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편지

중고등부 은상 - 고건우

by 편지한줄

다시 쓰는 편지


할머니, 할아버지께


계절은 토끼처럼 왔다가 노루 꼬리만큼 보여주며 지나갑니다. 늘 뵙고 지내지는 못하지만 항상 건강하시길 바라며, 오늘은 사죄의 편지를 다시 쓰고자 이렇게 펜을 들었습니다.


5년 전 설날의 일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날 할머니는 꼴 마리에 정성스레 넣어 둔 편지를 꺼냈습니다. 그리고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말씀하셨지요.


"요것이 우리 손주가 내게 보낸 편지다. 월매나 소중하고 고마운지 요렇게 내가 넣어 가지고 다니다가 이제야 꺼낸다. 내가 글을 읽지 못하니 대신 아범이 읽어보아라."

그 편지는 제가 보낸 것이 맞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에는 차마 기억하기에도 부끄러운 할머니에 대한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했었습니다. 할머니가 글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저는 그 글에 제가 지닌 할머니를 원망하는 편지였습니다.


할머니가 아버지를 생각하신 정성으로 밤새 우려낸 곰국을 가져다 놓은 날 아버지는 언제나 한숨 섞인 투정을 보였습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미안하고, 죄송하다고 하고 그 모습은 마치 조선시대 감옥에서 칼을 쓰고 앉아있는 죄인과 닮아있었습니다.


"어머니 음식 솜씨 따라오려면 멀었어."

아빠는 엄마의 음식 솜씨를 할머니의 음식 솜씨와 견주어 비교하고, 그것으로 인해 간혹 언쟁이 높아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떻게 할머니의 음식 솜씨를 따라갈 수 있냐는 엄마의 투정에, 그러면 할머니께 가서 배우라고 합니다. 이 갈등의 원인을 저는 할머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할머니가 애들 버르장머리 없게 만든 다니까."

할머니가 저나 누나에게 두 번 접어서 4분의 1이 된 천 원권 몇 장을 건네시거나, 할아버지와 함께 만 원권이라도 제게 용돈을 주시면, 금방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제가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면 그것은 할머니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음식 함부로 버리면 못 써."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텃밭에서 키우신 상추가 밥상에 올라오는 날은 채소 꼬투리까지 밥상에 남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따와서 얼마나 맛있는데, 할머니가 얼마나 정성 들여 키우셨는데..."로 이어지는 아버지의 잔소리는 숟가락과 함께 올라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집의 갈등의 원인은 할머니 할아버지라고 생각했습니다. 할아버지와 제가 장기를 두고 있으면, 할머니는 손자 생고생시킨다고 할아버지를 나무라시고, 장기판을 버리겠다는 협박도 하십니다.


꼬박꼬박 부모님이 드리는 용돈으로 할머니, 할아버지가 생활하시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 반에서 가장 적은 용돈을 받는 저와 비교하면 부모님이 할머니, 할아버지께 드리는 용돈의 한 달 액수는 아마 제가 몇 년을 모아도 절대 불가능한 금액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용돈을 할머니, 할아버지는 정말 제게 어울리지 않는 옷을 시장에서 사다가 주시기도 했습니다. 친구들 아무도 입지 않는 구시대의 옷을 사다 주셨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죄인의 심정으로 항시 미안해하는 원인은 할머니, 할아버지께 있었고, 아버지 구두가 3년째 같은 것도 할머니, 할아버지를 부양하느라 힘드셔서 일 수도 있고, 또 제가 버르장머리 없는 행동을 했다면 그것도 할머니 할아버지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날 아버지는 제 편지를 받아 들고 한참을 머뭇거리시다가 소설 한 편을 지어내셨습니다. 뒷부분을 모조리 바꾸었으니, 분명 소설이 된 것이었습니다.


"할머니가 계셔서 용돈을 받을 수 있어 좋습니다. 이것은 다른 친구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할머니가 계셔서 엄마 대신 아빠의 입맛을 맞춰주시고, 우리 집안이 장수 집안이 되게 하여서 고맙습니다. 철 따라 음식을 차려 주셔서 언제나 싱싱한 채소를 먹고 건강하게 지내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부모님이 부지런히 일해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부양하는 기쁨을 갖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버르장머리는 없더라도 제가 하는 모든 행동은 옳다고 인정해주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셔서 고맙습니다."

라고 아버지는 편지를 읽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편지가 너무 구겨져 있다고 다음에 고운 종이에 그대로 써서 가져오겠노라고 이야기하며 편지를 주머니에 구겨 넣으셨습니다.


"그래도, 손자가 처음 쓴 편진디."

하시는 할머니를 극구 만류하며 아버지는 그 편지를 맞춤법도 안 맞아 남들 보기에 창피하다고 말씀하시며, 주머니에 넣은 편지를 결코 꺼내 놓지 않으셨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 다 구십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당신들이 제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저는 몰랐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해도, 언제나 손자의 행동은 옳은 것이며, 정답이라는 믿음이 확고한 확실한 내편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편지를 다시 써야 합니다.

지식이 아닌 지혜를 가진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존경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아야 합니다. 제가 장기판에서 할아버지에게 불리해 보일 때마다 장기판을 뒤흔들어 놓았던 마음도 이해합니다. 새벽기도로 저를 축복하시고, 저를 위한 기원을 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제가 학교에 입학하거나 졸업식을 치를 때면 언제나 할머니, 할아버지는 함께 그 자리에 계셨습니다.


갓김치가 맛있다는 이야기를 한 번 했는데, 지금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텃밭에 갓을 키우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약수터 물로 키우는 정성까지 햇빛과 함께 텃밭을 채우고 있음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편지를 다시 써야 합니다.

그때 그 어리석은 행동을 용서해 달라고.


텃밭에 상추가 잘 자라는 계절입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도 상추의 무른 기운을 받으셔서 더욱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2016년 4월 건우 올림




2016 대한민국 편지쓰기 공모전 수상작

중고등부 은상

keyword
이전 09화세상에서 가장 보고 싶은 우리 엄마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