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24 마이너리그 트리플A - 멤피스 레드버즈
★독립리그부터 MLB까지 - 미국 프로야구 완전 정복기★
- 프롤로그
- 메이저리그-응원 문화 없이 뜨거운 야구 열기에 놀라다
1994년 LA 다저스와 국제 유망주 계약을 체결한 박찬호가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빅리그 부대를 밟은 이후부터 올해 겨울까지, 53명의 고등학생·대학생 야구선수가 한국 프로야구에서 뛰는 대신 미국행을 택했다. 그리고 12명의 선수를 제외한 나머지 41명은 빅리그 무대를 밟지 못한 채 한국으로 돌아오거나 유니폼을 벗었다.
마이너에서 꿈을 접은 이들의 과반수가 루키리그나 싱글A 리그에서 좌절했다(루키리그 8명, 싱글A 18명). 트리플A까지 올라갔으나 빅리그의 부름을 받지 못한 선수는 모두 일곱 명. 이들은 전원 KBO리그로 복귀했고, 대부분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송승준(1999·보스턴 레드삭스)은 롯데 자이언츠의 선발 에이스로 활약하며 구단 역사상 두 번째 100승 투수가 되었다. 이승학(2001·필라델피아 필리스)은 허리디스크로 롱런하지 못했지만 2007년 33경기에 나서며 62.1이닝 7승 3홀드 평균자책점 2.17의 빼어난 성적을 올렸다. 이대은(2007·시카고 컵스)은 국내 복귀 전부터 신인 드래프트 최대어로서 10개 구단의 관심을 받았고, KT 위즈의 핵심 계투 요원으로 뛰었다. 하재훈(2008·시카고 컵스)은 데뷔 시즌에 구원왕 타이틀을 거머쥐었으며, 이학주(2009·시카고 컵스)는 올스타 유격수가 되었다.
트리플A에서 헤매다 꿈을 접고 돌아온 KBO리그의 스타 플레이어도 많았다. 2014년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계약을 체결한 '류현진 라이벌' 윤석민은 트리플A에서 시즌을 시작했으나, 끝내 빅리그로 올라오지 못하고 광주로 돌아갔다. 2017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스플릿 계약을 맺은 '국가대표 3루수' 황재균은 그해 대부분을 트리플A에서 보냈고, 잠시 승격됐던 빅리그에서는 18경기 1홈런 5타점 타율 1할 5푼 4리의 성적에 그쳤다. 4년 연속 홈런왕 박병호, 국대 좌완 양현종도 미국 문을 두드렸으나 '빅리그에서 부진 후 시즌 대부분을 트리플A에서 보내다가 국내 복귀' 패턴을 피하지 못했다.
송승준은 한때 보스턴에서 가장 촉망받던 특급 유망주였으나 부상에 발목이 잡혀 빅리그 무대를 밟지 못했다. 이승학, 이대은, 하재훈, 이학주도 부상으로 커리어가 꼬이고 말았다. 윤석민은 강속구를 뒷받침해주는 변화구가 좋은 평을 받았지만 미국 기준으로는 빠른 공이 아니었고, 결국 해외 진출 이후 평범한 투수로 전락하며 트리플A를 벗어나지 못했다. 박병호는 메이저리그에서도 통하는 파워를 가졌지만 빅리그의 강속구에 대응하지 못하며 무너졌다. 한국에서 올라운더였던 양현종과 황재균은 미국에서 '특출난 장점 없는 선수'가 되면서 빅리그 장기 생존에 실패했다.
트리플A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끝에 좌절한 선수들은 다들 빅리그까지, 혹은 빅리그 주전까지 단 한 걸음이 모자랐다. 이들이 모두 미국을 떠난 지금도 트리플A에서는 빅리그까지 한 뼘을 남겨둔 세계 최고의 야구선수들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더블A와 싱글A를 거친 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산하 마이너 트리플A 팀 멤피스 레드버즈가 위치한 테네시주 멤피스를 찾았다. 생각만큼 으리으리하지는 않았으나 더블A·싱글A와 달리 경기장 밖 공간도 있었다. 무엇보다 경기 시작 한 시간 반 전부터 엄청난 인파로 거리가 붐벼서 화들짝 놀랐다.
경기장 정문을 통과하고 나서도 게이트를 지나기까지 한참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거의 3~40분 정도 서 있었던 것 같다. 멤피스의 어마어마한 마이너리그 사랑을 엿볼 수 있
을 뻔했는데, 알고 보니 이날 선착순 5000명에게 테네시주 멤피스 연고 NBA 프로농구단 멤피스 그리즐리스와 콜라보한 유니폼을 뿌려서 많은 인파가 몰린 것이었다. 이날 경기의 가장 저렴한 티켓은 17달러였다. 멤피스 주민으로서는 발품만 조금 팔면 단돈 17달러에 야구 경기도 보고 연고지 농구팀 콜라보 유니폼까지 받는 셈이었다.
BallparkDigest.com에 의하면 멤피스 레드버즈의 2022시즌 경기당 평균 관중 수는 3375명으로 같은 카디널스 산하 마이너 팀 스프링필드 카디널스(더블A·3754명)보다 낮은 수준이었다. 스프링필드는 약 16만 명이 거주하는 소매·관광업 중심의 중소도시고 멤피스는 60만 명이 넘게 거주하는 대도시임을 감안하면, 멤피스 레드버즈의 현지 인기는 스프링필드에서의 야구 열기보다 훨씬 뜨뜻미지근할 것이다.
하위 리그와 별 차이 없는 구장 시설은 '트리플A는 싱글A, 더블A와 시설 수준도 다를 것이다'라는 기대를 산산이 부숴줬다. 특히 전광판의 경우, 한밤중에 몰래 떼다가 경기장 정문 앞에 갖다 두면 다음 날 폐지 줍고 다니는 할아버지가 왕건이라고 기뻐하며 집어 갈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
오토존 파크에는 여태 들렀던 마이너리그 야구장 중에서 유일하게 띠 전광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불량화소 투성이의 메인 전광판과 비교돼서 황당했다. 띠 전광판은 KBO리그 1군 구장 중에서도 미비된 곳이 적잖이 있을 정도의 고급 시설이다. 메이저리그 뺨치는 수준의 띠 전광판을 달았으면서, 대체 왜? 메인 전광판은 유지 보수조차 안 하고 방치하던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마이너리그의 세계는 참으로 심오하다.
눈에 들어오는 오토존 파크의 풍경을 카메라 셔터에 담으면 담을수록 경기장에 대한 실망만 커져 갔다. 띠 전광판이 달려있고 테네시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에 위치한 팀이라 매 경기 3000명 넘게 온다는 점만 빼면, 카디널스의 마이너 싱글A 팀이 있었던 도저 파크보다 나은 점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다른 트리플A 경기장이 시설이 어떤지는 직접 가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하지만 만약 오토존 파크와 비슷하거나 이곳보다 못하다면 한국에 온 마이너리거들이 "한쿡 죠와요! 아이 러브 Kimchi&Bulgogi, Seoul's 나잇 환상적이다! 계속 Republic of Korea에서 뛰고 싶다" 같은 말을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치안 박살 났거나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도시를 연고지로 한 마이너 팀에서 연봉 1만 달러 받으며 야구하기(원정 경기 때는 최소 4시간씩 버스 타고 이동)' vs '치안 걱정은커녕 밤에도 놀러 다닐 수 있는 나라의 아무리 야구 못해도 10만 달러 챙겨주는 프로팀에서 에이스 대접 받으며 야구하기'...
빅리그에 대한 꿈이 이글거리는 이들이 아니라면 뒤도 안 돌아보고 후자를 고르지 않을까?
인프라적인 면에서의 첫인상은 매우 나빴지만, 막상 경기가 시작되고 나서는 수준 높은 경기력에 '역시 마이너 최상위 리그구나!'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루키리그와 싱글A는 갓 프로 유니폼을 입은 햇병아리들 사이에서 옥석을 가려내는 곳이고, 더블A는 싱글A서 걸러낸 옥석을 다이아몬드로 세공하는 장소다. 다들 한 경기 한 경기의 승패보다는 교육리그로서의 성과가 우선시되는 것이다. 반면 트리플A는 더 이상 유망주를 육성하는 교육 리그의 개념이 아니다. 빅리그 무대까지 단 한 걸음만을 남겨둔 유망주, 혹은 빅리그에서 뛰기에는 한 끗 차이로 아쉬운 선수들이 모였기 때문이다.
다들 오랜 시간 프로 리그에서 뛰었기 때문인지 수비 기본기 하나만큼은 기가 막혔다. 싱글A와 더블A, 그리고 독립리그는 포수가 도루 저지를 시도하면 2루수나 유격수의 반응이 늦거나 송구가 정확하지 않아 한 베이스를 더 내주기 일쑤였다. 강습 타구를 처리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트리플A는 하위 레벨의 리그에서 '불가능'이었던 플레이가 '가능'했다.
지난 한 해 동안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홈구장인 부시 스타디움을 비롯해 마이너리그 경기장을 많이 돌아다녀서 그런지, 오토존 파크에서 반가운 얼굴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다들 선수 생활 최대의 위기를 겪는 중이었지만.
이날 유격수로 선발 출장한 크레이머 로버트슨(Kramer Robertson)은 지난 한 해에만 세 번의 지명 할당을 겪었다. 5월에 카디널스의 주전 유격수 폴 데용과 백업 내야수 에드문도 소사가 부상과 부진으로 이탈하면서 커리어 첫 빅리그 콜업의 행운을 누렸으나, 단 두 경기에 대주자와 대타로 나선 뒤 트리플A로 강등됐고 얼마 뒤 지명할당됐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가 클레임을 걸어 로버트슨을 영입했지만, 트리플A에서 13경기를 뛴 뒤 다시 지명할당을 당했다. 뉴욕 메츠로 이적한 뒤에는 한 번 더 빅리그에 승격되는 행운을 누렸다. 하지만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한 채 지명할당 통보를 받았다. 그는 야구선수를 그만두기에는 너무 우수했고, 메이저리그에서 기용하기에는 뚜렷한 강점이 없는 전형적인 AAA리거였다(2022년 트리플A 116경기 11홈런 30도루 타율 2할 3푼 9리).
2루수로서 로버트슨과 합을 맞춘 놀란 고먼(Nolan Gorman)은 지난해 빅리그에 데뷔해 14개의 홈런포를 쏘아 올린 슈퍼 루키다. 그러나 14홈런의 이면에는 103개의 많은 삼진과 2할 2푼 6리의 낮은 타율, 그리고 풀타임 주전으로 기용하기 어려운 좌·우 스플릿의 그림자가 있었다. 2023년 정규시즌이 시작되기 전까지 약점을 해결하지 못하면 2021년 2루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토미 에드먼, 지난해 고먼과 함께 빅리그에 데뷔했으며 시즌이 끝날 때까지 마이너리그에 내려가지 않고 내야 유틸리티 골든 글러브를 받은 브렌던 도노반에게 밀려 트리플A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지도 모른다.
대학 졸업 후 초봉 1억의 일자리 오퍼를 거절하고 언드래프티 마이너리거의 길을 걷게 된 라이언 로토스(Ryan Loutos)는 트리플A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중이었다. 더블A까지는 최고 100마일(160km/h)까지 나오는 광속구를 앞세워 타자를 윽박지를 수 있었지만, 트리플A에서는 '무딘 제구'와 '보조 구종의 부재'라는 약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2023년 현재 트리플A에서 힘든 시간을 보낼 것이 예상되는 한국인 선수로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박효준이 있다.
야탑고등학교 시절 1년 선배였던 김하성을 2루로 밀어낼 정도의 천재 유격수였던 박효준은 고교 졸업 직후 뉴욕 양키스와 116만 달러의 국제 유망주 계약을 체결하며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마이너리그에서는 고교 시절 무궁무진해 보였던 잠재력이 좀처럼 실력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2021년에 트리플A에서 빼어난 성적을 올렸으나 빅리그에서는 45경기 3홈런 1도루 타율 1할 9푼 5리에 그쳤고, 2022년에는 트리플A에서도 부진하며 여러 마이너 팀을 전전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미국 야구를 관심 있게 챙겨보는 사람들 중 일부는 박효준의 미국 생활을 실패했다고 단정 짓곤 한다. 고교 시절 그에게 밀려 2루수를 봤던 선배 김하성이 KBO리그를 대표하는 유격수로 성장한 뒤 미국에서도 골든글러브 후보에 들 정도의 활약을 펼치는 동안, 박효준은 트리플A에서 나날이 입지가 위태로워지고 있었으니까. 박효준보다 3년 늦게 미국 생활을 시작한 배지환은 피츠버그를 대표하는 유망주로 성장해 지난해 메이저리그에서도 좋은 성적을 올렸는데, 박효준은 트리플A에서도 부진하다 피츠버그에서 쫓겨나듯 이적했으니까.
하지만 박효준의 미국 생활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그의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실패했다'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마이너리그 데뷔 이후 꾸준히 아쉬운 성적을 올렸으며 2020년에는 코로나19로 직장이 폐쇄되며 통으로 1년을 쉰 20대 중반의 동양인 내야수가, 2021년 트리플A를 대표하는 타자로 성장할 줄 누가 알았을까. 하물며 그는 운동선수로서 최전성기의 신체 능력을 자랑할 20대 중·후반의 나이대에 접어들고 있다. 박효준이 올해 또 한 번의 기적을 일으켜 빅리그 주전으로 도약한다 한들, 그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메이저리그의 꿈은 선수의 애간장을 태워 없애버릴 것이다. 다만 그 모든 시련 끝에 행복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기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