확인했다. 교수님 성함이 뭘까? B교수님. 이름만으로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정확히 알아채지 못했다. 내가 알 수 있는 건 기존에 계신 교수님이 아니라 다른 병원에서 새로 오신 교수님이라는 사실뿐이었다.


예약시간에 맞춰 왔지만 유난히 긴 대기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기실 전광판에 내 이름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애꿎은 도착확인증만 손가락으로 접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두 다리는 저절로 좌우를 오가며 바닥을 두드렸다. 오늘 유독 시간이 더디게 가는 것 같았다. "이수현님, 1번 진료실로 들어가세요." 드디어 B교수님을 뵐 차례다.


여자 교수님이었다. 코로나로 인해 마스크를 쓰고 계셨다. 수줍게 눈을 마주치며 "안녕하세... 요." 낯선 교수님 앞이라 목소리가 먼저 움츠러들었다. 어딘가 모르게 말끝이 흐려지고 짧아졌다. "안녕하세요. 이수현님." 마스크 위로 드러난 눈빛과 눈동자는 흔들림 하나 없었다. 말투는 말 하나하나 또렷했다. 나는 금세 축축해진 두 손을 맞잡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교수님, 제가 임신을 하려고 하는데요." 교수님은 망설임 없이 단정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임신 이전에 정서, 수면 증상이 충분히 안정되는 게 우선입니다. 최근까지 오랜 기간 불안정했던 상태고 임신 기간 중 최소 약물만으로는 증상 조절이 어려울 수 있어요." 분명 배려하는 말이었지만 내 귀에는 왠지 차갑게 맺혔다. 내가 원하는 답변은 이게 아니었다. '내가 안정되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순간, 입술이 굳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내 앞에는 먼저 건너야 할 벽이 버티고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모든 것이 완전히 다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솔직히 B교수님 말씀대로 나 스스로도 불안정하긴 했다. 약 기운 때문인지 아침에 졸립기도 했고 회사를 그만둔 이후로는 바보라도 된 것처럼 집중이 잘되지 않았다. 사소한 것에도 화가 나고 감정 조절이 힘들었다. 특히 리튬(조울증 치료의 대표적인 약물)을 소량 복용하고 있는데도 손이 저린 증상이 지속됐다.


내 증상에 B교수님은 혈액검사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리튬 약의 혈중 농도를 측정해서 효과가 충분한지, 독성 위험은 없는지 확인을 해야 했다. "리튬의 혈중농도 자체는... 사실은 치료적 효과를 내는 범위에 살짝 못 미치는 정도예요. 그래서 몸에서 약이 돌아다니는 농도는 낮은 편이에요. 손 저림이 약 때문인지는 확실하지는 않아요. 이건 경과를 지켜봐야 해요." 교수님의 말씀이 맞지만 왠지 모르게 임신 준비가 늦어질수록 질질 끄는 느낌을 받았다. 약 조절도 되게 고심하셨다. 약물은 종류에 따라 조금씩 증량과 감량을 하셨다. 조울증 환자의 임신이 이렇게나 힘든 거였나? 내가 무모한 일을 벌이고 있는 건가? 허탈하고 온몸에 힘이 빠졌다.


B교수님은 조울증 환자가 임신을 하는 것에 대해 상당한 의심과 걱정을 갖고 계신 것 같았다. "임신... 충분히 가능은 합니다. 다만, 조울증이라는 특성상 임신과 출산이 큰 부담이 될 수 있어요. 분명 가능성은 있지만, 위험이 전혀 없다고는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가능하다'라는 단어보다 내 귀에는 '위험하다'만 울렸다. 교수님은 조심스럽게 건네는 말이었지만 내게는 '하지 말라'는 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단 한 번도 내 질병으로 인해 임신을 못 하게 될 거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 우리에게 교수님의 말은 상처와 비수로 돌아왔다. 교수님은 한결같이 우회적인 태도를 보이셨고 하나같이 자신 없는 말들이었다. 어느새 나는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고 숨이 가빠졌다. 진료실 공기가 갑자기 사라진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진료실 문을 박차고 나와 어디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B교수님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떨리는 음성으로 "조울증 환자는... 전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건가요?"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시작도 해보지 않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희망이 끊어져 버린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좌불안석이었다. 나는 누구를 믿고 임신 준비를 해야 하나, 그 순간만큼은 교수님이 원망스러웠다. 남편은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 있었다.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간절하게 말을 이어갔다. "교수님 우리는 아직 시도도 하지 않은걸요?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건 아니지 않나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표정이었다.


다음 진료 때, 교수님은 한참 말을 고르듯 침묵하셨다. "지난번에는 너무 죄송했습니다. 제가 환자분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했네요."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서 진심 어린 사과가 느껴져 숙연해졌다. 최선을 다해 진료를 보고 내가 무사히 출산을 하기까지 잘 도와주겠다고 하셨다. 지금부터는 교수님을 신뢰하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약 조절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진료실에서 처방받은 약 용량이 바뀌었다. 머리는 무겁고 몸은 솜뭉치처럼 가라앉았다. 새벽 4시, 천장을 보며 눈을 감아도 잠은 오지 않았다. 남편이 출근을 하고 혼자 남은 나는 나쁜 상상들이 꼬리를 물었다. 이제는 임신을 원하는데, 우리 아이 갖고 싶은데, 내 정신 상태는 왜 이렇게 안정이 되지 않는 걸까?


눈물이 멈추지 않아, 앞이 잘 보이지 않은 채로 흐느끼며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 아이... 꼭... 가져야 해? 이게... 맞는 거야?" 아마도 남편은 결혼 전부터 꿈꾸던, 아이가 있는 단란한 가정을 더는 그릴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 아이 원하잖아. 지금까지 잘해왔고." '나는 그냥 내 마음을 조금만 봐달라는 거였는데...' 괜히 가슴이 저렸다. 한동안 원망이 앞섰지만 끝내 나는 남편을 탓할 수 없었다. 그의 진심이 무엇인지 알았으니까. 주변에 들려오는 출산 소식을 들으며 2020년 겨울, 나는 남편과 교수님과 함께 다행히 임신에 대한 모든 준비를 맞췄다. 2021년을 바라보며 남편에게 속마음을 전했다. "나 정말 준비 다 됐어. 우리 아이 갖고 싶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임신 기간이 아니라, 임신을 준비하는 길에도 참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시간이 흘러 46개월 아이를 양육하고 있는 지금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때 왜 B교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이제는 이해한다. 조울증 환자가 임신과 출산, 육아를 감당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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