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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본부 Jun 27. 2021

[09] 확대/축소 도구5 : 원고

디즈니, 픽사, 지브리 작품으로 보는 애니메이션 시나리오의 구조

초고

초고에 돌입하기 직전 단계까지 무르익은 트리트먼트는 20-30페이지 정도의 분량에 도달해 있을 것이고, 자세한 기술을 좋아하는 창작자라면 그보다도 훨씬 초과하는 분량을 이미 확보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 초고 단계로 들어갈 차례입니다. 만약 충분히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를 테면 5페이지 정도의 시놉시스만 가지고 초고로 바로 진입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한 편의 이야기는 잘 세공된 하나의 조각과도 같습니다. 20-30페이지 분량에 달하는 트리트먼트라는 것은 페이지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창작자가 그 정도 페이지수를 할애해야 할 정도로 이미 많은 행동들을 발견하고 세공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30페이지 짜리 트리트먼트를 초고로 발전시킬 때와 5페이지 짜리 트리트먼트를 초고로 발전시킬 때 똑같은 공력과 시간을 투입한다면 당연히 30페이지 분량의 트리트먼트를 발전시킨 원고가 더 좋을 것입니다. 트리트먼트 단계에서 많은 행동과 감정, 개연성 등을 발견할수록 초고의 퀄리티는 높아집니다.


모든 초고는 걸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점에서 "모든 초고는 걸레다" 라는 헤밍웨이의 말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작품을 일단 끝을 내야만, 작품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결함이 비로소 객관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완성 후 시간이 많이 지날 수록 자신의 작품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은 올라갑니다) 작품이 아무리 완전무결한 것처럼 보여도,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야기의 개연성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더라도, 기획의 측면에서, 컨셉의 측면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비로소 본격적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저는 소설을 한 편 쓴 적이 있습니다. 멋진 한 편의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완성하고 보니 그 이야기의 클라이막스는 소설보다는 영화에 어울릴 법한 것이었습니다. 어처구니 없어 보일지 몰라도 이런 일은 창작 과정에서 흔하게 일어납니다. 작품이 완성되어야만 본질적인 문제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죠. 방법은 다시 쓰는 것 뿐입니다.


다시 쓰기의 괴로움

이야기는 시놉시스 단계에서 리부트되어 시놉시스로 돌아가기도 하고, 시나리오 단계에서 시놉시스로 되돌아가기도 합니다. 그런 일은 흔히 있으며 필수적인 일입니다. 이런 상황에 처하면 괴롭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게 상업 현장에서 일하는 시나리오 작가가 하는 일의 전부라고 해도 될 만큼 업무 스트레스의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협업이라는 옵션까지 더해지면 너무나 세세한 변수들이 생기기 때문에 저는 따로 <협업하는 글쓰기>라는 시리즈로 협업의 여러 애로사항들에 관해 다루려 합니다. 이 책에서는 시나리오의 구조에 관해서만 다루는 만큼 투정은 이정도로 하고 다시 본래의 논점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시나리오 쓰기의 실제

시나리오는 대사와 지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상황은 지문으로, 말은 대사로 표현하면 됩니다. 이게 시나리오를 쓰는 방법의 전부입니다. 카메라와 사운드에 대한 직접적인 용어를 최대한 자제하고, 평행 구성으로 이루어진 장면이나, 여러 시공간을 꿰는 하나의 장면을 구분하는 씬넘버 칸을 최대한 간단하게 표현한다는 원칙만 지킨다면, 그 안에서 마음껏 작업해도 상관 없습니다. 훌륭한 시나리오 작가들이 쓴 시나리오를 세 편만 읽어 보십시오. 대번에 감이 잡힐 것입니다. 대사는 쓰기 전에 말로 한 번 내뱉어볼 것, 즉 구어체를 쓸 것, 지문은 한 문장이 한 행을 넘기지 않도록 조절하는 연습을 하라는 것이 마지막 조언입니다.


다시, 전환점

시나리오라는 양식으로 이야기를 얹히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트리트먼트 단계까지 성실하게 이야기를 발전시켰다면 스스로가 깜짝 놀랄 정도로 매우 간단한 작업입니다. 시나리오 단계에서 창작자가 정작 투입해야 할 공력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이야기에 배치된 전환점의 전반적인 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입니다.

전환점은 이야기의 코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중요한 개념입니다.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상황이 바뀌었다는 것은, 곧 흥미로운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120분 분량의 시나리오에 40개의 전환점이 있다고 했을 때 40개의 전환점이 모두 이런식이라고 한다면, 엄청나게 재미 있는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이야기의 개연성을 맞추고 의미를 확보하며, 감정을 깊게 전달하는 데 신경을 썼다면, 이제 그것을 바탕 삼아서 장면의 코어인 전환점을 날카롭게 만드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전환점의 준비

먼저 전환점이 발생되기까지는 장애 요인이 장면의 주인공에게 압력을 가해야 합니다. 이 압력이 강해야만 전환점의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습니다. 만약 키키가 잃어버린 마법 능력을 자다 깨서 준비운동 하는 과정에서 되찾는다면 이야기가 어떻게 될까요? 김이 팍 새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 형성된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마을에 정착해서 사귀게 된 친구 톰보가 크게 다칠지도 모르는,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천만한 상황이 닥치고, 그 상황 안에서 키키는 마법 능력을 되살려냅니다. 이처럼 장면의 주인공에게 가해지는 압력이 크면 클수록 전환점의 효과는 커집니다.

또는 주인공이나 감상자가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순간에, 예측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전환점이 찾아올수록 그 충격은 커집니다. <모아나>의 클라이막스 장면을 보겠습니다. 모아나는 테 카라는 악마가 자신이 그토록 찾던 테 피티의 심장의 주인 테 피티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모아나는 충격을 받고, 감상자 또한 그러한 모아나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낍니다. 이제 모아나가 테 카에게 테 피티의 심장을 줌으로 인해 테 카가 테 피티로 되돌아오는 모습이 클라이막스입니다. 뜻밖의 상황으로 인물을 이끄는 것이 클라이막스의 효과를 배가시키고 있습니다.


전환점은 곧 사건

장면은 인물의 행동과 반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장면 안에 포함된 모든 행동과 반응은 사건입니다. 그것이 크든 작든, 전에 없었던 일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유의미한 변화가 생겼다면 그것은 곧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사건마다 크기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사건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장면을 구성하는 여러 사건들 가운데 가장 큰 변화를 나타내는 지점이 곧 전환점입니다. <마녀 배달부 키키>의 #1의 전환점은 들판에 누워 있던 키키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행동입니다. #2의 전환점은 키키의 엄마가 토라 할머니에게 마녀가 될 아이는 13살이 되면 수련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리는 행동입니다. #3의 전환점은 짐을 싸던 키키가 아빠에게 오늘 밤 수련을 떠날 것이라고 알리는 행동입니다.


장면을 통한 창작자의 목적

장면의 주인공이 장면 안에서 나름대로의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창작자는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장면을 설계합니다. 장면의 주인공이 목적을 드러내는 것이 장면의 초반이라면, 그 주인공이 경험하는 변화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 창작자의 목적입니다. 이처럼 장면은 인물의 목적과 창작자의 목적이라는 두 다리로 자신을 지탱합니다. 창작자는 자신의 시나리오를 검토할 때 이 점을 반드시 검토해야 합니다. 장면 안에서 장면의 주인공이 행동하는 동기가 무엇인가, 그리고 장면의 마지막에 장면의 주인공이 경험하는 변화가 무엇이며 그것이 창작자가 장면을 통해 표현하고자하는 핵심이 맞는가를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앞 장면에서 이미 발생했던 사건의 동어 반복이라면 삭제해야 할 것입니다. 순서를 생각했을 때 앞 사건과 배치를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된다면 그렇게 해야 할 것이고, 맥락을 형성하려면 추가적인 사건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새롭게 사건을 구성해서 적절한 곳에 배치해야 할 것입니다.


확대/축소 도구의 활용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전체를 조망해야 하거나, 디테일한 부분의 합을 정교하게 맞출 때 각각 필요한 도구가 다릅니다. 필요에 맞게 확대/축소 도구를 능숙하게 활용해서 아름답고, 재미도 있고, 안정적이기까지 한 설계도를 잘 완성하시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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