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이 때로는 화가 난다. 답답하다. 말하는 이의 주둥이를 때리고 싶다 등의 온갖 다양한 상상을 하며 이내 마음속 폭발이 일어난다. 핵폭발 같은 어마어마한 분노도 때로는 끙끙 앓고 억지로 안고 가며 살아간다. 누구나 화가 난다. 그리고 분노라는 감정을 가끔은 적절히 표출해야 개운하다.
하지만 정도가 심해지면 직장, 대인관계, 심지어 가정에 핵폭발 같은 자폭을 가져올 수 있다.
가까운 사람을 불러 술집과 노상에서 술을 까며(?) 분노를 해소한다. 세상과 타인에 대한 분노 그리고 내 처지에 대한 분노. 강렬했던 감정이 이내 잦아들면 반대급부로 수치심이 들기도 한다. 저질러 놓고 보니 평소 내가 다른 모습으로 깽판을 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사람의 감정은 무수히 존재하지만 부정적인 감정이 보다 많이 느껴지고 강렬한 것은 그만큼 인류가 우가우가 할 때부터 생존을 위해 마련된 안전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굳이 맹수의 기습을 경계할 필요도 없고, 옆 부족과 싸우는 도중에 다른 이에게 소리치거나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도 없어졌다. 분노가 일상에서 몰입감을 가져다주는 것도 있다.
지금은 한국 연예계 사업의 거두가 된 방시혁은 자기 모교에서 했던 강연에서 자기는 분노라는 감정이 여기까지 끌고 왔다는 식으로 말했던 기사를 본 것 같다. 어쩌면 예술가성향의 사람들은 예민한 감정이 있고 억눌림을 표출하는 중에 분노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나도 성격검사나 학창시절 했던 홀랜드 검사를 하면 예술가형이 나왔다. 성격이 예민한 것의 장점은 사소한 것이나 직감에 대해 파악을 잘해서 누군가가 놓치는 부분이나 아이디어에 대해 접근하기가 쉬워진다.
반면 단점은 예민하기에 남들은 그냥 듣고 흘릴 수 있는 말에 상처를 받기 쉽고, 그것에 대해 끙끙 앓기도 한다. 그러기에 나에게도 분노, 짜증이라는 감정은 언제나 같이 있기는 싫으나 어쩔 수 없이 사는 룸메이트와 같다.
다양한 감정을 더 이상 억누르지 않고 표출하는 시대에도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은 헐고, 상처가 나기가 쉽다.
21세기에 들어와서도 다양한 심리치료가 발전되어 왔다. 그중에 아마 몇몇 분들은 들어본 "마음 챙김"이란 개념을 알고 있으리라 본다.
마음 챙김은 서구권 심리학자들이 현재 동양의 명상과 불교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들어낸 치료기법 중 하나로 상황,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해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유튜브를 틀면 명상하기 좋은 음악이나 무슨무슨 우주와의 결합을 위한 음악이라며 배경은 티베트 승려들이 명상하는 장면으로 주야장천 부담스럽지 않은 느긋한 분위기의 음악이 흐른다.
서구권에서 불티나게 유행하고 있고 심지어 헐리우드 스타들도 동양의 오리엔탈리즘에 빠져서인지 신비한 느낌의 마음 챙김을 명상으로 해나간다. 사실 여기서 한마디 짚고 갈 것이 있는데 마음 챙김 기법이나 명상이 물론 효과적이고 실제로 연구에서도 계속 증명이 되니 학계나 대중에서도 인기가 많은 것은 알고 있으나, 찾아내고 발전하고 보급하는 과정에 나는 괜스레 질투랄까? 그런 감정이 들었다.
불교철학이나 마음 챙김의 개념을 이용한 것은 좋으나, 그걸 마치 떠받들어 모시는 학계의 분위기가 탐탁지 않았다. 괜히 본인들의 아이디어나 문화에서는 찾아내기 어려우니 차별화하고자, 또 오리엔탈리즘에 빠져, 마치 신비한 무언가를 찾아내어 효과를 보니 그동안의 심리치료는 거들떠는 안 보고 그것에만 연구가 진행되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여하튼 나의 느낌은 그랬고 실제로 결과는 좋을지 모르나 명상은 쉽지 않았고 아직은 낯설다.
대신 같이 나온 치료기법 중의 개념 중 하나인 수용이 개인적으로 맘에 들었다. 마음 챙김과 흡사하고 같이 분류되기도 하지만 수용도 마찬가지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런 감정이나 생각에 대해 스스로 옭아매지 않는 법을 알게 된다. 마음 챙김이 보다 넓게 보려는 포괄적인 개념인거 같단 생각이 들고 뭔가 특별한 활동인 명상 같은 걸로 치유하고자 한다면, 수용은 일상에서 그런 감정이나 생각을 회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려는 하나의 태도이다.
처음에 수용도 맘에 들지 않았다. 마치 체념과 같은 느낌을 받고 수동적인 느낌 또한 받아서 별로였다.
하지만 막상 살펴보니 수용은 굉장히 적극적인 작업이었다. 스스로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또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해 쉽사리 판단하는 쪽으로 끌고 가지 않게끔 나를 훈련시켜야 하기에 이것도 고역이다.
하지만 무수한 자조서들이 말하듯 "반복이 완벽을 만든다"라는 말처럼 어느 순간 완벽하진 않더라도 적어도 회피하지 않고 그 속에서 뭔가 전념할 수 있는 부분을 찾으려고 노력하게 된 것 같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나의 작은 항아리 같은 소인배적 마인드에 좋은 것들을 채워 넣기 위해선 안 좋은 것도 받아들여야 항아리가 무탈함을 이제는 조금 알 거 같다. 분노도 마찬가지로 책상을 뒤집어 엎을 만큼 에너지가 요동치지만, 이내 자리를 잠시 떴다가 다시 가라앉고 제삼자가 보듯이 분노를 바라보게 되면 나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목격했다.
감정이란 녀석은 바꾸려고 하거나 외면하게 되면 오히려 생떼 쓰는 아이처럼 관심을 더 달라고 더 극성일 수 있다. 그렇기에 다른 부분에 초점을 맞추거나 생떼를 멈출 때까지 열받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그냥 관망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