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는 그 진가를 알지 못했던 음식이 몇몇 있다. 예를 들면 씁쓸하기만 했던 녹두전, 밍밍한 맛이 물과 이온 음료 사이 어디쯤에 있는 것 같던 평양냉면, 무((無)맛의 질기기만 하던 바게트가 그러하다. 특히 바게트는 어린 마음에 마치 판자를 씹어 먹는 것만 같았다. 보드랍고 말랑말랑한 다른 빵들을 놔두고 왜 프랑스인들은 굳이 저 딱딱한 바게트에 햄과 채소를 넣어 샌드위치를 만드는지. 이해할 수 없는 어린 나이였다.
그 어린 아이는 어느덧 시간이 흘러 바게트를 사기 위해 일부러 빵집에 들리는 어른이 되었다. 바게트 세계의 입문은 ‘마늘 바게트’부터였다. 달짝지근한 버터와 알싸한 마늘 소스가 담백한 바게트와 묘하게 균형을 이루었다. 그 다음은 바게트로 만든 ‘앙버터’였다. 헉 소리가 날만큼의 두꺼운 버터를 팥과 함께 바게트 사이에 무심하게 껴 준 비주얼이 처음에는 충격적이었다. 게다가 칼로리까지 충격적인 이 바게트 앙버터가 왜 이리 인기 절정일까,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팥과 버터라는 둘 다 자기주장이 강한 이 조합을 투박한 바게트가 묵묵히 서포트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보드랍고 말랑말랑한 다른 빵을 사용한 앙 버터는 어쩐지 맛이 덜했다. 이렇게 나의 관심은 바게트로 향하게 됐다. 마늘바게트를 거쳐 다시 앙버터를 거쳐 결국에는 생 바게트 그 본질로 귀결된 것이다.
관심을 주고 나니 종이 판자를 씹는 것만 같았던 바게트 맛이 180도 달라졌다. 이렇게 풍부한 맛인 줄 미처 몰랐다. 입에서 씹으면 씹을수록 다각적인 맛이 났다. 달기도 했다가, 짤짤하기도 했다가, 고소하기도 했다가, 가끔 쓴 맛도 났다. 아마 식빵처럼 몇 번 안 씹어도 홀랑 넘길 수 있었다면 이런 맛을 못 느꼈을 것이다. 어금니에 힘을 주고 꼭꼭 바게트를 씹다보면, 이렇게 입체적인 맛을 지닌 빵이 또 있을까 싶어진다. 입 안에서 희미하게 남는 그 맛이 계속해서 바게트를 찾게 만든다. 분명히 자극적인 맛은 아닌데 그 여운은 강렬하다.
그 뒤로 나는 바게트 예찬론자가 되었다. 어떻게 하면 요리에 바게트를 쓸 수 있을까, 제철음식을 바게트와 조화롭게 먹을 수 있는 레시피는 무엇이 있을까 등등. 바게트를 향한 애정 어린 고민으로 행복해한다.
로스트 애플 바게트
그 중에서 최근에 만들어 먹었던 바게트 레시피를 하나 소개한다. 사과를 이용한 ‘로스트 애플 바게트’ 이다. 이름이 좀 거창하긴 한데 말 그대로 사과를 얹어 구운 바게트라고 보면 된다.
사실 개인적으로 과일은 생으로 먹는 것을 가장 선호한다. 특히 마요네즈와 버무린 과일 샐러드는 먹지 않더라도 시야에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왠지 눈살이 찡그려진다. 물론 합당한 이유는 없다. 그냥 나만의 기호이자, 반사적으로 나오는 반응이다. 그나마 봐줄 수 있는 것은 케이크에 얹어진 몇 개의 딸기 정도이다. 하지만 이런 나라도 구운 과일이라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특히 흑설탕, 버터, 사과를 넣고 졸여낸 사과 콤포트는 가열할수록 달짝지근한 향이 올라온다. 만드는 과정에서부터 입 안에 침이 절로 고인다. 이 달콤한 진득한 것이 담백한 바게트와 만나면 또 얼마나 환상의 조합을 이룰까,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한껏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