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빛의 여정 107화 / 10장 아나트라의 흔적
장편소설 빛의 여정 107화 / 10장 아나트라의 흔적
로이딘이 건네준 편지를 받아든 베일런은 내용을 모두 읽고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로이딘은 그의 무표정함을 어떻게 받아들일 지 판단하고 있었다.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르고 나서야 베일런이 입을 뗐다.
"표징이 아나트라의 품 안에 있다는 것이고, 아나트라는 성자들의 무덤이 계신 것을 알고 있지?"
로이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베일런은 로이딘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문제는 성자들의 무덤까지 가는 것도 있지만... 하여튼 일단 수도원장님하고도 이야기 해보자"
안개 낀 아침부터 다시 분주하게 움직인 두 사람은 중앙 신전의 원장실로 찾아갔다. 얀자가 잠시 기도하고 있는 모양인지 수비대 수도사가 입구에서 잠시 대기해달란 말에 두 명은 어색한 기류를 느끼며 멈춰 서 있었다. 그러다가 안에서 소리가 들리자 머리를 문 안으로 들이 민 수비대 수도사가 다시 밖을 바라보며, 베일런과 로이딘에게 들어가도 된다며 길을 터주었다.
얀자는 다소 피곤한 표정으로 그들을 반기며 물었다.
"어서오게. 뭐 마실텐 가? 메멕스? 이므젠?"
메멕스와 이므젠은 헤르논 수도원이 다른 상인들과 무역을 하며 자금을 마련하는 데 있어 효자상품이었다. 수도원의 산에서 자라는 꽃들을 따와서 말린 뒤에 차로 우려 마시면 풍미가 훌륭했다. 메멕스는 앙증맞은 작은 붉은 잎들이 이리저리 나 있는 덤불 모양의 식물이었고 이므젠은 갈색 꽃이 코스모스처럼 나 있어 그 잎들을 수확했다. 아무래도 수도원장이 된다면, 그 잎들로 마음 껏 차를 즐길 수 있는 특권이 있나보다.
베일런과 로이딘은 모두 부드러운 향의 이므젠을 택했고, 얀자는 찬장에서 다른 원통형 목함에서 말린 이므젠을 꺼내 두 컵에 넣어 뜨거운 물을 부어 가져다 주었다. 향기를 맡으니 긴장되었던 몸과 마음이 살짝 풀리는 것 같았다.
베일런이 앉아서 홀짝이다가 로이딘을 바라보았다. 눈치를 챈 로이딘이 마시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품 안에서 편지를 꺼내 얀자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얀자는 베일런보다 더 오버스런 표정으로 반응했는데 편지를 읽어내려가는 그의 표정이 변함없음에 정말 놀란 모양이었다. 얀자는 눈을 껌뻑이며 베일런과 로이딘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아니, 이것을 어디서 찾은 거야? 로이딘이 이질바이나에서 가지고 온 건가?"
베일런이 답했고 로이딘이 부가설명을 덧붙이며 찾게 된 경위를 말해주었다. 얀자는 조용히 이야기를 듣다가 미간이 찌뿌려졌다.
"세상에나.. 이게 어찌 도서관 한 구석에 박혀있었단 말인가?"
베일런도 끄덕였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걸 찾도록 피데라께서 예비하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얀자의 진지한 표정이 풀리지 않은 채 말했다.
"하필이면 이때라니.. 베일런은 이미 회의 때 같이 있었으니 알 테고, 로이딘?"
로이딘을 부르자 다시 찻잔을 내린 로이딘이 말했다.
"예, 원장님"
얀자가 말했다.
"최근에 아보테가 침략 당한 사실을 알고 있니?
로이딘은 당연히 대륙 정세를 알 리가 없었다.
"아뇨. 침략한 게 아니라 침략 당했다고요?"
아나티리캄에서 칼춤을 추고있는 이단추적대와 뒤를 봐주고 있는 아보테 왕국이 로이딘이 알고 있는 전부였다. 얀자가 북쪽의 아디일라라는 부족연합이 내려와 북부 아나티리캄, 서쪽 바슬라에서 아보테의 국경을 넘었단 소식을 말해주었다. 아보테 동북쪽 지역이 현재 쑥대밭이 되었단 소식과 함께.
로이딘은 내심 침략자 아보테가 응당 그 댓가를 치루고 있단 생각에 통쾌했다. 그리고 피데라시스와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을 했으나... 얀자가 말했다.
"지금 상황에서 성자들의 무덤으로 향한다? 사방팔방에 아디일라의 후방부대가 바슬라 입구에서 성자들의 무덤 근처까지 포진해 있어. 한 마디로 이 야만인들은 지금 작정하고 아보테를 침략한 거야. 거의 대부분의 인력을 전쟁에 몰아넣은 거지"
베일런은 길을 터준 바슬라도 공범이라는 것을 겸사겸사 말해주고 있었다. 로이딘은 현재 상황으로 인해 성자들의 무덤을 접근하기 대단히 어려워졌단 사실에 문득 그곳을 수비하고 있는 "성묘 수호대"들 상황이 괜찮은 지 싶어 물었다. 얀자가 답했다.
"가뜩이나 적은 인원으로 수비하기도 힘든 데, 아디일라의 병사들까지 가세했으니 더 암울해졌어. 제 아무리 뛰어난 전사들이라 한 들, 개 떼처럼 몰려오면 누가 막을 수 있겠나?"
로이딘은 당장 가기 어렵다는, 사실 상 기약없는 나날을 보내야 할 지 몰라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설령 가더라도 대놓고 싸우기로 작정하고 대기하고 있는 병사들이 사방에서 진을 치고 있기 때문에 그곳을 통과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 없었다. 이번엔 세라도 같이 가주기로 한 여정이라서 답답한 마음에 이를 언급해보려던 찰나, 무언가 직감적으로 그의 혀 끝이 움직이지 않았고 내키지 않았다. 그는 일단 그것에 대해선 함구했다. 로이딘은 먼저 상황의 시급성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험한 건 맞습니다. 그런데 성묘 수호대가 모두 전멸이라도 한다면 성자들의 무덤은 말 그대로 끝장나는 거 아닐까요?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가만히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베일런이 수도원장에게 예의없이 굴었을까봐 로이딘에게 화를 냈다.
"지금 버릇없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게야? 정중히 사과드려라!"
얀자가 손을 저었다.
"아냐, 일리있네. 이질바이나 수도원을 생각하노라면 우리가 너무 위축된 채 가만히 있었던 것 같지 않나? 갈리스는 결국 쓸쓸히 혼자 그곳을 지키다 순교하지 않았나. 성묘 수호대조차 우리가 방치한다면 피데라시스의 교리를 어기는 것과 다름이 없어"
베일런이 답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평소에도 가기 어려운 데 전쟁통에 거길 간다니요?"
얀자가 답했다.
"오히려 전쟁통이라 더 쉽게 갈 수도 있을 거야. 그 놈들이 성가신 약탈자들을 무덤 근처까지 정리했을 수도 있지 않겠나? 물론 지금도 좋진 않지만 다시 이질바이나 꼴을 보고 싶지 않군."
성자들의 무덤을 지키는 건 피데라시스의 의무이자 책임임을 경전에서도 언급하고 교리로도 명시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베일런과 얀자는 할 말이 없었다. 그제서야 로이딘이 세라를 언급했다.
"원장님 그리고 베일런? 세라가 전투하는 데 있어서도 제 앞 가림을 할 줄 아나요?"
로이딘은 혹시나 지원군이 아니라 짐을 하나 더 싸들고 가는 게 아닌 가 싶어 간접적으로 물어봤다.
의외의 답변이 나왔다. 베일런에게서.
"나와 헤르논에 있을 때 위급상황을 알려 준 건 세라였고, 가끔 그 녀석한테 술을 먹여본 적이 있거든? 그때 마다 진심인지는 모르겠네만 자기가 엄청난 마법을 부릴 줄 안다던가? 물론 나는 그걸 본 역사가 없지만, 어쨌든 재빠른 건 확실해서 전장에서도 시야를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될 거야."
베일런은 로이딘의 물음에 답변하고 나서, 돌발적인 제자들을 한 두 번 본 게 아닌지라 다시 말했다.
"혹시나 시테온하고 루네를 꼬드기고 세라도 데리고 갈 생각이면 지금 당장은 일러. 굳이 가고 싶다면 이번 주 지나 다음 주 상황봐서 가도록 해. 지금은 후방부대가 앞 뒤로 들어 찬 상황이라 개구멍도 막힌 모양이더군."
얀자는 다시 로이딘에게 편지를 주고 제자리로 가더니 앉아서 경전을 펼쳤다. 그리고 표정에 미동없이 말했다. "힘들지만 결론은 내려진 건 갔군. 가는 날이 정해지면 말해주게. 내 도움을 줌세"
베일런과 로이딘은 원장실에서 나오면서 나란히 걸었다. 베일런이 말했다.
"지금 계신 얀자 원장님은 유해서 다행이지, 이전 원장이었으면 벌써 책이 네 머리로 날아왔을 거야. 좀 더 예의를 갖추도록 해"
종 탑 꼭대기에서 세라는 날개를 정리하다 신전을 나오는 베일런과 로이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꽥꽥거리며 말했다.
"바보들 따라 가려면, 벌레나 잔뜩 먹어둬야겠네."
108화에서 계속...
"때가 차매 그 빛이 다시 솟아나리라"
(매주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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