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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 엄마 May 26. 2024

폴 발레리와 세자르(César)

     

프랑스의 가장 권위 있는 국내 영화제는 「세자르 영화제」이다. 이 영화제명은 프랑스의 천재 조각가 세자르 발다시니(César Baldaccini 1921-1998)의 이름에서 따왔다. 영화제의 수상자들에게 수여할 트로피를 조각가 세자르가 만들면서 영화제 이름도 세자르가 된 것이다. 그는 국민 조각가 반열에 있는 예술인으로 대중 인지도가 높은 스타였다.      


폴 발레리의 시 「세자르(César)」는 조각가 세자르와는 아무 연관이 없다. 폴 발레리의 세자르는 줄리우스 시저(Caius Julius Caesar BC101-BC44)이다. 로마의 황제였던 시저의 프랑스명이다. 시저는 무인(武人)이면서 정치인, 역사가, 학자, 비극 작가이자 풍자 시 작가였다.      


발레리가 자신의 정신적 지주로 삼은 인물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소크라테스, 유팔리노스 같은 역사 속 인물이거나 나르시스, 오르페우스 같은 신화 속 인물이다. 무척 꼰대스럽다. 그의 시대는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았고 대중 스타를 멘토로 삼는 시대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줄리우스 시저 같은 군인이 시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자르     

세자르, 고요한 세자르, 모든 걸 발로 밟고,

수염 속 주먹 굳게 쥐고, 독수리 가득 찬 어두운 눈으로

황혼의 전투를 지켜본다,

그대 마음은 부풀어 자신을 전능한 근원으로 느낀다.     


호수는 헛되이 팔딱거리며 제 장밋빛 침대를 핥고

어린 밀밭은 헛되이 고귀한 금빛으로 반짝이지만

그대는 긴장한 몸 매듭들 속에서

그대의 다문 입을 쪼개고 말 명령을 다진다.

     

거대한 수평선 너머엔 광활한 세계가 펼쳐지고

제국은 섬광을, 칙령을, 등걸불을 기다린다

이들은 저녁을 분노하는 새벽으로 바꾸리라     


저기 물결 위엔 우연이 얼러주는 행복한 낚시꾼,

물에 둥둥 떠 무심히 노래하는 그는 모르리

세자르의 한복판에 어떤 벼락이 쌓이는지를.       


세자르와 낚시꾼사색가와 예술가     


이 시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갖는 세자르와 4연에 얼핏 등장하는 낚시꾼의 대비로 전체 구도가 잡힌다. 세자르는 철저하게 계산하는 인간이다. 반면에 낚시꾼은 물 위에 무심히 둥둥 떠내려가며 노래한다. 낚시꾼은 우연이 주는 먹이를 낚는다. 모든 것을 계산하는 자와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는 자의 극단적 대비이다. 여기저기 물결을 따라가는 낚시꾼은 행운에 몸을 맡기는 예술가를 상징한다. 세자르는 인식의 힘을 소유한 사색가를 나타낸다. 생각하는 존재인 세자르는 스스로를 만물의 근원으로 여긴다. 그리고 초인적 통제력을 갖기 위해 싸운다. 그의 창조는 “저녁을 분노하는 새벽으로 바꾸리라.”      


폴 발레리는 세자르와 낚시꾼이라는 두 유형을 세계를 이해하는 힘으로 대비한다. 발레리는 세자르에게만 열광하는가? 그렇다. 「세자르」에는 감상적인 인형극 놀이를 증오하고 명석한 정신의 힘을 찬양한 청년 발레리의 의도가 시퍼렇게 담겨있다. 그러나 무심한 낚시꾼 또한 늘 발레리와 함께 한다. 낚시꾼의 존재가 세자르 못지않게 세계를 지배하고 있음을 놓치지 않기 때문이다. 세자르와 낚시꾼은 명석한 지성의 힘과 불확실한 감수성의 대립이다. 지성과 감수성의 통합을 추구한 발레리의 평생 주제이기도 하다.  

    

몸은 정신을 만든다

     

이와 함께 이 시에는 정신의 기능에 영향력을 가하는 몸의 주제가 있다. 세자르는 인식의 힘을 소유한 정신적 존재이자 몸으로 실존한다. 균형감을 소유한 침착한 정신인 세자르는 만물을 발아래 둔 거대한 몸이다. 굳게 쥔 두 주먹, 로마의 문양인 독수리 형상 가득 찬 깊은 눈은 세자르의 정신력을 상징하는 몸의 징표들이다. 이는 정신의 기능이 만드는 몸의 현상이다.     


2연에서 호수와 어린 밀밭은 무심하게 움직이며 반짝이지만 지휘관으로서 명령을 계산하고 다지는 세자르의 몸은 최대한 긴장해 있다. “그대는 긴장한 몸의 매듭들 속에서/ 그대의 다문 잎을 쪼개고 말 명령을 다진다”. 인식의 추구에서 정신의 모험을 펼치는 사람은 몸의 주제와 만난다.     


이제 군인의 사유는 자신의 두뇌에서 뿐만 아니라 웅크린 육체의 매듭들에서 창조된다. 발레리에게서 몸은 정신적 삶의 영향을 받을 뿐만 아니라 정신을 만드는 적극적 역할을 한다. 몸과 정신의 상호 작용은 검투사처럼 사유와 글쓰기를 단련한 발레리의 평생 주제를 요약한다. 이는 군인 세자르가 시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 「세자르」는 몸과 정신의 힘을 추구하던 시기, 청년 발레리의 인생 선언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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