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일기 벽돌시리즈 167
성장일기 벽돌시리즈 백육십 칠 번째
사회가 급변하고 오늘의 정보가 내일의 유물이 되어버리는 요즘. 세상을 바꿨던 굵직굵직한 사건들에 대해서 다들 그중 소수의 파편화된 몇 개만 알고 있는 것 같고 나도 그런 거 같다. 45년, 전쟁이 끝나고 과학과 이성에 대한 회의로 탄생한 포스트모너니즘적 시류에 대한 것인데 유럽에서 나치의 광풍이 사라진 그 허무함 속에서 개개인의 생각과 상대주의적 관점이 자라나기 시작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뭐라고 설명하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을 하나의 틀로 만들어 이미 주류로 편입시킨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것보다는 사람들이 이 추상적인 개념에 대해 무엇인지 알고는 가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든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서로 힘이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가지려면 말이다. 유럽의 68 운동이 대표적일 것이다. 기존의 질서, 전통에 대해 반대를 부르짖고 개성과 자유를 기치로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시위 말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보수주의적 관점을 띈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 거 같으며 내가 생각하기에 경제적으로 안착이 되어서 보수적인 면을 띄우는 것보다는 시간에 따른 경험의 축적 때문에 자기만의 세계관을 구축하게 되는 것 같다. 이때 혼자만은 사는 것이 아니니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세계와 타인에게서 그 소스를 얻어간 것을 기초로 한다고 본다. 68 운동이 대학생들을 주축으로 했던 이유도 기득권과 질서의 타파는 새로운 세상을 위한 힘찬 발걸음이기도 한셈이다.
고인 물이 썩는다라는 말이 있듯이 생각의 흐름과 확장은 철학과 이데올로기에서 사회와 개개인이 가져야 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의 덕목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한 사상에 몰두하게 되면 내가 욕하던 그 사람처럼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본다면 말이다. 68 운동이 가져다주는 긍정적인 부분도 있긴 하지만 2년 전에 일어났던 중국의 문화 대혁명에도 일부 영향을 받았듯이 기존 질서를 파괴하겠다고 별 이상한 열화판을 가져오면 더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이미 문화 대혁명은 중국의 정신적 자원들을 완전히 깽판(?)을 치는 바람에 되레 봉신국으로 여겼던 조선의 후신인 우리나라에 와서 고스란히 남아있는 유교문화와 역사를 배우고 가는 중국 학자들도 많았다고 한다. 마오쩌둥이 전설적인 인물이었긴 하지만 흔히 이성을 무시한 사례, 자기 분야 외에 다른 분야에 무식해서 섣불리 판단을 내리면 어떻게 되는지 여실히 보여주었다.(물론 거기에 정치적이거나 의도적인 판단이 깃들어 있었을수 있다는 전제는 배제하고) 이는 동시에 68 운동이나 과격한 포스트 모더니즘 지지자들의 단점으로 지적될만한 부분이었다.
누군가는 박쥐, 회색분자라 욕할 수도 있지만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온건적인 태도가 왜 그토록 필요한지는 말을 안 해도 알 것이다. 또 그렇다고 온건주의자들이 힘도 없고 우유부단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또한 잘못된 생각이기도 하고. 내가 개인적으로 생각해 보는 것은 변화나 개선의 관점에서 사회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결국 스케일만 다른 거라 생각하기 때문에 온건적인 입장을 베이스로 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단 생각이 든다.
그래서 사회적인 면 정치적인 면에서는 각 나라마다 좌우를 정의하기는 다르지만 온건적인 입장에 대해서 견지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며 뭐 무조건적인 중립이니 욕먹는 것도 그렇긴 하지만 과격적이고 급진적인 태도로 무언가를 하다가 말아먹은 사례가 가져다준 여파가 얼마나 큰지 보노라면 인류의 보이지 않는 도서관인 역사에서 이미 말해주고 있다.
조선이 하루빨리 문호를 개방하고 적극적으로 외국문물을 받아들여서 아주 그냥 일본에게 점령당하지 않고 살아남아야 했다는 상상을 하는 사람도 많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이미 일본조차 외국문물을 받아들이고 자기들 것으로 만들고 아시아의 최초 근대국으로 자리 잡기까지 3자릿수 걸친 년도를 보냈는데 중국과 조선은 열강들이 침략해 오자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변화를 꾀하고자 했지만 하루아침에 될 일이 전혀 안되었던 것이다.
이는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이나 문화 대혁명 같은 공산주의적 이상을 실천하려다 흑역사만 남긴 사건들도 그렇다. 개인의 일상적인 삶에서 습관을 구축하는 것이나 변화를 하는 것조차 시험관에 담긴 바이러스처럼 다루어야 될까 말까인데. 물론 사회적이나 정치적으론 수많은 의견충돌이나 모든 것을 포용하려면 한계가 있기에 어느 순간 완전히 뒤바뀌어야 도움이 되는 때도 있다. 그래서 참 정답이라는 게 없는 것 같다. 오로지 케바케일 뿐이다.
다만 개인적 삶에서 그동안 급진적 변화를 추구하다 되레 역관광 당한 나에게는 조금씩 조금씩 키워나가야 극복하고 성장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온건적인 입장일지는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