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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지한줄 Feb 11. 2022

무명 앞치마를 두른 농부 할머니에게

일반부 장려상 - 김현주

무명 앞치마를 두른 농부 할머니에게


꽃송이 지나간 자리마다 초록의 잎사귀들이 무성하게 장대비를 맞고 있구나. 

어떤 첫인사를 나누어야 미래의 나에게 다정함을 전할 수 있을까?


그동안 잘 지냈니. 30년 도시 생활을 접고 지긋지긋했던 과거와 헤어지는 선택을 했었지. 그래도 오십은 젊은 나이였는데. 갑자기 나타난 고집 센 도시 아줌마를 곱게 봐줄 넉넉한 시골은 어디에도 없었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농사일은 육체를 힘들게 했지만 영혼에게는 자유를 주었지.  사는 집과 농사지을 밭이 멀어서 힘들었는데, 이사는 했겠지? 흰머리 염색을 하지 않는다고 동네 할머니들의 잔소리를 항상 들었었는데, 은빛 물결 닮은 백발이 되었겠구나. 


제일 먼저 감자를 심고, 여주도 심고 오이와 단호박도 심었었지. 친환경 농사를 짓는다며 봄날 내내 잡초를 뽑았었는데, 뽑아도 뽑아도 며칠 후면 풀들이 무성했지. 살아도 살아도 평화롭지 않았던 내 삶을 닮은 것 같아서 서글펐었는데. 여주의 잎사귀들이 초록의 동굴을 만들면 그 아래서 땀을 식히곤 했지. 그때마다 길가의 이팝나무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리곤 했어. 낯설고 힘겨운 노동의 시간이었지만 조금씩 조금씩 발걸음이 가벼워졌단다. 아주 천천히.


그늘이 일찍 찾아오는 나지막한 산자락에 작은 집을 짓고 살고 있겠지. 울타리가 없는 낮은 집 앞에 골고루 씨앗을 뿌리고, 남편이 좋아하는 고야 나무도 심었겠구나. 봄부터 가을까지 빼곡하게 채소를 키우고 산에서 열매들을 따다가 청을 만들어 두고 싶었는데 잘해 놓았겠지? 어쩌다 지나는 이웃들에게 소박한 쌈채소를 나누고 차 한잔 마시곤 하겠지. 서툴고 고단했던 오십을 지나 20년을 더 살아 보니 어떠한지 궁금하구나.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졌을까. 


처음을 알 수 없으니 마지막 가는 곳도 알 수 없는 삶,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겨우 알아 가고 있겠구나. 그 쓸쓸함 속에서 한결같이 함께 한 남편과 두 아이, 다정한 친구들과 이웃들에게 야박하지 않은 사람으로 살고 있으리라고 생각해. 우리는 혼자이기도 하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여전히 믿고 있겠지? 단풍잎 같은 작은 손을 가진 손주들과 함께 있다면 좋겠구나. 자식에게 마음을 다 주지 못한 것 같아서 늘 미안한 엄마였는데, 손주들이 곁에 있다면 온 마음을 다 주고 싶구나. 꽃 같은 아이들이 너의 무명 앞치마 품으로 안기어 오는 상상을 해본다. 그 보드라운 얼굴을 어서 두 손으로 감싸고 싶단다.


문득 다시 쓸쓸한 시간이 오더라도 잊지 말아 줘. 우리는 아주 가늘고 긴 시간으로 서로 촘촘하게 이어져 있다는 것을 말이야. 단정하고 성실한 기다림 만이 우리에게 그 이어짐을 허락한다는 것을 명심하렴. 불안한 등불 하나 켜고, 지나온 날들을 잘 견디어 주어서 고맙고, 바람 부는 날이 다시 오더라도 우리의 이어짐을 기억하자. 


다정한 얼굴로 다시 만날 그날을 기다릴게.

농부 할머니, 그럼 안녕. 


2021년 8월 25일 쉰둘의 현주가




2021 대한민국 편지쓰기 공모전 수상작

일반부 장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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