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인 끊는다고 안하길 잘했지
내 브런치 상위 랭킹 글 중 하나가 바로 커피 끊은 이야기이다. 글 쓴지 오래 되었지만 아직도 심심찮게 라이크가 달린다. 그런 반응을 보며 한국 사람들에게 있어서 커피 끊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느낀다.
내가 커피를 끊은지가 정확히 작년 11월이다. 위장건강을 위해서라는 목표 하에 울며 겨자먹기로 커피를 줄여나갔었다. 그리고 한 달의 노력 끝에 습관을 고치는데 성공했다. 날마다 꺼내던 모카포트는 그 이후 주방의 찬장에서 나오지 않았고 커피 원두를 구매하던 사이트의 비밀번호도 잊어버렸다. 자주 가던 커피전문점도 거의 6개월은 안 간 것 같다.
물론 커피를 끊기로 다짐한 이후, 한 세 달 동안 디카페인 커피를 마시며 말그대로 전전긍긍했다. 커피는 너무 마시고 싶은데 커피를 끊기로 했으니, 그나마 죄책감을 덜 느끼는 선택이 디카페인 커피였다. 하지만 시중에 나온 디카페인 커피가 도통 맛있질 않았다.
가끔 맛있는 디카페인 전문점을 찾아도 대중적인 브랜드가 아니라서 맘 먹고 가야했다. 하지만 예전보다는 커피에 대한 열정이 식어서인지 맛있는 디카페인 커피를 찾아 시간을 내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지난 달, 급하게 태국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고 거기서 태국의 홍차 전문점에 가게 되면서 그 맛에 눈을 뜨게 되었다. 카페인과 설탕이 적절하게 섞인 타이 밀크티와 얼그레이 밀크티를 번갈아 마시며 나는 홍차 속으로 급 빠져들었다.
그간 카페인 청적지역이던 내 몸은 홍차로 인해 빨라진 심박을 긍정으로 받아들였고 나는 상쾌한 느낌과 기분 좋음을 느꼈다. 물론 그게 카페인에 의한 화학적이고 일시적인 것인 반응이란 것을 알았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그 느낌이 짜릿했던 것도 사실이다.
여행을 하던 기간 동안 나는 티 전문점에 날마다 가서 뜨거운 홍차와 차가운 밀크티를 번갈아 마셨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아! 나는 중독에 약한 사람인데. ” 하며 조심스레 걱정도 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한국에 돌아온 나는 바로 홍차를 검색했다. 날마다 마시고 싶은, 그렇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그 느낌 때문이다. 다른 무엇보다 내 취향은 얼그레이였다. 아주 심혈을 기울여 티백 20개가 들어있는 박스 몇 개를 사서 절반은 회사에, 그 절반은 집 서랍장에 넣었다. 집중이 잘 안된다 싶을 때 티백을 열어 한참동안 얼그레이의 향기를 맡았다. 그 알싸하고 매혹적인 향을 도저히 저버릴 수가 없다.
커피를 끊었지만 다시 홍차에 중독되버린 상황, 이게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얼그레이의 카페인이 어느 정도 되는지를 검색했다.검색을 통해 살펴본 결과 홍차 종류에서 얼그레이의 카페인은 비교적 높은 편이라고 한다.하지만 커피에 비해서는 확실히 적었다. 홍차가 한 잔 당 14-61mg라고 하면 카페인은 95-200mg 정도라니까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그런데 한 편으로 이런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얼그레이를 두 세 잔 먹어도 커피 한 잔이 안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하지만 얼그레이에 중독된 것을 알고 있는 이상, 하루 한 잔 이상의 홍차는 마시지 않기로 결의를 다졌다. 그러면서 얼그레이를 마시지 않는 날을 정했다. 일주일에 하루는 카페인 디톡스 위해 홍차를 마시지 않기로 했다.
‘커피를 끊는다고 했지요. 카페인 끊는다고는 안 했잖아요.’ 나는 이렇게 스스로에게 발뺌을 한다. 5만 뷰에 가까워진 ‘커피 끊으면 생기는 일’이라는 글에서 카페인을 끊겠다고 호언 장담 하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가 싶기도 하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예전 커피 중독 때처럼 아침에 홍차를 안 마시면 죽을 것 같거나 홍차 없이 일이 안된다거나 하진 않는다는 점이다. 회사에서 일할 때는 홍차에 의지하기도 하지만 주말에는 홍차를 마시지 않아도 괜찮다. 예전이라면 조금의 카페인도 없이 하루를 보낸다는 게 정말 곤혹스러운 일이었는데 요즘은 참을만 하다.
온전히 카페인을 떨쳐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그래도 다시 돌아가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커피를 끊기로 한 다짐이 6개월이 지난 이 시점에 커피 끊기에 실패했다는 글을 올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인생에 커피 마신 기간을 합치면 25년인데 그걸 어떻게 단 기간에 다 끊어낼 수 있겠냐며, 그래도 6개월 동안 꾸준히 이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큰 위안이 된다.
지금의 나는 홍차를 끊을 생각이 없다. 하지만 나중에 또다시 몸과 카페인 밸런스를 마줘야 하는 때가 오면 그 때 또 시도를 해보지 않을까 싶다. 지금은 홍차의 그 세련된 풍미를 좀 더 즐겨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