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페(Orphée)는 그리스 신화 속 오르페우스의 프랑스어 이름이다. 지옥에 납치된 연인 에우리디케를 되찾으려고 지옥 여행을 한 신화 속 인물로 유명하다. 하지만 결국엔 영원히 이별하게 되는 두 연인의 운명이 대단히 극적이다. ‘오르페’ 스토리는 연인 에우리디케와의 이런 낭만적 스토리가 부각되는 바람에 정작 오르페 자체의 정체성은 관심 밖이기도 하다.
청년 폴 발레리는 오르페 숭배자였다. 에우리디케와 알콩달콩하는 연인 오르페우스를 숭배한 게 아니다. 오르페는 불멸의 연인이기 전에 신적인 권능을 가진 예술가였다. 발레리는 오르페의 이런 전능한 능력에 꽂혔다. 시인과 예술가의 이상을 오르페에게서 찾는다. 발레리의 오르페는 세상 만물을 움직이게 했다는 권능의 음악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는 창조력으로 세상에 빛의 질서를 부여하는 아폴론이다. 태양이다. 아폴론의 예술적 권능, 창작의 권능이 발레리 오르페의 정체성이다.
발레리 작품에서 「오르페」는 1891년의 시로 처음 등장한다. 이 시는 1926년판 『옛 시 앨범』에 개작되어 다시 선보인다. 35년의 세월 후에도 다시 꺼내어 세상에 내놓는 작품이다. 발레리에게서 오르페 주제는 미학적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시적 탐구를 이끈다. 문학을 거부한 청년 발레리이지만 시적 탐구의 끈을 놓지 않았던 내면을 보여준다.
오르페
나 오르페는 정신으로 창조한다. 도금양 나무 아래에서,
경이로운 자여!... 불은 순수한 원형극장에서 내려와
민둥산을 장엄한 전승물로 바꾸네,
거기선 신의 우렁찬 행위가 퍼져 나온다.
신이 노래하면, 전능한 처소를 부수고,
태양은 돌들의 무서운 움직임을 바라본다
엄청난 호소는 성전의 조화로운
드높은 금빛 벽들을 눈부시게 불러낸다.
신은 찬란한 하늘가에 앉아 노래한다. 오르페여!
바위는 걷고, 비틀거리고, 요정이 된 돌마다
새로운 무게를 느끼며 창공을 향해 착란의 소리 내고!
반벌거숭이 신전은 저녁의 도약에 잠겨 들고
기꺼이, 신은 금빛 저녁 속에 모이고 정돈되네
위대한 찬양을 받는 광활한 영혼 향해 칠현금 타며!
발레리의 오르페는 1인칭 ‘나’로 당당하게 등장한다. 마지막 4연까지 신의 모습을 한 단계 한 단계 드러낸다. 요란한 등장이다. 이 시는 주체 오르페의 분명한 행위들로 이뤄져 있다. 그는 타오르는 불이었다가 신이며 태양이고 칠현금 타는 연주자이다. 오르페는 스스로를 객관화한다. 자기도취에 빠진 신이다.
이 시는 선이 굵고 씩씩하다. 「세자르」, 「헬레네」 보다 고민이 없다. 예술적 권능, 음악의 힘을 노래하기 때문이다. 신적인 존재인 태양, 금빛 찬란한 하늘, 그리고 금빛 저녁노을의 위력을 2연과 3, 4연에 고루 배치했다. 그 중심엔 오르페가 있다! 경이로운 자이며, 노래 하나로, 칠현금 운율 하나로 바위를 움직이고 처소를 부수는 전지전능한 음악인이다. 청년 발레리가 동경한 ‘음악’과 ‘건축’이라는 두 예술 분야를 섭렵한다. 시인이라면 이런 힘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발레리의 이상이자 글 쓰는 자의 열망이기도 하다.
발레리는 숫한 멘토들을 가졌다. 그 중에서도 발레리가 가장 동경한 멘토는 노래하는 신, 오르페일 것이다. 시는 언어의 홀리는 힘으로 세상을 변신시키는 예술이다. 발레리가 1917년 『젊은 파르크』에 이어 1922년도에 펴낸 시집 『매혹』을 보자. 우선 제목인 ‘매혹(Charmes 샤름)’의 프랑스어 어원은 ‘주술’이다. ‘홀리는 힘’이란 뜻이다. 그 유명한 「해변의 묘지」를 비롯해 21편의 원숙기 시가 담긴 시집 『매혹』은 거의 모든 시가 기도와 다름없는 분위기를 갖고 있다. 시 한 편 한 편이 주술의 경지에 있다.
이는 청년 발레리와 원숙기 발레리의 이상을 대변한다. 시의 이상은 주술적인 힘이다. 도취시키는 힘, 인간이 이런 주술적 힘을 무엇보다 필요로 한다는 건 기묘하지만 사실이다. 인간의 원형 심리는 자아와 생각을 압도하는 고양감을 원하기 때문이다.
청년 발레리는 「오르페」를 통해 평범한 세계를 조화로운 세계로 변화시키는 시의 힘, 예술의 힘에 대한 찬가를 썼다. 신화적 몽상가에 가까웠던 청년기의 오르페는 그의 원숙기인 1926년의 판본에서는 자신을 과시하는 위풍당당한 신의 위상으로 수정된다. 자신의 이정표가 되어준 옛 시 「오르페」는 만물이 서로서로 공명하는 세계를 만드는 시적 힘에 대한 찬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