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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 엄마 Apr 27. 2024

폴 발레리와 잠자는 숲 속의 공주


폴 발레리(1871-1945)는 1891년 6월 15일  문학지 『황금 매미(La Cigale d’or)』에 시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발표한다. 이 시는 1920년 『옛시 앨범 (Album de vers anciens)』에 「잠자는 숲에서」라는 제목으로 개작되어 세상에 다시 나타난다.    


잠자는 숲에서      

공주는 순수한 장미의 궁전에서,

속삭임 아래, 움직이는 그림자 아래 잠잔다,

산호빛 모호한 말 한마디를 중얼거린다.

길 잃은 새들이 그녀의 금반지를 깨물 때.     


그녀는 듣지 못한다.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도

텅 빈 한 세기 동안 멀리서 보물이 울리는 소리도,

아득한 숲 위에서 피리 소리 녹은 바람이 

뿔피리의 한가닥 웅얼거림을 찢어버리는 소리도,     


메아리는 길게 퍼져 다이애나를 계속 잠들게 하라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네 감은 두 눈을 때리는

부드러운 넝쿨 장미를 닮은, 오, 그 모습 그대로,     


네 뺨에 그토록 가깝고, 그토록 느린 장미 송이도

거기 내려와 앉은 햇살에서 은밀히 느끼는

이 주름진 기쁨을 흩뜨리지 못하리.     


수면의 시 - 정신의 부재와 자연과의 합일


폴 발레리의 시대는 할리우드 영화나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감상하던 시대가 아니다. 샤를르 페로(Charles Perrault)의 동화로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접하던 때이다. 페로는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비롯해 「신데렐라」, 「빨간 모자 쓴 소녀」 등의 구전 이야기들을 세계 최초로 문자 텍스트화해 『교훈을 곁들인 옛이야기』(1697)를 펴낸 작가다. 이 책은 동화(conte) 장르의 출발이 된다. 


페로의 공주와 폴 발레리의 공주는 무엇이 다를까? 아주 다르다. 공통점은 공주가 잠자고 있고 궁전과 숲이 함께 잠자고 있는 것뿐이다. 발레리의 공주는 스토리가 모두 제거되어 있는 공주. 그러나 독자 역시 그 정체성을 잘 알고 있는 허구의 인물이다. 이 시는 발레리가 쓴 수면의 시들 중 하나이다.

 

시 전체가 공주의 수면을 나타낸다. 그러나 공주는 분명하게 실재한다. 시의 도입부부터 공주는 시의 중심요소이다. 손가락에 낀 금반지들로 드러난 공주는 점차로 뺨,  감은 두 눈, 눈까풀 주름 등의 형상이 주어진다. 청년기 시에서 궁전의 모호한 그림자 속에 녹아들고 지워지고 달아나는 듯한 무대는 성년의 시에서는 공주와 숲 배경이 함께 녹아드는 분위기로 변한다.  


공주의 수면은 관습 세계에서 멀리 있다. 삶의 극단이어서 죽음과 가깝다. 그러나 무덤 속 죽음의 세계가 아니다. 공주는 산호빛 입술, 숨소리로 죽은 여자가 아니라 생명이 있는 잠자는 여자임이 드러난다. 감은 두 눈, 뺨, 손가락에 낀 금반지들이 공주의 형상을 전할 뿐이다. 잠자는 숲 어딘가에서 새가 날아와 공주의 금반지를 깨물고, 종소리, 바람소리, 피리소리, 중얼거림, 웅얼거림 등 다양한 소리의 파편들이 공주의 수면을 침범한다. 결국 잠의 세계는 생각보다 고요하고 평화롭지 않다. 


발레리에게서 수면은 정신의 부재 속에 있다. 명석한 의식이 아닌 상태이다. 의식의 또 다른 차원이다. 그러니까 알 수 없는 세계이다. 그래서 웅얼거림 같은 불분명한 소리, 파편화된 소리는 자아를 인식하며 깨어나는 첫 지표들이 된다. 잠자는 여자가 이토록 역동적일 수 있을까. 결국 살아 있는 주체가 의식이 제거된 채 완벽하게 자연의 상태에 있는 게 수면이다.  새와 장미라는 외부의 사물은 공주의 잠을 훼방하지 못하고 공주와 조화를 이룬다. 감은 눈의 눈꺼풀에 내리는 햇살 또한 공주와 외부 세계의 충만한 합일을 상징한다.   공주는 잠자고 있으나 살아있는 존재이다. 숲 역시 잠들어 있으나 역동적인 공간이다. 죽음에 가깝고 삶에서 멀지만 생생하게 움직이는 시공간을 생생하게 드러낸 시이다.   


깨어나면 인식의 모험이 시작될 것이다


잠자는 공주는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육체이다. 그러나 살아있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소리를 낸다. 숨소리이거나 잠꼬대이겠지. 발레리는 그 소리를 ‘모호한 말(parole obscure)’이라고 표현한다.  듣지 못하는 눈 감은 공주를 둘러싸고 다양한 소리들이 있다.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멀리서 보물이 울리는 소리, 바람이 뿔피리의 한 가닥 웅얼거림을 찢는 소리. 소리들은 공주의 잠재태(潛在態)들이다.  날아와 공주의 반지를 깨무는 새, 온갖 모호한 소리들이 부유하는 공간은 내적 세계의 알려지지 않은 장소들이다. 깨어난 의식은 그 세계의 흔적을 꼬리처럼 물고 질문을 계속 던질 것이다. 자신의 내면적 세계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게 될 것이다.    


발레리의 공주는 페로의 동화에서처럼 백 년 동안 잠자고 난 후 깨어나서 왕자의 아내가 되는 여자가 아니다. 발레리의 공주는 깨어나서 “누가 울고 있는가? 거기, 단지 바람이 아니라면?"라고 질문할 젊은 파르크를 예고한다. 수면은 죽음과 아주 가까운 듯 하지만 사실은 삶의 극단이다. 관습적인 일상적인 세계에서 멀리 떨어진 세계이다. 이 삶의 극단에서 새로운 질문은 시작된다.  1.2연에서 3인칭 ‘그녀’이던 공주는 3,4연에서 2인칭 ‘너’로 가까운 존재가 된다. ‘너’는 곧 ‘나’의 이면이다. 잠자는 공주는 나의 잠든 의식세계를 구현한다. 나의 잠자는 자아이다.  잠에서 깨어난 후에 인식의 모험을 시작해야 한다.  왕자와 결혼할 운명이 아니다. 자아의 분열을 겪고 삶을 향해 다시 일어서는 젊은 파르크의 운명을 간다.  발레리의 수면의 시들은 잠에서 깨어나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젊은 파르크의 프리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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