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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텐조 Jan 22. 2024

존재 그리고 기억해 주다.

대학원생의 성장일기 159

성장일기 벽돌시리즈 백오십 구 번째

나는 실존주의를 좋아한다. 죽음의 수용소를 읽고 극단적인 공허함을 이겨 냈으며 지금 내 방 벽 액자엔 빅터프랑클의 초상화가 달려있을 정도로 큰 도움을 받고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 의미치료가 상담세계에선 중구난방이거나 구체적인 기법을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가장 중요한 내담자의 변화 출발점인 "동기" 그리고 "의식"을 개선해 준다는 점에서 나는 극찬을 아끼지 않고 싶다.



그래서 더 나아가서 지금의 삶이 설령 마감하더라도(물론 지금은 원하지 않지만) 그리 큰 욕심이 없는 상태다. 왜냐하면 실존주의의 파도를 누군가는 부담스러워하고 심지어 죽음의 수용소를 읽다가 끔찍해서 중도포기자들이 속출하지만 그것을 이겨내고 그 사상을 받아들인다면 존재 자체의 존귀함을 상기시키게 된다. 그래서 오히려 죽음에 대해 초월해지는 경향이 생긴다.


무슨 말이냐면 지금 당장 죽어도 아쉽지 않을 것 같다는 이야기다. 누군가는 "에이 말로만 저러지 허세보소?"라고 생각할 순 있는데 사실 죽은 사람은 생각하고 자시고 따질 문제가 아니며 현재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아쉬움, 집착이 있을 순 있으나 실존주의적 관점에선 나의 현 존재에 대한 귀중함으로 매 순간이 사실 좋은 경험을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빅터 프랭클이 말했듯 의미를 찾게 되면 공허함과 상상을 초월한 아픔을 이겨낼 수 있듯이 이 부분에서 죽은 사람은 오로지 고독사를 하거나 장례식에 사람이 찾아오진 않더라도 단 "한 명"이라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존재로써의 가치를 충분히 뽐냈으며 어쩌면 영원히 살아간다는 나는 희망 아닌 희망을 가져본다.  이 말은 아무리 돈이 많거나 무언가 풍족해진 사람도 죽게 마련인데 그 죽음 앞에서도 결국 남는 것은 그동안 그를 생각해 주는 사람들뿐이다.


그래서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듯 사람은 이름을 남기는 것처럼 죽음 앞에서 누군가 기억해 주는 것만으로도 참 잘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생각도 가져본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누군가는 초월을 생각할 수도 누군가는 뭔 사이비 교리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지극히 나를 귀중히 여기는 관점이라면 내가 죽고 한 줌의 흙이 되어 이 세상에 대해 어떻게 할 수는 없을지 언정 추억만큼은 살아 움직인다는 느낌을 가져본다.



어쩌면 생각을 확장해서 죽음 앞에 겁을 내지 않았던 고대 혹은 중세의 용맹한 전사들도 어떤 종교적 문화적 영향권에 속해 있든 간에 핵심은 자기를 기억해 주거나 "명예"를 추구했던 점을 비추어 볼 때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오늘 일기를 쓰면서 사실 고민이 많았다. 이 부분을 다뤄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지만 살짝만 다루고 끝내도록 하려 한다. 


외할머니가 20일 토요일 자정을 넘기고 새벽 2시경에 가족의 품에서 편히 돌아가셨다. 100세를 넘기시고 올해 101살이신데 보건복지부에서 직원이 찾아와 장수 어르신들을 위해 최근에 명아주 지팡이를 전해주고 간 걸 보면 천수를 누리고 가셨다. 더 위로할만한 점은 의식을 잃으시기 전 까지는 어떤 정신적 어려움도 없으셨고 인지도 잘하시고 말도 잘하셨다는 점에서 대단하시다는 생각도 들었다.


빈소를 지키면서 나는 그럼에도 글을 썼고 도중에 잠시 시간을 내서 모임을 진행하고 왔고 멤버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고 설령 알린다 해도 과연 얼마만큼 위로를 받을지도 모르는 솔직한 두려움에 알리지 않았다. 연예인이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자기는 방송하러 갔다는 사연이 무슨 소리인지 알 것도 같다. 책임감으로 외할머니가 하늘에서 잠시 자리를 비운 것에 용서하시리라 보고 우리 외할머니를 추모하며 하늘에서 외할아버지와 함께 그곳에서도 즐겁게 활기차게 살아가셨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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