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빛의 여정 89화 / 8장 세번째 조각
장편소설 빛의 여정 89화 / 8장 세번째 조각
"지금은 알지 못할 것이다. 나중에서야 완성된 그림을 보고 감탄하는 자처럼 아나트라, 너 또한 그러할 것이다" - 선지자의 증언 중 피데라
아침이 되고 다시 한번 이 구역의 마녀가 누구인지 간만에 보여주는 루네의 몰골에, 옆에 있던 시테온이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옆에 일어나 앉아 있었다. 루네는 눈덩이가 밤새 심하게 맞은 사람처럼 부어 있었고 웃기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가만히 있어도 헝클어진 머리에 부은 얼굴이 가관이었다. 이질바이나 수도원까지 오는데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몸이 고된 모양이었다. 시테온이 그런 루네를 바라보며 하품을 쩍 하며 입을 벌리자 루네가 입은 다문 채 오만 짜증 난 표정으로 그를 향해 발로 차는 시늉을 보였다.
로이딘도 일어나서 빈 속이 쓰려 잠시 가만히 앉아 있다가 창문을 여니 금새 바깥의 찬 공기가 몰려왔고 세 사람 모두 붕 떠있던 정신이 순식간에 깨워졌다. 로이딘이 먼저 방을 나가 건너편 방의 갈리스의 방문을 두드렸다. 인기척이 들려왔고 갈리스가 문을 열어주었는데 이미 그는 진작에 일어나 있었던 건지 말짱한 모습이었다. 머리 손질을 하는 루네와 세수하는 시테온, 식탁차림을 잠시 거들어 주는 로이딘. 곧 얼마 안 있어 갈리스와 세 사람 모두 아침 식사를 하게 되었다. 갈리스가 기도를 드리자 모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피데라께 감사드렸다.
아침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딱딱한 빵에 조금 진득한 겨울수수 스프가 자리했다. 그나마 수도원에 비축된 식량으로 갈리스가 계란을 볶아서 내주었고 초대된 세 사람 모두 순식간에 그것을 비워냈다. 갈리스는 빵을 스프에 찍어먹으면서 로이딘을 향해 말했다.
"그래서 이제, 헤르논으로 돌아갈 셈인가?"
로이딘이 끄덕였다.
"그럴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잡혀간 사실과 캠프에 있었던 일 그리고 조각을 찾은 것까지 말씀 드려야겠죠"
갈리스가 반응하지 않은 채 빵을 먹고 있었다. 시테온은 수프 그릇을 들어 얼굴까지 파묻힌 채 들이키고 있었고 루네는 인내심 있게 수프에 빵을 담가 촉촉히 만들고 있었다. 갈리스가 잠시 조심스럽게 말했다.
"불길한 말일지 모르지겠네만... 혹시라도 목숨이 위험해져 피신처가 필요하다면 이리로 오게나"
로이딘이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그게 왜 불길한 겁니까? 저희에게 도움을 주시겠다는 말씀이시잖아요. 큰 힘이죠."
갈리스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고 답했다.
"도움이 된다면 좋겠지만 지금 자네들이 가지고 있는 조각들이 하나 둘씩 계속 모일 수록, 대륙 모든 곳에서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자들이 많아질 것 같아서 말이야"
루네가 이를 인정 했다.
"안 그래도 저도 그 생각을 해보았어요. 조각을 탐내는 자들만 해도 저희가 가진 조각 수 만큼 늘어나는 느낌이에요"
아보테, 빛의 심판 그리고 이그네움 자체를 노리는 잠재적 위협들까지. 로이딘은 갈리스의 제안에 감사드린다며 그러하겠다 답했다. 이윽고 아침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은 떠날 채비를 갖추었다. 벗어두었던 갑옷을 다시 입었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땀이 비오듯 했다. 무시 못할 무게의 철판을 덧댄 가죽갑옷은 추운 날 훌륭한 보온성을 자랑했지만 반대로 흘리는 땀이 많아 식어질 수록 뼈마저 시리게 했다. 수도원에 도착해 갈리스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긴장이 풀리자 그들은 그제서야 갑옷을 벗고 바람에 말렸다. 다시 찾아온 아침. 이제 각자 무기와 방패를 손에 쥐었다. 캠프 전투때 방패에 박힌 화살들은 어떻게든 힘을 줘서 뽑아내 정리되었다.
그들을 배웅하는 갈리스는 지팡이를 짚고 정문을 향해 걸었다. 허름하고 펄럭이는 수도복차림에 회색 머릿칼 몇 개가 바람에 날리니 마치 잿빛 하늘에 둥둥 떠오른 사람 같았다. 세 사람이 이제 수도원의 정문을 지나가고 돌아서 갈리스를 마주 보았다. 로이딘이 갈리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선생님 덕분에 저희가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또 무엇을 해야 할 지 알게 되었습니다. 보호해주신 조각도 감사드립니다"
갈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헌데 자네들이 이제 없으니 나 혼자 지내야 할 판이니 또 쓸쓸해질 것 같아. 어제 같이 있어보면서 이 수도원은 내게 너무 과분하게 큰 곳임을 느꼇네. 아무래도 수도원은 내버려두고 가까운 곳에 오두막이라도 짓고 살아야 할까 싶어"
모두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갈리스는 그럼에도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그 생각이 떠올랐네. 로이딘. 자네가 처음 전투 수도사로서 외지에 와서 요상한 일을 겪고 조각이 있을 것이라곤 상상도 못한 이 먼 곳에서 또 나를 마주하게 되었지 않았나? 어쩌면 피데라님께서 자네들을 인도해주시고 있다는 느낌이 들고 있어. 이 말은 즉슨, 자네들은 어딜 가든 훌륭히 해 낼 수 있을 거야"
로이딘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시테온이 대신 답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루네도 말했다.
"덕분에 저희가 편히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갈리스가 이제 두팔을 벌리며 말했다.
"이제 얼른 가게. 이곳을 내려가는 데 다시 시간이 많이 필요할테니까"
로이딘이 답했다.
"그럼 몸 조심하십시오. 좋은 시기에 다시 뵀으면 합니다. 갈리스"
갈리스가 고개를 말 없이 끄덕였다.
로이딘 일행은 뒤를 돌아 비탈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갈리스는 내려가는 세 사람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하늘을 한 번 올려다 본 뒤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뒤를 돌아 문을 닫고 들어갔다.
루네가 내려오면서 말했다.
"헤르논으로 그러면 빨리 가야할텐데 이런 걸음마라면 소용이 없을 거야"
시테온도 적극 동의하며 말했다.
"맞아 맞아. 이질바이나는 개미 하나 없으니 어디 여관이라도 있는지 알아보고 거기서 상인 마차라도 얻어타는게 낫지 않을까?"
로이딘이 말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여관이 우리가 오는 내내 보이지 않았잖아"
루네가 답했다.
"모르겠다. 일단 걷다보면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라도 보이겠지 뭐"
바위산 중턱에서 무장한 이들 전투 수도사 세 명이 이질바이나를 바라보며 내리막 길을 걷고 있었다. 올라갈 땐 보이지 않던 이질바이나의 깨끗하고 고요한 풍경이 새삼스럽게 그들의 눈을 적시고 있었다. 그나마 쉼 없이 걷고 있는 그들에게 한 줌의 위안이 되고 있었다.
90화에서 계속...
"때가 차매 그 빛이 다시 솟아나리라"
(매주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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