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나를 좋아해.
편지를 드리는 거야. 이번 할아버지 생신에는 편지를 써 보자. <할아버지 생신 축하드려요> 만으로 편지지를 가득 채울 수는 없을 것 같다고? 큰 글씨로 이 짧은 문장을 다 채우고 싶지는 않다고? 그럼 무엇으로 남은 부분들을 채울 수 있을까? 그 고민이 할아버지께 선물이 될 거야. 진영이는 따로 용돈을 받지 않는다는 걸 알고 계실 테지. 예쁜 옷과 따뜻한 목도리를 드릴 수는 없겠지만, 진영이 눈으로 어떤 것을 보며 오늘을 보냈는지, 그 안에서 어떤 것들로 기뻐했는지를 찾아봐. 우리가 잘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실 수 있으실 때 큰 기쁨, 선물로 다가올 거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 당연하니까. 엄마도 진영이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기쁨에 잠겨 웃을 수 있는 시간이 길었으면 좋겠고.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을 감는다고 가려지지 않는 목소리들, 목소리들의 주인이 품고 있는 마음들과 그 마음들이 지배하는 그의 몸뚱이. 나는 그의 마음을 교정할 수 없다. 그를 강압적으로 억눌러서는 안 된다. 나는 그와 거리를 두고 싶다. 나는 그와 가까운 사이가 아니다. 나는 그의 입안에 소금 빵을 가득 채우고 조용히 우물우물 씹으며 먼 곳으로 걸어가 그곳에서 목소리를 내라 명령할 수 없다. 그를 미워할 수 있다. 그 또한 나를 미워할 것이다. 나는 그의 목소리가 싫다. 그의 눈이 나를 쳐다보는 것이 싫다. 그는 나를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생각과 감각 안에 내가 들어있는 것이 소름 끼친다. 그는 나를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그를 거친 지우개로 뜯어버리듯 지워내고 싶다. 생채기를 내고 싶다. 그는 한 사람으로 특정되지 못한다. 그가 아닌 사람을 몇몇 찾는 것이 쉬울 것이다.
할아버지, 저는 오늘 학교를 가다가 제 뒤에서 저와 같은 방향으로 걷는 사람의 발걸음을 따라 했어요. 그 사람은 저보다 더 서두르는 것 같았지요.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묻지 않았지만, 그 사람과 제가 같은 곳으로 걸어갈 때까지만 빠르게 뛰어가 보았어요. 평소 학교 가는 것보다 10분 일찍 교문에 다다를 수 있었는데 그때 마침 제가 좋아하는 선생님이 저를 보고 우리 진영이는 학교에 일찍 도착하는 착한 학생이구나 칭찬해 주셨어요. 그래서 기분이 좋았어요. 제가 편지를 쓰고 있는 오늘은 학교가 일찍 끝나는 수요일이에요. 그래서 일찍 집으로 돌아갔는데, 엄마가 찹쌀가루 반죽 위에 유자청을 올리고 촉촉하게 구워 부꾸미를 만들어 주었어요. 저는 쓴 약을 먹는 것은 싫어하는데, 유자 껍질은 맛있어요. 할아버지는 어떤 것을 좋아하세요? 우리 엄마는 무서운데 맛있는 요리들을 많이 만들어 주세요. 그래서 좋아요.
내게 주어졌던 선택의 갈림길에서 특정적인 기운을 품고 있는 길들로 꾸역꾸역 걸어갔던 내 다리를 톱으로 잘라버리고 싶었다. 결국 나는 변하지 않았어.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내가 적어 내려갔던 좋은 사람의 기준에는 특정을 짓지 않는, 새로운 것이 내게 다가오더라도 무서워하지 않고 반갑게 인사할 수 있는 용기를 달아두었나 봐. 그건 멋진 사람인 것 같은데. 멋진 사람이나 좋은 사람이나 나는 하나도 맞지 않는 지겹고도 지루한 사람. 좋은 사람은커녕 하루가 시작되자마자 나는 그 하루를 쓰레기로 만들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인간. 그 모습이 꼴 보기 싫으면 부수면 되잖아. 망치로 쾅쾅 두드리고 손을 깨끗하게 씻으면 아무도 모를 텐데. 남 탓을 하기에는 너무 우스워. 증오했잖아, 톱으로 네 다리만 자르고 싶었던 것이 아니잖아. 한 번도 너는 죽을 생각을 하지 못했지. 문을 열 자격을 너에게서 찾지 않았지. 못한 게 아니야. 찾지 않은 거야. 네가 뭔데 문을 열어? 눈에 물을 쏟아내기 전에 말대꾸를 했어야 해. 귀를 막기 전에 네 목소리로 그 소음을 잡아먹었어야 해. 너는 뭔데 내게 그런 질문을 해? 나는 이 문을 열어야겠으니까 같이 열어볼 것 아니면, 나를 방해하고 싶다면 저리 가 버려. 내가 톱을 망치를 소금 빵을 집어 네게 던져 버리기 전에. 네 심심한 머리통 받아 줄 여유 없으니까 딴 곳에서 놀아!
진영아, 너는 텅 빈 종이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들었어? 저것을 어떻게 채울지 보다 예쁜 글씨로 채우고 싶은데, 내가 예쁜 글씨를 쓸 수 있을까를 걱정했었다고. 그냥 지금 쓰고 싶은 글을 편하게 썼었다고. 쓰고 싶은 글은 지금 내뱉고 싶은 혼잣말 속에 다 들어 있었다고. 너는 네 인생이 그렇게 즐겁지 않다고 괴롭다고 생각했었지. 내 나이쯤 되면 인생이 풀리리라 믿고 살았었지. 괜찮다고 나는 늘 기쁜 표정으로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있으니까 그런 걱정은 지우고 버텨보라고 편하게 말할 수 있다면 내 마음도 참 편할 텐데, 지금 내가 적어내고 있는 글이 너에게 어떻게 다가갈지, 내가 전달하고 싶었던 마음이 너에게 온전하게 도착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나는 너에게 어떤 것을 주고 싶었는지도 잘 모르겠다는 걸 알아차리게 되는 거야. 답이 없는 질문에서 답을 찾고 있지. 모든 것들이 비슷해. 아무것도 숨길 수 없었던 곳에 숨어있던 날카로운 눈이 있었고, 숨어있는 것들을 찾았다 생각했지만 비눗방울처럼 가볍게 사라져 버린 것들을 나는 놓칠 수 없다며 엉엉 울었어.
문을 열었다는 장면의 전환보다 내가 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시켜 준 손에 남은 차가운 문고리의 냉기. 먼 곳에서 시작된 비난의 옷을 벗긴다. 나는 너의 지루함을 달래 줄 의무가 없어. 네가 해결할 문제지. 나는 너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걸. 생각해 봐. 날카로운 가시로 내 손을 콕 콕 쑤시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니? 나는 늘 그런 아픔을 받아왔었으니 너도 받아야만 공평하다고? 나는 너의 세계에 놀러 가지 않았어. 너도 그곳에서 그냥 나와. 아프지 않은 너의 가면을 하나 만들어 써 보는 거지. 어떤 것이 너에게 잘 어울리는지를 살펴보는 거야. 일부로 예쁜 말을 하고, 남들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는 거란 생각 없이 그냥 웃어 봐. 그게 네 본모습일 거야. 어떤 사람과 미움과 순간에 사로잡히지 않은 네가 주인이 되는 너. 너를 꾸며도 괜찮아. 곧 열게 될 다음 문에는 맛있는 피자를 굽는 가게가 있을 것 같아. 없으면 그다음 문에 있을지도 모르지. 내가 피자 냄새 때문에 계속 문을 찾아다녔다는 이야기를 너는 듣지 못했지? 자 조용히 해 봐. 내 천천히 이야기해 줄게. 대신 위풍당당하게 멋진 모습으로 있어야 피자를 공짜로 먹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위엄 있게 걸어가 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