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2016년 5월 7일. 극심한 공허함에 빠져버렸던 삶에 큰 경종을 울리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나는 우울한 일상을 보내고 있던 터라 활동을 하더라도 이내 집에서는 열몇 시간씩 잠만 자기 일쑤였다. 그런 생활이 휴학을 통해 이어지면서 집에만 혼자 있으니 우울감은 이내 공허감으로 발전되어 나를 찾아왔다. "나는 왜 살아가야 할까?" 왜라는 물음에 쉽사리 답은 떨어지지 않고 밥맛도 잃어버리고 중심을 잃어버린 방황하는 영혼의 삶이 계속되었다. 가끔 침대 위에 누워 천장 대들보를 보며 극단적인 생각도 했던 만큼 내 상태는 날로 심각해져 갔다.
그런 나에게 한줄기 빛이 되어준 책이 "죽음의 수용소에서"였다. 베스트셀러이기도 하고 사람들한테 자주 명서로 오르락내리락하던 예전에 한 번 책을 읽어보고는 "아 그냥 홀로코스트 생존 에세이구나"라고 생각하고 이후 마주 칠일이 없었지만 어느 날 답답한 마음을 해소하고자 서점에 갔다가 그 책을 다시 보았다. 나는 예전 과 결이 다른 지금의 내 상황이 홀로코스트와 같단 생각에 구입해 귀가하자마자 바로 읽었다.
첫 번째 읽었던 때와 다시 읽었을 때의 느낌이 전혀 달랐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읽었고 책은 누구나 겪고 있는 삶의 의미의 방황에 대해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어떠한 삶이든 견딜 수 있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유로운 선택으로 의미를 추구할 수 있고 그것을 채워나갈 수 있다.
책 속의 주옥같은 문장에 나는 마음이 울렸고 이내 방황을 멈추고 답을 찾아낸 것 같다는 느낌을 강렬하게 받았다. 또한 의미는 본인 스스로 찾아내는 것이고 오로지 성취하는 이는 자기 자신이라는 글에서 확신을 얻었다. 그동안 일기를 쓰면서 계속해서 내가 살아야 할 이유에 대해 나 자신에게 계속계속 되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나의 의문이었고 답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식견이 좁아 그동안 우울한 생각과 감정에 빠져들어 다른 것들이 보이지 않았고 또 그런 것에서 의미를 전혀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빅터프랭클이 홀로코스트의 광풍 속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와중에도 삶의 이유를 상기하며 버텨냈고, 낙관적인 희망으로만 버티다가 이내 절망의 문턱에서 힘을 잃고 죽은 동료 수감자를 이야기한다.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 회피하고 외면하는 이의 좌절은 그에게 더 충격적이었다. 가족들이 몽땅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이해도 프랭클은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수많은 수용소를 끌려가며 끊임없이 버텨 나간다. 전기울타리를 보고 문득 몸을 던지고 싶다는 자살충동에도 그는 그동안 몰래 쓰고 있는 종이 쪼가리와 신앙으로 이 악물고 시간을 보낸다.
그가 의사여서인지 다른 수감자와 다르게 막바지에는 아픈 수감자를 돌보는 시설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매일 죽어나가는 동료를 보며 인간의 감정마저 이제는 과거의 전유물이 되어버렸다. 언제 죽일지 모르는 나치의 변덕스러운 명령에 운이 좋게 살아남았고 최후의 선택에도 그는 다가오는 패배로 나치가 급히 다른 수감자들에게 트럭을 타고 같이 이동할 것을 회유할 때 시설에 남아 죽음을 맞이하기로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동한 수감자들은 나치에 의해 감금되어 산 채로 불타 죽었다.
결국 그는 살아남았다. 그런데 의심이 많던 나는 의사라서 어느 정도 생존 운이 좋다고 생각했었다. 또 수용소 내에 필수 인력 중의 하나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운에 대한 나의 생각도 저번글에서 썼듯이 달라졌다.
끝까지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을 쳤기에 운이 얻어걸린 것이지. 이내 체념하고 삶을 마감했다면 그런 기회조차 그에게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빅터 프랭클은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아 다시 정신과 의사로 일을 하며 훗날 로고테라피라는 심리치료를 만들어 냈다. 실존주의 심리치료로 분류할 수 있는 로고테라피는 삶의 이유에 대한, 현재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힘들더라도 정면돌파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오늘날 심리학에서 빅터프랭클이 제시해 준 삶의 의미에 대한 통찰은 적지 않은 수많은 영역에 영감을 주었고 이론들의 근원이 되어 그가 삶을 마감한 후에도 후대에 영향을 주고 있다.
나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은 후 나만의, 나를 위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다 그렇기에 나라는 존재 자체가 고귀하고 존엄한 존재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무리 머리 굴려서 의미라는 것을 찾기 어려웠던 것도 각자만의 삶의 의미가 다 달랐기에 어느 것이 정답이라 내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내 삶의 의미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것에 희망을 얻고, 내 안의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아 지금도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