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부 동상 - 김예랑
아빠 안녕하세요. 저 아빠의 하나뿐인 딸 예랑이에요. 이렇게 펜을 쥐고 아빠한테 쓰는 편지도 참 오랜만이네요. 매번 쓸 때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쓰는 게 많이 힘들었었는데 오늘은 잘 참을 수 있겠죠?
아빠, 아빠가 이 세상을 떠난지도 4년이 되어가고 있고 저는 어느덧 고등학교 2학년, 숙녀가 되어가고 있어요. 2년만 지나면 성인이 되지만 아마 10년, 20년이 지나도 아빠를 떠올릴 땐 그때 그 시절, 어리고 속상한 마음은 여전히 한 곳에 자리 남아 있겠죠. 2012년 10월 13일 아침. 눈을 떠보니 부재중 전화 2통, '아빠'. 이혼하신 후 자주 안부 전화는 했지만 그때 그 전화는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불안했습니다. 새벽 2시. 그 시각은 아빠가 전화할 시간도 아닐뿐더러 시간은 오후로 향해가고 있지만 엄마가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몇 번이고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도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엄마가 몹시 창백한 얼굴로 돌아왔습니다. 저를 조용히 앉히시더니 힘겹게 꺼낸 말씀은 제가 그토록 그것만이 아니길 바랬던 아빠와의 사별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아빠의 마지막 모습도 보지 못한 채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너무나도 믿기 힘들었지만 장례식장에 들어서 보인 아빠의 사진 한 장은 저에게 많은 말들을 해주었습니다. 제가 아빠에게 처음 느낀 감정은 원망, 그리고 원망보다 더 크게 밀려오던 후회. 하지만 아빠가 제 마음속에 뱉은 첫마디는 미안함이 섞인 울지 말라는 위로의 말. 그 지옥 같던 순간들이 어느덧 4년이 지났네요. 아빠 따라서 죽고 싶기도 했고, 아빠가 떠난 후 우울증에 시달려 상담도 많이 받았어요. 영원히 그렇게 힘들 줄 알았는데 이제는 씩씩하게 하늘 보며 미소 지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이겨내 왔던 것 같아요. 아빠가 떠난 4년 동안 아빠가 마지막에 머무른 집이 있는 임은동, 그곳에 참 많이 갔어요. 아빠가 살아계실 때는 갈 방법을 몰라 엄마가 매번 태워주셨지만 아빠가 떠나고 나서야 111번 버스를 타면 그곳에 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버스를 타고 1시간을 가서야 도착해도 아빠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리웠어요. 아빠랑 웃고 떠들던 그 거리가 이젠 홀로 남아 눈물로 채우게 됐네요.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걷다가 포장마차 집만 지나가면 그렇게 눈물이 나요. 아빠는 그 포장마차를 지날 때면 우리 예랑이는 언제 커서 아빠랑 술 한 잔 하겠느냐고 하셨잖아요. 그땐 그 순간이 빨리 올 줄 알았는데 왜 기다려도 오지 않는 순간이 되어버렸을까요? 이제야 하나둘씩 깨닫게 되어서 죄송해요, 아빠. 14세, 너무 철없던 시기에 아빠와의 마지막 점을 찍어서 속상한 마음뿐이에요. 겉으로 표현 못하던 아빠의 사랑이 이제야 그 진실된 사랑을 느껴요. 저도 표현에 있어 아빠만큼 서툴러서 맨날 틱틱거리고 상처만 줬던 것 같아요. 가장 가슴 아프게 남은 순간은 아빠가 저랑 버스를 타고 영화 보러 가던 날, 허름한 옷차림을 한 아빠를 자꾸만 피하던 저에게 물으셨죠. 아빠가 부끄러우냐고. 장난인지 진심인지 그렇다고 한 저의 말에 씁쓸하게 고개를 떨구던 그 모습은 아직도 저의 불효녀 모습으로 남아있어요. 죄송해요 아빠. 10년 내내 입던 그 옷들이 그때는 왜 그렇게 부끄러웠는지 몰라요. 가난함이 주는 자존심의 깊이가 너무 커버린 탓일까요. 커서 열심히 돈 벌어서 아빠 옷 한 벌 사드릴 생각은 못하고 아빠에게 깊은 상처만 준 것 같아 마음이 아프네요. 아빠 그거 기억나세요? 제가 초등학생이 될 무렵 아빠가 엄마와 싸우던 날, 저에게 스무 살까지 아빠 안 보고 살아도 아빠 얼굴 기억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잖아요. 사실 아빠가 떠난 후에도 그 순간을 떠올리면 아빠가 참 원망스러웠어요. 사실 부모님의 이혼 사유는 아빠의 방황이 큰데 아빠는 아시면서 노력은 안 하신다고 생각했거든요. 저를 그렇게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도 안될까 싶었어요. 아빠가 떠난 후, 저는 엄마와 아빠의 옛이야기에 대해 참 많은 대화를 나누었어요. 엄마의 입장에서 듣다 보니 아빠가 엄마를 얼마나 힘들게 한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들어보지 못한 아빠의 입장에서 생각하니 참 가슴이 아려오더라고요. 평탄하지 못한 환경에서 자라 온 아빠도, 어릴 적부터 바로 잡아 줄 사람이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거든요. 엄마는 아직 아빠에 대한 원망이 남아있을 진 몰라도 저는 이제 아빠를 이해하려 해요. 아빠는 이 세상에 없지만 자꾸만 아빠의 모습이 떠오르게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아빠의 마지막 남은 진정한 친구들. 경문이 삼촌, 상렬이 삼촌, 그리고 규식이 삼촌. 1년에 한 번씩 꾸준히 구미에 내려오셔서 제가 커 가는 과정을 아빠 입장에서 봐오고 계세요. 가끔 삼촌들이 아빠가 살아계실 때 저에 대해 하신 말씀들을 해주시는데 아빠가 표현하는 것과 달리 저를 많이 사랑하셨다는 것을 크게 깨달아요. 그러고 보면 저는 아빠를 참 많이 닮은 것 같아요. 얼굴도, 가끔씩 하는 행동들까지도. 그래서 어쩔 수 없는가 봐요. 제가 아빠의 딸이라는 사실은 새아빠가 생긴다 해도 변함이 없으니까요. 아빠, 오늘따라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요. 아빠는 천국에서 잘 쉬고 계시죠? 공부를 하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노래를 듣다가도 아빠 생각에 많이 울어요, 요즘도. 아빠는 제가 울 때마다 제 머릿속에서 나지막이 울지 마라고 속삭이지만 아빠의 품이 너무나 그리운 날에는 그것마저 위로가 되지 않나 봐요. 아직 저는 하나님이 아빠를 먼저 데려가신 이유를 깨닫지 못했어요. 언제, 어떻게 깨닫게 될 진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뜻은 분명히 있다고 믿어요. 그 믿음 하나가 제가 여태껏 버틸 수 있었던 이유였어요.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아빠를 떠올려도 눈물이 멈출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하늘에서 보고 계셔도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가끔은 마음이 아파도 아직은 아빠를 잊지 않고 살고 있구나, 시간이 흘렀지만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은 여전하구나. 그냥 그렇게 느끼고 웃어주세요. 앞으로의 남은 제 인생에서 아빠의 모습은 그리워해도 마음은, 저를 아껴주시던 그 마음은 평생 잊지 않고 살게요. 아빠의 인생에 있어 마지막 소원이었던 엄마와 저의 행복. 비록 마지막 전화는 끝내 받지 못했지만 받았더라면 아빠가 꼭 하셨을 말씀 또한 그것이었을 거예요. 행복. 아빠 없는 세상에서 행복이란 꿈도 못 꿨지만 아빠가 떠난 후 생겨나는 작은 기적들이 아빠의 선물일 거라고 믿기에, 그리고 마음은 느 함께 한다는 것을 알기에 그 행복, 두려웠던 그 행복에게 손 내밀어 보려 합니다. 언젠가 납골당에 올라설 때, 아빠의 사진 한 장과 유골함이 있는 곳 앞에 설 때. 씩씩한 얼굴로 마주할 날이 오겠죠? 아빠, 아빠는 저에게 최고의 아빠였어요.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저한테 있어 아빠는, 가장 소중한 존재예요. 아빠의 표현하지 못한 사랑을 저는 알기 때문이에요. 아빠도 저의 그 마음을 깨닫고 갔으면 마음이 덜 아플 텐데 말이에요. 아빠! 저 아빠 몫까지 아빠의 바라대로 열심히 살고 갈게요. 낳아주셔서, 길러 주셔서, 아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아빠, 아빠 딸 예랑이가 많이 사랑합니다.
2016년 5월 2일, 아빠 딸 김예랑 올림
사랑하는 우리 엄마, 안녕하세요. 저 엄마 딸 예랑이에요. 유난히 춥던 어느 겨울날엔 깨지 않을 것 같던 개구리도 하나둘씩 깨어나고, 어느덧 오지 않을 것 같던 봄이 그렇게 왔네요. 작년 이 맘 땐, 모든 게 낯설고 새로웠어요. 학업을 위해 집과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처음 느껴본 독립. 어릴 때부터 외동으로 집에 혼자 있던 시간은 많았지만 일주일 내내 고향을 떠나, 엄마의 품을 떠나 생활한다는 게 처음에는 얼마나 그립고 외로웠는지 몰라요. 시간이 흐르면서 적응해나가며 버텨내 온 게 벌써 1년이 훌쩍 지났네요. 비록 원하는 만큼 좋은 성과는 거두지 못했지만 1년 동안 떨어져 생활하면서 엄마의 사랑, 가족의 소중함. 참 많이 깨달았어요. 그리고 엄마에 대해 참 많은 생각을 했어요. 저도 물론 낯설고 힘들었지만, 집에 홀로 남게 된 엄마의 심정은 어떨까 하면서요. 많이 외로우셨죠? 주말마다 내려갈 때만큼은 엄마한테 잘해야지 생각도 잘하면서도 마음처럼 쉽게 안돼서 늘 죄송해요. 잠깐잠깐 보는 것 마저 힘이 아닌 짐이 되고 있진 않은가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어요. 엄마, 저는 사실 좀 막막했어요. 아빠 일찍 돌아가시고 암 환자인 엄마마저 떠날까 봐. 혼자 기숙사에 누워있을 땐 그러한 생각들이 더욱 들어서 많이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밤마다 기도실을 의지하게 됐던 것 같아요. 하루하루 항암제와 싸우며, 먹여 살리겠다고 학원 일을 하며 쉬어가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을 땐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몰라요. 정말 방법이 이것뿐이라면 제가 엄마한테 더욱 힘이 되어드려야 할 텐데 말이에요. 과거에 엄마가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왔는지 알기에, 차라리 엄마의 병이 저에게 옮길 수만 있다면 엄마를 위해 희생하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더 흐르고 다시 떠올린 이 생각은 참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언젠가 TV를 보다가 어느 연예인이 그랬죠. 부모가 가장 행복할 때는 자식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때라고. 그때 저는 엄마의 병을 나한테 옮긴다고 해서 엄마가 행복해지는 건 아니겠구나 깨달았어요. 물론 제가 엄마의 육체적 건강은 치유해드릴 수 없지만, 마음의 건강은 치유해드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엄마를 가장 잘 아는 순금이 이모가 그랬거든요. 엄마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저이기에 저 하나가 엄마를 행복하게, 또는 불행하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여태껏 엄마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 드렸던 날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보니 정말 헛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엄마! 어릴 땐 몰랐는데 엄마가 저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를 크면서 많이 깨달아요. 겉으론 차갑게,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엄마가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더 그렇게 표현된다는 것을. 그게 엄마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방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어릴 땐 그게 엄마가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판단해서 서운하기도 하고, 다른 엄마들처럼 왜 안 그럴까 원망스럽기도 했거든요. 그래서 엄마의 표현에 더욱 집착하게 됐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젠 알아요, 내면의 진실을. 엄마, 아빠가 이혼하시기 전에도 많이 다투셨잖아요. 그때도 저는 이혼하신 게 엄마의 요구 때문이 크다고 생각해서 이혼하신 후에도 엄마를 많이 원망했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너무나도 어린 나이에 찾아온 가정의 해체는 너무나 충격이었거든요. 아빠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야 아빠가 엄마를 얼마나 힘들게 했었는지에 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고 엄마가 그런 아빠와 10년 이상 살아 버틴 이유는 오로지 저 하나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저 때문에 잃은 10년, 제가 몇 배의 행복으로 꼭 갚아드릴게요, 엄마. 가끔은 아빠가 없고 엄마까지 아픈 이 세상이 너무 막막하고 싫었지만, 제게 살아가는 이유이자 희망은 엄마에게 기회가 있다는 것이에요. 아빠에게는 놓쳐버린 그 기호. 제가 한 번 더 효도할 수 있고, 한 번 더 바라볼 수 있다는 기회. 아직 철이 없어서인지 그것을 알면서도 익숙함에 속아 또 한 번 소중함을 잊게 돼요. 엄마한테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하고 절실한지 알면서도 내일이 되어도, 모레도 오늘과 같을 거라는 착각 속에서요. 엄마가 아픈 티를 내지 않고 항상 씩씩한 모습만 보여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겉으론 그래도 많이 아프고 힘드셨죠? 티 안내서 아무도 모를 때, 정말 괜찮은 줄로만 알 때 저 하나라도 알아차리고 힘이 되어 드려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죄송해요. 엄마는 제게 항상 최고의 엄마이고, 든든하고, 어디 가서 우리 엄마라고 떳떳하게 자랑할 수 있는 그런 존재인데 저는 과연 엄마한테 그런 딸이 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엄마! 엄마는 늘 제가 먹고 싶은 거, 입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다 해주시잖아요. 저소득층 가정에 속하지만 저한테는 늘 아낌없이 주셔서 저는 우리 집이 그렇게 가난하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입지 않는 옷들을 버리려고 두면 엄마는 꼭 챙겨두었다가 엄마가 입으시고, 저는 비싼 메이커 신발 사주시면서 엄마는 시장에 파는 3만 원 채 안 되는 운동화 신으시고, 제가 먹다 남긴 밥과 국은 식어도 아깝다며 꼭 드시던 우리 엄마. 언젠가 저에게 그러셨죠. 초등학생 때 반에서 가장 먼저 스마트폰을 사주신 것은 절대 부유해서가 아니라 기죽지 마라고. 가난해서 친구들은 다 해보는 거 혼자 못해서 기죽는 거 엄마는 보기 싫다고 어릴 적의 엄마도 그랬기에 딸인 저는 안 느꼈으면 좋겠다는 우리 엄마. 제가 편하게. 조금은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건 그런 엄마의 희생 덕분이었습니다. 엄마를 위해 쓰는 돈은 아까워도 저에게 쓰는 돈은 아깝지 않다던 우리 엄마! 단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저보다 엄마 자신을 더 사랑했으면 좋겠어요. 가끔은 비싸더라도 먹고 싶고 하고 싶은 것도 해보고, '엄마'로서의 삶이 아닌 '여자'로서의 삶도 즐겼으면 좋겠어요. 물론 지금은 제가 고등학생이다 보니 나가는 돈이 많아 힘드시겠지만 곧 졸업하면 좋은 직장 구해서 엄마가 그런 행복한 삶을 즐길 수 있도록, 꼭 보답할게요. 엄마, 우리 꼭 행복해요. 힘들었던 만큼, 어두웠던 만큼. 언젠가 하나님께서 세워주실 날이 올 거예요, 반드시. 믿어주셨던 만큼 앞으로도 조금만 더 믿어주세요. 아직 학업에 있어 바라는 만큼의 성과는 거두지 못해도 요즘 많이 노력하고 있으니까요. 엄마, 힘들어도 저 포기하지 않고 오늘날까지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를 낳아주신 분이 엄마라서, 제가 엄마의 딸이라서 행복합니다. 뱃속에서 힘들게 낳아주신 만큼 엄마의 자랑스러운 딸이 될게요. 우리 엄마! 제가 많이 사랑합니다.
2016년 5월 4일, 엄마 딸 김예랑 올림
2016 대한민국 편지쓰기 공모전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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