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을 줄 아는 사람

성장일기 벽돌시리즈 274

by 포텐조

성장일기 벽돌시리즈 이백칠십 사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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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그것 가지고 삐지냐?" 하도 민감할 때는 그런 말 한마디에 상처받기 일쑤였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 맞아 죽는다고 그 개구리가 나였던 셈이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아무렇지 않았던 말이고 유치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때 당시에는 왜 이리 민감하게 반응했을까? 불안장애가 심할 무렵이라 기본적으로 심적 여유가 없었던 셈이다. 하나하나 놓치면 위험할 줄 알았던 생존지향형 마인드에 찌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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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에도 밝혔지만 학교폭력을 당했었던 나는 삶에 대한 전망이 밝지 않았다. 어디서 날아올지 주먹과 예측할 수 없는 폭력과 욕설은 아우슈비츠 부럽지 않은 하루하루를 보내왔던 터라 그 여파는 오래갔다. 20대 중후반이 와서야 어느 정도 밝아지고 촐싹거리는 모습이 다시 돋아났지만 예민했던 나는 항상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주변인들에게 조언을 해줄 때면 아이가 학교폭력을 당하는지 안 당하는지 주의 깊게 살피라는 말을 가끔 전해준다.


나는 숨기기 급급했지만 그때 당시에는 학교 안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밀고자 될까 봐 두려웠던 나 자신이었기 때문에 쉽사리 대처를 하지 못했다. 아무튼 그런 심적 여유를 가지지 못했던 터라 회복하기도 쉽지 않았고 일상이 짜증과 불안으로 가득 차있었던 셈이다. 그런 과거를 극복하지 못하면 대단히 힘든 삶이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회복의 궁리를 찾으려 했고 여러 가지 가르침을 배웠다.


심리치료는 가장 믿을 만한 방법이다. 책에서 보던 스티브 헤이즈를 봤던 지난해 국제 학술대회에서 마음속 비전도 새로 상기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헤이즈 교수는 인지행동치료의 제3의 물결로 알려진 "수용전념치료"의 창시자다. 예전 인지행동치료라는 틀에 좀 더 보완한 이론들이 2000년대 들어와 현장에서 본격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했는데 그중 수용전념치료도 하나를 차지한다.



9788999705717.jpg 수용전념치료 실무지침서, 스티븐 헤이즈 / 학지사

심리치료를 관심 있어 하는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워낙 뛰어나고 다양한 심리치료 이론들이 존재한다. 그중에서 어떤 것을 배우고 관심 있게 볼지는 각자의 몫이다. 헤이즈의 수용전념치료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수용과 전념이라는 개념을 중점으로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고 개선해 나가는 작업을 말한다. 여기서 수용은 말 그대로 받아들임으로 볼 수 있는데 한 가지 오해하는 부분은 수용이라는 것이 굉장히 수동적이고 그냥 참아라라는 뉘앙스로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헤이즈는 수용이란 적극적인 태도를 말하며 받아들인다는 것은 의도를 가지고 그것을 수용하겠다는 의미로 설명한다. 어쩔 수 없이 참거나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내가 그것을 기꺼이 담는 것이 수용이다. 그러면 속이 곪지 않겠냐는 의문도 들 수 있는데 생각을 통제하려면 더 문제가 되듯이 수용은 생각이나 문제를 강물처럼 바라본다.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해 주석을 붙이거나 추가적인 해석 등을 달지 않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관망만 하는 자세를 요구한다.


예상과 다르게 수용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문제사고의 강도가 약해지고 둔감해지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오히려 생각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터치를 안 한다는 것이 더 넓은 범위 통제를 의미할 수도 있다. 세세한 생각 그 자체와 싸우기보다는 옛말처럼 대인배처럼 받아들이고 넘길 줄 아는 자세를 견지하면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 요지다.


마지막으로 전념은 수용을 통해 흡수하고 넘길 줄 안다면 정말 자기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가치를 찾아내고 그것에 대해 "전념"할 줄 아는 후속 조치를 의미한다. 수용이 정말 원활하게 된다 해도 내담자 입장에서 남는 게 없는 공허한 마음이 생길 수가 있다. 지금 당장 눈에 가시 같던 남편 혹은 아내(?)가 사라지고 남은 허무함 같은 것이랄까? 이제 내담자는 자기가 원하는 삶을 위해, 기꺼이 살아가기 위해 또 다른 조건을 요구받기에 자기가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지 설정하고 임하는 것이 전념이다.


헤이즈가 서울에 와서 사인회를 할 때 나는 그의 화려한 나전칠기 같은 트로트 복장에 속으로 감탄을 했다. 서양인 특유의 개성도 개성이지만 어쩌면 남 눈치 안 보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 듯한 수용과 전념을 몸소 보여주고 있는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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