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빛의 여정 98화

장편소설 빛의 여정 98화 / 9장 불씨 운반자 네이즈

by 포텐조

장편소설 빛의 여정 98화 / 9장 불씨 운반자 네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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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 사이로 나온 갈리스는 네이즈와 협상을 했다. 이질바이나 마을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하지 않기로, 대신 수도원에서 원하는 물건을 넘기겠다고 약속했다. 네이즈는 서슬퍼런 칼날들을 이제 거두라고 명하며 갈리스를 인질로 수도원으로 발 길을 돌렸다. 이질바이나 사람들의 눈동자에서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고 갈리스를 알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측은하고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은 갈리스의 끝이 다가왔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이즈는 갈리스가 지팡이를 짚고 재빠른 걸음으로 가기 힘들어하자 호위병의 말에 같이 타게 한 후 움직였다.


갈리스에게 네이즈가 말하길

"허튼 수작을 부리면 네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거야. 여기 있는 마을 사람들도 모조리 정죄할테니 잘 생각하도록"

네이즈의 협박에도 갈리스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응수했다.

"내 영과 육은 이미 피데라께 바친 바, 죽음은 단지 과정일 뿐이라오. 허나 그대가 우리 사람들을 상대로 장난질을 하니 따를 수 밖에"

수도원으로 가는 길은 이질바이나 마을에서 또 올라가야 했고 시간도 하루가 더 걸리는 산악길이라 말로 속도를 낼 순 없었다. 네이즈 일행은 처음 오는 곳이라 여기저기 살펴보기 바빴지만 갈리스는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선을 고정했다. 옆에서 감시하고 있던 말을 탄 호위병 한 명은 그를 지켜보며 기도를 하고 있나 싶었다. 말 발굽들이 돌에 부딪히고 흙에 부딪히며 계속 나아가다가 잠시 말에서 내려 숨을 돌리던 중에 두 손이 묶인 갈리스가 네이즈 앞으로 끌려오자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네이즈가 말하길

"그간 좋은 곳에 살고 있었군. 저 멀리 낭떠러지 넘어로 광활한 아나티리캄을 보게. 아름다운 곳이야."

갈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아름다운 곳이지. 바로 이 산에 세워진 우리 수도원은 선조들의 피와 땀이 서려있소. 생각해보시오. 지금 이렇게 올라가는 것도 벅찬데 돌과 자재를 실어날라 수도원을 만들어 냈지."

호위대장 제론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쓰잘데기도 없는 사원을 지어봤자지. 어차피 무너질 곳인데"

갈리스가 비웃음에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자 네이즈가 갈리스에게 물었다.

"이보게. 피데라의 신자여. 우리가 두렵지 않나? 너의 생사여탈권을 우리가 쥐고있는 데 세상 평온한 모습인데?"

잠시 침묵을 이어가던 갈리스가 답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떠나지 아니하는 한 빛이 너와 함께 할 것이요. 그 빛은 영원한 빛이라"

네이즈는 무슨 소리인가 싶다가 갈리스가 피데라시스의 경전 구절을 인용하는 것임을 알아챘다. 그러자 네이즈는 고개를 저으며 바위에서 일어났다.

"대책없는 늙은이 같으니라고. 아유 그만하자고, 다들 떠날 준비들이나 해라"


두 손이 묶인 갈리스는 다시 호위병의 등 뒤에서 말을 타고 가면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가 시간을 벌어다주는 사이에 이질바이나 사람들은 어서 빨리 도망쳐야만 했다. 네이즈 일행이 장로의 아내를 인질삼아 질문하고 있었을 무렵 군중속에 있던 갈리스는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약초꾼인 두에몬에게 쪽지를 건넸다. 그 후 팔을 든 갈리스는 장로의 아내 대신 네이즈 앞에 서게 되었고 두에몬은 그 사이 갈리스가 준 쪽지를 두리번 거리며 살며시 펴보았다. 내용은 이러했다.


"수도원은 하루, 마을로 돌아오는 데 하루. 그러나 혹시 모르니 하루라고만 생각하고 모든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짐을 싸서 도망을 치도록 하게. 내가 수도원에서 이들의 요구에 응했든 아니였든 간에 이들은 다시 찾아와 이곳을 박살 낼 것일세. 두에몬, 잘 부탁하네."


네이즈 일행과 잡힌 갈리스가 수도원으로 떠난 뒤 마음이 진정 되지 않은 장로 가족에게 그 쪽지를 건네며 두에몬은 도망쳐야 한다며 재촉했다. 젊은 장로가 주춤거리며 갈리스가 네이즈가 원하는 대로 해주면 마을은 무사하지 않냐는 질문에 두에몬은 고개를 저으면서 손 놓고 있다가 다시 돌아오면 무슨 짓을 하든 막을 수 없다라며 설득했다. 옆에 있던 청년 중 한 명은 네이즈 일행을 막으면 되지 않냐 했지만 두에몬과 장로는 회의적이었다. 장로의 아내는 가까이서 바라 본 네이즈의 얼굴에서 상대를 대하는 부드러움 혹은 장난 속에 배어있는 광기를 알아챘는지 모두가 살려면 당장 떠나야한다 주장했다. 잠시 소란이 마을 회관 안에서 일어났다. 평생을 마을에서 머물며 살아가던 몇몇 사람들은 이리 쉽게 무너지는게 말이 되냐며 항의했고 갈리스와 했던 네이즈의 약속을 믿어보자 말했다. 다만 떠나야 한다는 쪽이 우세했고 그럼에도 남고자 하는 사람들은 남는 것으로 방침을 정했다. 결정적으로 이질바이나 사람들은 언젠간 이단 추적대가 이 높은 지대까지 찾아와서 몇몇 사람들을 피보게 할 것임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런데 네이즈 일행의 등장으로 그 시기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 왔던 것이다.


밤이 되고 야영을 하고 있는 네이즈가 장난감을 다루듯 갈리스를 데리고 와 앉혀 말로 여기저기를 찔러보기 시작했다. 네이즈가 말했다.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아. 아보님과 우리 왕국의 자비가 이토록 넘쳐나는데 그걸 고마운 줄 모르고 다른 신들을 섬기다니"

갈리스가 답했다.

"당신은 경계석을 넘어오면서 아나티리캄 사람들의 피눈물을 듣지 못했소? 누가 노예의 몸으로 살고 싶어하오? 누가 알지도 못하는 신을 위해 몸을 바쳐야만 하오?"

네이즈가 살짝 짜증이 났는 지 불쏘시개로 모닥불을 들쑤시며 말했다.

"이보게. 수도사. 누구 때문에 지금 이그네움의 따스함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아보의 은총이 없었으면 이 대륙은 이미 절단났어!"

갈리스가 반발했다.

"당신은 알지 못할 것이오. 그 이그네움 또한 우리 피데라의 은총이라는 것을"

서로 톤이 점점 높아졌다. 네이즈가 말했다.

"증거도 없는 개소리는 좀 닥치게! 감히 어디서 이그네움이 지들 거라고..."

호위병들의 시선이 네이즈와 갈리스로 향했고 제론이 칼잡이를 쥔 채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갈리스가 소리쳤다.

"당신이 원하는 조각. 그 조각의 출처도 제대로 모르면서,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가져가려 한단 말이오? 아주 맹목적으로 개처럼 물어오는구만 그래!"

순간 네이즈가 모닥불에 있던 불쏘시개를 잡고 있다가 갈리스의 얼굴을 후려쳤다. 불똥이 튀면서 갈리스는 맞고 넘어졌다. 그러자 호위병들이 모두 일어났다. 제론이 달려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네이즈가 머리를 쓸어넘기면서 다른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아냐아냐. 괜찮아. 앞뒤 꽉꽉막힌 이단자에게 갱생의 여지를 주려 했더니 도무지 말을 안 듣는 군"

갈리스가 묶인 두 손을 바닥에 짚으며 다시 일어났다. 그의 광대엔 붉게 달아오른 상처와 함께 조금 찢어져 피가 나고 있었다. 숯도 같이 묻어 있었다.

갈리스가 똑바로 선 채 말했다.

"어차피 내일이면 끝날 일이오. 나는 그대들을 수도원으로 데리고 가서 조각을 넘겨 주면 내 일은 끝났소."

네이즈는 대꾸하지 않았다. 제론은 잠시 머물다 다시 다른 부하들 곁으로 돌아갔다. 밤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갈리스의 거짓말은 내일이면 들통 날 게 뻔했다. 그는 잡혀 떠날 무렵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고 자신에게 찾아올 죽음의 망령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려 애쓰고 있었다. 그 전에 마을 사람들이 떠났다면 약간의 위안이 될 것이다.




99화에서 계속...

"때가 차매 그 빛이 다시 솟아나리라"

(매주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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