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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초롱 Aug 06. 2023

텅 빈 마음 채우러

6화

남달라는 자신의 비밀얘기를 나에게 털어놓은 것처럼 '과장님,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 주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도치 않게 나와 남달라 사이에는 둘 만 아는 비밀이 생겼다.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것보다 거리감을 두는 것이 편했기 때문이 이 상황이 아주 달갑지는 않았지만 관리자의 입장에서 해야 할 역할쯤으로 생각하고 넘기기로 했다.


남달라가 자리에 들어가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안조은이 뭐가 또 불만인지 입을 쌜룩거렸다. 메일을 보면서 들으라는 듯이 '일을 뭐 이따위로, 나 참' 하는 소리가 내 귓전까지 전해져 왔지만 상관하기 싫어서 흘렸다. 안조은 옆에 앉은 주임들도 어떤 애기가 들리든 그냥 무시하고 마는 눈치였다.


반면 파리한 모습으로 자리에 앉은 남달라는 슬슬 책상 위의 물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향수, 화장품, 머리끈, 비싼 영양제들을 모두 서랍장에 다 넣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며칠 전에 샀던 비싼 가방은 보란 듯이 올려뒀다. 심지어 그 가방에 먼지라도 묻지 않았을까 싶어 이리저리 돌려보며 가방 상태를 살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누구도 평범한 사람이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평범한 직장인'이라는 말에 들어맞는 사람이 있기나 한 걸까. 사무실의 몇 사람만 봐도 유별난 구석이 있다.


-저 사람은 불평중독자

-쟤는 쇼핑중독자

-나는 알코올중독자


나는 속으로 이런 식으로 사람들과 중독을 지목해 봤다. 나를 포함해 우리 사무실에는 다 중독된 사람들뿐이다. 우습기도 하고 참 씁쓸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날 나는 다시 버스 정류장을 찾았다. 새벽 5시에 일어나는 것은 정말 고역이었지만 그래도 무엇인가를 터놓고 말할 사람이 있다는 것이 내겐 더 중요했다. 그 상대가 비록 몇 번 만난 적 없는 낯선 사람일지라도.


지난번처럼 버스정류장에 앉아 한가한 도로를 바라보고 있을 무렵 저 멀리서 깔끔한 차림의 신사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상체를 꼿꼿이 세워 그가 걸어오는 것을 지켜봤다. 그것을 눈치챈 신사는 빙긋이 웃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네. 좋은 아침이죠."


인사를 나누고 나니 어떤 말부터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며칠간 있었던 일들이 꽤나 복잡해서인지 입 밖으로 내려니 정리가 안 됐다. 그럼에도 나는 가족, 친구, 직장 동료와는 다르게 신사에게 말을 할 때는 편안했다. 무엇을 말해도 어차피 그 사람은 나에 대해 아는 것이 없을 테니 판단하지 않을 거였고 꾸준히 만날 사이도 아니었기 때문에 잘 보일 것 없었다.


신사는 어릴 적 사탕가게 앞에서 내 말을 들어주던 할머니 중 한 명이자 외국에서 만난 이름 모를 여행자 중 한 명, 그야말로 스치는 인연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나를 꿰뚫어 보는 것처럼 내 생각을 잘 알았고 적절한 자극과 해결책을 줬다는 거였다.


신사는 늘 그랬던 것처럼 벤치에 앉았다. 그러자 나는 운을 뗐다. 가장 처음으로 나왔던 문장은 '별 일은 아니고'라는 말이었다.


"별 일은 아니고 나주임이라고 후임이 있는데 카드빚 때문에 돈 빌려 달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요?"


"옆에서 보면 항상 그렇게 비싼 물건을 잔뜩 사고 그게 감당이 안 돼서 환불하기를 반복해요. 대체 왜 그러는 걸까요?"


나는 그 질문을 하면서 남 일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나한테 속사정을 얘기하니 신경 쓰여 죽겠다고도 덧붙였다. 그러자 신사는 알 것 같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허전함을 채울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니 그렇죠."


"허전함이요?"


"김 과장님도 허전함을 채우려고 매번 그렇게 술을 마시잖아요. 남주임도 그런 거라고요."


"에휴, 남주임 말로는 같이 다니는 부자친구처럼 대우받고 싶어서 그랬다는데요."


신사의 말에 또다시 나는 불편한 마음이 들어 어색하게 웃었다. 다른 얘기로 화제를 돌릴까 싶었지만 신사가 계속 이어서 얘기를 하는 통에 그러지 못했다.


"남주임이라는 분은 평소에 굉장히 대우받고 싶었던 모양이네요. 그렇게 해서라도 사람들이 자신을 좀 봐주길 바랐던 게 아닐까요. 그것 때문에 계속 물건을 사구요."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텅 빈 마음이 다 충족되지 않으니 계속 사고 또 사기를 반복했을 테고요. 사실 쇼핑으로 얻는 효과는 일시적일 뿐이에요. 마음을 채우려면 다른 것을 하면 되는데 대부분 사람들이 그걸 모르죠."


"그게 뭔데요?"


그때 마침 한 대의 차량이 우리 앞에 섰다. 그는 다음번에 더 자세히 얘기하자는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차에 올라타고서는 인사를 건넸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차림새를 보고 짐작은 했지만 기사를 대동해서 다닐 정도의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질 못했기 때문이다. 통성명이라도 해둘 것을... 나는 신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두지 않았던 것을 내심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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