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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 엄마 Jan 30. 2024

자아를 찾아서 '내면 여행'

자아는 인류의 질병이라고?

     

21세기를 대표하는 영성가 에크하르트 톨레(Eckhart Tolle 1948~)는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A New Earth)』(2005)에서 ‘자아(에고, ego)’를 ‘가짜 나’로 정의한다. 그는 에고를 허구이며 인류의 오랜 질병이라고 단정한다. 툴레에 따르면, 에고에 사로잡힌 정신 질환자가 된 인류는 진정한 자아, 순수의식을 회복해야 치유될 수 있다. 이 일은 에고가 ‘가짜 나’ 임을 아는 앎, 그 깨달음에서 시작되는 내면 여행을 통해 가능하다. 에고가 만든 고통체의 힘을 부수고 지구 행성의 폭력, 갈등, 고통을 끝내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톨레가 말하듯 에고란 단순히 허구이고 단순히 질병이기만 할까? 내가 ‘나’라고 여기고 있는 이미지, 그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인문학 실험실 「루바토(Rubato)」의 세미나 「자아 연출의 시대와 예술」에서 분석 심리학, 뇌과학, 사회학에서 정의하는 자아, 그리고 소설 속 개인의 자아를 고루 만났다. 각 분야별 관점에서 본 자아는 하나로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공통분모는 있다. 자아는 분열의 위기를 겪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고 조화롭게 살기 위해 부단히 지향하는 지향점이 있다는 게 그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칼 구스타브 융(Carl Gustave Jung 1875~1961)



칼 구스타브 융(Carl Gustave Jung 1875~1961)에게서 자아는 ‘나를 구성하는 외피’에 지나지 않는다. 자아의식이라는 딱딱한 땅 아래엔 거대한 무의식이 있고, 무의식에는 콤플렉스가 입주해 있다. 자아의식, 무의식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림자, 자기, 원형, 리비도, 집단 무의식이 자아의식과 무의식을 켜켜이 둘러싸고 있다. ‘나’는 이렇게 거대한 덩어리이다. 머레이 스타인(Murray Stein 1943~ )이 쓴 『융의 영혼의 지도』를 따라가다 보면 자아를 과학적으로 규명하려고 독하게 노력한 융의 모든 여정에 함께하게 된다, 융이라는 블랙홀에 빠진다.


그런가 하면 어빙 고프만(Erving Goffmann, 1922~1982)에게서 자아는 ‘공연하는 페르소나들’이다. 자아는 여러 개의, 아니 수천 개의 페르소나를 갖고 있다. 어빙 고프만의 『자아연출의 사회학』(1959) 은 우리 인간이 페르소나의 세계만으로도 얼마나 복잡다단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객관적으로 담담하게 보여준다. 


데이비드 이글먼(David Eagleman, 1971~)의 『더 브레인』(2015)에서는 또 어떤가. 뇌과학 세계에서 자아는 뉴런들의 연결망, 뉴런들의 배열에 지나지 않는다. 뇌 속 물질들이 계속 변화하기 때문에 자아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이다. 가정, 문화, 친구, 직업, 대화, 이러한 나의 경험 하나하나가 내 뇌의 물리적 구조를 바꾸고 있다. 뇌과학으로 고찰한 자아의 상황은 어빙 고프만이 사회학적으로 고찰한 페르소나의 자아 연출과 같은 맥락에 있다. 다만 그 연출 장소가 뇌 속인가 뇌 바깥 사회인가만 다를 뿐 서로 통한다.     


 나의 뇌 활동에서 ‘의식적인 나’는 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나의 행동, 믿음, 편견은 모두 나의 뇌 연결망들에 의해 조종되는데, 나는 그 연결망들에 의식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 그러니까 그 연결망들은 나의 무의식 지대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융의 분석심리학을 뇌과학으로 조명해 볼 때 융이 말하는 무의식, 그림자(Shadow), 자기(Self) 등도 모두 뇌의 연결망들의 작용들이 아닐까.


뇌과학에서 자아의 활로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몸과 뇌의 상호소통에서 미래로 나아갈 활로를 찾는다. 그리고 두 번째는 타자의 뇌와 상호작용하는 것에서 더 나은 활로를 찾는다. 자아는 맥락에 따라 다른 사람, 다른 자아가 된다. 환경과 상황에 따라서 말이다. 그래서 더 나은 미래를 원한다면, ‘너 자신을 알라’에서 그치면 안 된다. 뇌과학적으로는 ‘나 자신을 아는 것뿐 아니라 다양한 나 자신들을 모두 아는 게 중요하다.’ 아마도 융은 이러한 뇌과학적 명제를 앞서 실천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다양한 나 자신들’을 꿈, 환각, 환상, 신경증상, 발작증상 등을 통해 과학적으로 철저하게 분석하고 경험적으로 이론화했다.     



내 자아의 심리적 나이는 몇 살일까?     


융은 심리학적 수명 이론을 다룬 최초의 인물이었다. 심리 발달은 중년과 노년기를 포함해 어떤 나이에서도 이뤄질 수 있다고 보았다. 성격의 완전한 발현과 표명은 전 생애에 걸쳐 펼쳐지며, 자기(Self)는 여러 발달 단계를 통해서 서서히 드러난다. 실제로 현실적 삶에서 ‘이상적’ 심리 발달이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현대 문화 속에서 인간은 페르소나에 기초한 집단 문화에 지배되기 때문에 개인 문화인 내면 성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내면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대부분은 매우 원시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다. 중년기처럼 자아가 페르소나와 아니마/아니무스의 갈등으로 찢겨졌을 때에야 비로소 내면 성장을 위한 시급한 이슈가 제기되고 내면을 심각하게 고려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신경증이 발생한 듯 보이겠지만, 향후 개성화(Individuation)를 위한 요청, 그리고 개인의 성장 과정에서 내부에 이르는 심층 여행을 위한 준비 과정이 될 수 있다.      


융은 ‘긴 연속적 꿈의 상징으로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표현하는 무의식 과정’을 ‘개성화 과정’이라고 불렀다. 개성화는 우리 삶의 전반부에서 성취되는 자아와 페르소나의 발달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는 의식과 무의식의 결합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심리적 통일성을 성취하는 문제이다. 


인생 후반기에 일어나는 이러한 인식의 발전 단계는 탈근대적 단계이기도 하다. 근대성의 단계란 모든 투사가 급격히 소멸하고 텅 빈 중심을 창조하는 단계이며, 인간은 영혼을 찾아 나서고 자아는 급격히 팽창해 전능한 신의 위치를 차지하는 단계이다. 근대를 초월하고 대체하는 탈근대적 단계에서는 자아의 한계가 의식적으로 인식되고, 무의식의 능력이 감지된다. 그래서 초월적 기능과 통합하는 상징을 통해 의식과 무의식의 연합 형태가 가능해진다.     


만년에 융은 물질과 정신 모두를 포괄하고 시간과 영원의 다리를 놓아 단일 통일 체계를 지향하는 이론을 제시한다. 이것이 바로 동시성(Synchronicity) 이론이다. 동시성은 ‘그 사이에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으나 같거나 비슷한 의미가 있으며, 또 시간적으로 일치된 상태에서 일어나는 둘이나 그 이상 사이의 사건들’을 지칭한다.  동시성 이론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심원한 질서와 통일성이 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는 무의식의 앎의 주체가 작동하는 것으로 신의 눈이 개안하는 것과도 비교될 수 있다. 어떤 절대적 지식이 무의식에 존재한다는 동일한 관념이 투사한 형태다. 동시성은 의식 수준이 알파 상태라고 부르는 정도에 있을 때 자주 일어난다. 자기(Self)이론을 우주론으로 확대한 것이다.


인생이라는 유희그리고 웃음!    

 

이제 헤르만 헤세(1877~1962)의 소설 『황야의 이리』(1927)로 돌아가 보자. 주인공 하리 할러는 교양을 갖춘 지식인 ‘하리’라는 자아와 카오스적인 내면 ‘황야의 이리’로 분열된 50대 남자이다. 이 정신분열의 질병은 하리 할러 한 사람의 개인적인 위기가 아니라 시대의 병리 그 자체이고 할러가 속한 세대의 노이로제이다. 인류의 정신 질환이다. 하지만 하리는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넘나들며 기나긴 고통의 과정을 겪은 후 ‘온몸이 텅 비어 버린 느낌’ 속에서 모든 것을 이해한다. 그리고는 인생이라는 유희를 긍정한다. 파블로와 모차르트라는 두 이름으로 표상되는 두 세계를 받아들이고 새롭게 살아보고자 희망을 품는다.


"인생이라는 유희의 수십만 개의 체스 말이 모두 내 주머니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충격 속에서 그 의미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다시 한번 그 유희를 시작해 보고, 다시 한번 그 고통을 맛보고, 다시 한번 그 무의미 앞에서 전율하고, 다시 한번 더 내 마음속의 지옥을 이리저리 헤매고 싶었다. 언젠가는 체스말놀이를 더 잘할 수 있겠지, 언젠가는 웃음을 배우게 되겠지, 파블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차르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야의 이리, 민음사, 303쪽) 

     

자아를 파헤치는 테마 독서를 마무리하며 인생 후반기란 ‘나를 찾아가는 나만의 내면 여행’을 떠날 때라고 깨닫는다. 그 ‘나’는 수천 개의 페르소나가 아닌 ‘자기(Self)’로서의 ‘나’이겠지. 무의식이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표현하는 개성화 과정의 여행 말이다.  때로는 융의 분석 심리학이 필요하겠고, 때로는 어빙 고프만의 방식, 때로는 데이비드 이글먼의 방식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때 여행에 필요한 장비, 장착해야 할 무기는 뭘까. 파블로와 모차르트가 하리 할러에게 조언한 ‘유희 정신’과 ‘웃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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