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내게 특별한 존재였는지는 알 수 없다. 눈에 밟히는 후배였다고 하자. 내겐 그에 대한 사소한 기억이 몇 가지 있다. 그는 우선 시를 잘 썼다. 그가 쓴 작품은 매우 좋았다. 잘 쓰는 만큼 읽는 눈도 뛰어났다. 어떤 좋은 작품을 읽을 때면 그게 왜 좋은지도 술술 풀어놓았다. 분석적 사고를 훈련한 결과라기보다는 태생적인 재능과 최근 경향에 대한 민감함, 다양한 방면의 독서 등 여러 가지가 합쳐져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직관 같은 거였다. 그래서 나는 작품을 쓴 다음에는 정말 별거 아니라는 듯 그에게 작품을 내밀었다. 그가 뭐라고 말하는지 듣기 위해 아닌 척 귀를 기울이려는 거였다.
이미 그때도 문예지를 손에 들고 다니면서 읽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적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늘 손에는 크고 작은 출판사에서 발행한 문예지가 들려 있었다. 게다가 그것들은 도서관에서 대여한 것이 아니라 직접 구입한 것이었기에 시를 좋아하는 그의 마음이 한편으로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내가 그것을 열정이라고 표현하지는 않는 이유는 그가 그다지 열정적으로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학과에서 개설한 시 창작 수업은 밥먹듯이 빼먹기 일쑤였고, PC방이나 어느 선배의 자취방에 틀어박혀 게임을 하거나 시를 읽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적어도 그에게는 게임과 시가 동급인 것처럼 보였다. 시에 소망투사를 하고 스스로의 욕망을 앞세우는 나와는 달리 시를 대하는 데 있어서 어떤 천진함이 그에게는 있었다.
한편 그는 시에 대한 메모를 아무 데나 하는 버릇이 있었다. 읽던 책의 맨 뒷장 혹은 앞장 같은 데에다가 아무렇게나 휘갈겨 썼다. 내가 그의 책을 들춰보다가 책과 상관없는 메모를 발견하여 무엇인지 물었을 때 자신은 메모를 그런 식으로 한다고 했다. 무언가 생각이 나면 일단 어디엔가 적어두긴 하는데 관리를 안 하는 습관 탓에 어디에 무얼 얼마나 메모했는지 본인도 잘 모른다는 거였다. 나는 말문이 막혀서 한숨이 나왔다.
사실 그의 결여는 메모뿐만이 아니었다. 술에만 취하면 지가 뭐라고 자꾸만 골든벨을 울려서 술자리에서만큼은 인기가 짱이었다든지, 좁은 골목을 지나가다가“남자는 어깨 피하는 거 아니다”라는 친구의 도발때문에 마주 오는 사람과 어깨를 부딪쳐서 아닌 밤중에 괜히 몽둥이 찜질을 받는다든지, 빨간색 탐스 신발을 사서 몇 번 신고는 자취방 앞에다가 내버려두어서 비바람에 색이 바랐지만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든지. 생각해보면 그가 별로인 이유는 많았다. 하지만 나는 그의 뛰어난 재능이나 명석한 머리와는 어울리지 않게 그처럼 결여를 통해 드러나는 허술하고 인간적인 면모가 좋았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학교를 그만두었다. 자유분방한 성정 때문에 학교생활에 애를 먹긴 했지만 자퇴까지는 예상해본 적이 없어 무척 의외였다. 뜬금없이 종적을 감춘 그에게 나는 안부 전화를 걸었다. 그는 충무로에 있다고 했다. 우연히도 그 근처를 지나가던 중이라서 나는 충무로역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검은색 백팩을 매고 언제 빨았는지 감도 잘 안 오는 더러운 후드를 입고서 내 앞에 나타났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당장 오늘 밤 잠을 잘 곳도 없는 상황이었다. 또다시 한숨이 나왔다. 나는 그를 집으로 데려왔다.
그는 개인적인 이유로 학교를 그 만두고 당분간 일을 하기로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마침 겨울이었기 때문에 스키장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두 달이 채 안 돼 일을 때려치우고 서울로 와서 차마 집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던차에 내가 전화했다는 것이다. 그는 검은색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옷보다도 책이 더 많이 들어 있었다. 그중에서 사라 워터스가 쓴『핑거 스미스』를 꺼냈다. 이런 상황에서도 책을 읽겠단 얘기였다.
“일단은 집으로 들어가야겠죠.”
그는 책을 펼치며 그렇게 말했다. 혹시 문장이나 단어가 이 녀석의 정신에 침투해서 신경안정 작용 같은 걸 일으키는 건 아닐까. 그는 책을 읽으면서 나의 질문에 대답을 하다가 다시 책을 읽어 나가기를 반복했다. 모양새야 어찌 됐든 우리는 모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동안 써두었던 시를 슬쩍 그에게 내밀고는 컴퓨터 화면을 보며 지나가는 말처럼 어떠냐고 묻는 것도 나는 잊지 않았다. 그렇게 하룻밤을 집에서 재우고 아침을 먹여 그를 돌려보냈다.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집으로 들어가야겠다는 그의 말뿐이었다.
그는 워낙 낙천적인 녀석이라 어떤 환경에서도 나름대로 잘 적응하며 살아갈 것이라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여전히 빨지도 않은 옷을 입고, 최근에 발행된 문예지를 사서 읽는 중일지도 모른다. 한 선배가 녀석 자신을 얼마나 아꼈는지 알아주든 몰라주든 크게 개의치 않는다. 나만 좋으면 장땡이니까. 누군가를 생각한다는 건 보통 그런 거니까.
다만 그에게 작은 바람이 있다면 메모는 꼭 노트에 하고 뭐가 묻으면 옷은 자주 좀 빨아 입기를. 신발은 비 맞도록 내버려두지 말고 귀찮더라도 안으로 꼭 들여놓기를. 신난다고 주머니 사정 생각도 안 하고 내가 쏜다고 함부로 선언하지 않기를. 친구가 옆에서 뭐라고 그러든 누군가와 시비가 붙을 것 같으면 자존심이 상해도 먼저 고개를 숙이고 가던 길을 가기를 바랄 뿐이다. 어쩌면 녀석은 이미 저 혼자 그렇게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