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빛의 여정 93화 / 9장 불씨 운반자 네이즈
장편소설 빛의 여정 93화 / 9장 불씨 운반자 네이즈
불씨 운반자, 아보테 왕국에서 정제하여 만든 보급형 이그네움을 외교적 무기로 삼아 대륙의 세력들을 상대로 주기적인 협상 또는 조공 관계를 형성하는 사절 내지는 아보 형제들의 사제들을 말한다. 일련의 이야기는 모두 불씨 운반자 네이즈가 대륙 동쪽의 소국 크리넬을 방문하면서 비롯되었다. 네이즈의 돌발행동과 함께 만신전에서 로이딘 때문에 일이 크게 틀어졌다. 그 후 데센이란 고위 사제를 죽임으로써 조각을 로이딘에게 빼앗긴 사실을 커지지 않게 하려는 동시에 아나티리캄 이단추적대 본부에서 자신의 임무 실패를 해명하고 난 뒤, 네이즈는 종적을 감추었다. 당분간은.
그는 자신이 선택받은 자임을 다시 한번 거울을 보면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아보의 대신전에서 주셨던 대주교의 말씀이 여전히 귓가에서 생생히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 뜻을 받들기 위해 그는 자신의 호위대를 편성하고 말을 타고 순식간에 수도 디고를 빠져나갔다. 동쪽의 정문은 언제나 사람들이 붐비었고 대륙의 최대도시답게 인파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네이즈는 저 개미보다 못한 목숨 값을 지녔다 여기는 자들을 무심히 바라보며 지나갔다. 과거 자신을 지키던 호위대를 다시 불러들였다. 호위대장 제론도 역시나 같은 위치에서 네이즈 옆에서 말을 타고 외지인 다운 경박함을 뽐내며 주절거리고 있었다. 그래도 네이즈는 제론을 가볍지만 믿을만하다 여겼다.
제론이 외쳤다.
"정말 감개무량합니다. 네이즈님. 우리가 다시 쓰임 받다니요! 이거야말로 아보님의 축복이자 대주교님의 자비 아니겠습니까?"
네이즈는 말에 몸을 맡기며 대꾸하지 않았다. 제론은 여전히 뒤에 있는 다시 만난 부하들과 떠들고 있었고 네이즈의 반응엔 별 아랑곳 하지 않았다. 네이즈와 제론 포함 호위병 22명은 모두 공범이었다. 데센과 7명의 사제들이 목없이 동굴 안을 헤메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들은 여전히 살아서 제 삶을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건 이후로 모두 입을 철저히 닫고 살아갔으며 오늘 만난 이 자리에서도 그들은 눈으로만 서로의 과거를 다시금 확인하고 있었다.
네이즈가 디고에서 반나절 떨어진 마을의 여관을 통째로 빌리고 모두 실내로 들어오게 해놓고 임무를 상기시켜주었다. 이단 추적대가 놓쳐버린 로이딘 일행을 찾아서 반드시 조각을 회수하는 것. 조각에 대해 아는 사람은 대주교와 국왕 그리고 극소수의 교단과 이단추적대 간부들 뿐이었다. 아나티리캄에서 일어난 소요사태로 제 살림하나 못 지키는 이단 추적대 대신 네이즈가 이때 자원한 것이었다. 대주교는 로이딘의 위치를 알 순 없어도 대륙에 위치한 조각들이 어디 있는 지를 알고 있으니 오기를 기다리거나 유인하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네이즈는 자기가 머리를 숙여 잘못을 고하던 이단 추적대가 그리 된 것을 쌤통으로 여기고 지금이 추적대장 파사니만의 콧대를 꺾고 정치적으로 성공할 좋은 기회라 여기고 있었다.
이후 아나티리캄을 며칠 간 달려 도달하니 검은 비둘기가 하늘에서 날아오면서 제론의 팔뚝에 닿았다. 그러자 제론이 비둘기의 다리에서 원통을 찾아 쪽지를 뽑고는 네이즈에게 건네주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아나티리캄의 이질바이나에서 물건이 사라짐, 심문을 해본 결과 피데라시스 수도원에 있는 것으로 보임"
네이즈를 포함한 전원 24명이 타고 있는 말들의 머리가 모두 이질바이나로 향해 거침없이 달려갔다. 겨울 수수 밭을 가꾸고 있던 농부들이 파악 할 찰나에 이미 쏜살같이 병력들이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그나마 눈에 띄는 건 보라색 옷을 입고 앞서가는 네이즈였다.
제론이 이질바이나로 향해 가던 중에 물었다.
"어떡 하실 겁니까?"
네이즈가 답했다.
"뭘?"
제론이 다시 물었다.
"로이딘과 그 잔챙이들 말입니다"
네이즈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무심한 척 답했다.
"고문하다 죽일까, 그냥 베어버릴까 생각 중이야. 그때 가서 감정에 맞게 판단해보자고"
이단 추적대가 헤르논에 있던 베일런의 저택에서 몰살당했단 소식을 이미 들었기 때문에 호위병들의 무장도 더 신경써서 준비했다. 쉽게 뚫을 수 없는 판금투구와 갑옷에 날을 세운 창과 검들. 네이즈와 제론, 그리고 궁수 6명을 제외 한 모두가 등 뒤에 방패를 매달고 갔다. 턱을 단단히 문 네이즈는 마음 속 복수의 칼날도 다시 한번 날카롭게 벼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네이즈는 이번엔 자신을 맞서는 자들을 직접 움직여 도륙내리란 욕구가 앞장섰다. 그는 과거와 달리 이젠 이단추적대의 메스머처럼 마법을 부릴 수 있었다. 당분간 활동을 하지 않은 남모르던 시간 사이에 교단에서 전수되고 있던 마법을 배우며 여러 금지된 지식을 찾고자 안간힘을 쓰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덕분에 새로운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에 대한 댓가도 치뤄야 했지만. 네이즈의 눈동자에서 제론은 보지 못할 뜨거운 검은 열기가 살아나고 있었다. 그의 숨 소리와 함께.
94화에서 계속...
"때가 차매 그 빛이 다시 솟아나리라"
(매주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 연재)
[당신의 좋아요, 구독은 작가에게 창작의 에너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