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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니 Oct 09. 2023

코드가 맞아서 결혼한 남자

본격 남편 자랑 에세이 '빵세 리포트' 3화

비혼주의자였던 내가 29살에 결혼을 하겠다고 말했을 때 우리 엄마는 그야말로 깜짝 놀랐다. "니가? 결혼을? 진짜? 안 한다며?" 늘 차분하던 엄마가 당황해서 다다다 질문 폭격기가 되었던 그 날의 기억은 지금도 생각해도 웃음이 난다.

엄마는 내가 남편과 연애를 할 때 '아마도 이 친구가 사위가 될 것 같다' 싶었다고 했다. 연애초기에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남편과 우연히 마주친 순간 나와 닮았다고 느꼈을 때 그 생각이 처음 들었고, 회식 후 만취한 나를 어깨에 들쳐없고 데려다줬을 때 확정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사실 후자의 경우에는 토하고 징징대고 정줄을 놔버린 주취자 그 자체였던 역대급 진상을 떤 딸네미를 저렇게 콩깍지가 씌여서 예쁘게 보는 남편을 보고 '이 녀석이 아니면 안돼!'라고 느낀 엄마의 위기감일지도 모르겠다.


그 때 우리집은 방배동의 상당히 언덕배기 쪽에 위치한 곳에 살고 있었는데, 남편은 취해서 축 쳐진 나를 어깨에 걸치고 내 가방을 이빨로 물고 그 고난의 언덕길을 올랐었다. 엄마 말에 의하면 어디선가 헉헉 대는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데 우리집으로 가까워지는 소리라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일인가 고민을 했었다고 한다. 곧 문을 두드린 남편이 거친 숨소리와 함께 '어머니 문 좀 열어주세요' 했을 때 다급히 뛰어나갔는데 남편이 나를 어깨에 걸치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는데, 그 순간 '얘야, 얘다! 이 친구가 아니면 안된다!'라는 생각이 파도처럼 몰려왔다고 한다.

나는 다음날 일어나서 이 사건을 알게 되었는데, 남편에게 감사와 사죄의 전화를 하기 위해 가방을 찾은 순간 감동을 받아서 울었다. 가방이 왠지 묵직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가방 안에는 각종 숙취해소제가 가득했고 핸드폰에 메시지로 비싼 가방이니 상하지 않게 손잡이를 손수건으로 둘러서 물었으니 이빨 자국은 남지 않았을 건데 만약 이빨 자국이 남았으면 좋은 걸로 새로 사준다는 것과 숙취해소제 꼭 챙겨먹고 푹 쉬고 연락 달라는 메시지가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를 사랑해주는, 사랑스러운 남자가 있다니! 하지만 그래서 남편과 결혼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이 사람과 삶의 궤적을 함께 그려나간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완전히 다른 영역에 있는 이야기였다. 남편이 청혼을 하기 전부터 청혼을 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계속 말했으니까. (웃음)

아마도 내가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가지고 청혼에 답하도록 남편 나름의 배려를 했던 것 같다. 나는 너에게 청혼을 할거니까 너도 결혼에 대해 생각해보라고 말이다.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는 비혼주의의 길을 가겠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결혼을 결정하는 기준이 있을 턱이 없었다. 나는 절대 결혼은 안 할거니까 생각해볼 것도 없어라고 하기엔 남편을 너무 사랑했고 이상형(나중에 알고 보니 기피형이기도 했지만)이었기에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결정으로 놓치기 아까운 남자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혼을 해서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의 형태를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했을 때 대부분은 결혼을 할 수 있는 여견인지에 대해 먼저 판단하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결혼식은 어떻게 하고, 결혼에 드는 비용은 어떻게 할지, 집은 어떻게 할 건지, 현재 소득 수준은 어떻게 되는지, 자녀 계획은 어떤지 등에 대해 말이다.

그런 부분으로 따져보면 남편과 결혼을 선택하면 안됐다. 청혼 당시에 남편은 모아둔 돈도 없고 직업은 보험설계사라 수입이 왔다갔다 했고 시댁에는 경제적인 어려움까지 닥쳐온 상황이었다. 내가 청혼을 거절한다고 해서 남편이 헤어질 사람은 아니었다. 아마 포기하지 않고 계속 청혼을 할 사람이었다. 그 당시에도 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내 입장에서는 결혼이 급하지도 않았고 남편이 충분히 준비가 되고 나서 해도 되는 결혼이었다.


그때 갑자기 떠오른 건 엄마가 늘 해왔던 이야기들이었다. 과거 시대의 여성으로서 늘 자신의 삶의 방향성을 주도적으로 선택하기 어려웠던 엄마는 늘 내가 진취적인 여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조언을 해왔는데, 그 중 결혼과 관련해서 했던 다음의 말들이 떠올랐다.

결혼은 선택, 직업은 필수다.
결혼을 한다면 코드가 맞는 사람과 해라.
가난이 앞문으로 들어오면 사랑이 뒷문으로 나간다.  


나는 이 소리를 국민학생일때부터 들었다. 늘 생각하지만 우리 엄마는 진짜 대단한 엄마다. 내 뇌리에 인이 박힌 엄마의 이야기들이 내가 결혼을 결정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고민 끝에 나는 남편의 청혼 D-Day가 오기 전까지 결혼의 가장 중요한 기준을 '코드가 맞는지 아닌지'로 두고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러자 결론이 굉장히 심플해졌다. 이 결혼은 해야한다는 것으로 말이다.


남편은 책을 좋아하고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서로 읽은 책의 장르가 다르다는 것도 재밌고 그 책의 이야기를 서로에게 들려주는 것도 재밌었다. 책을 많이 읽어선지 서로가 가진 다양한 폭의 지식의 이야기가 통하는 재미도 있었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대해서 많이 알고 세계사나 국제 정세, 시사, 우주 과학 등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삼국지에 대해서도 능통했다. 남편도 나도 서브컬쳐 문화에 관심이 많아서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을 무척 애정하는 사람이고 함께 드라이브할 때 일본 노래를 틀고 따라부르면서 흥이 오르기도 하는 덕남덕녀이기도 했다.


남편과 연애를 한 1년 반 동안 단 7일을 제외하고 매일 만났음에도 우리는 매일 이야기 할 것이 가득했다. 함께 즐기고 따로 즐기면서도 공유하고 나눌 재밌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웃음이 많다, 행복하다를 넘어 이 사람과 함께 하면 ' 다운 매일'을 기대할 수 있었다. 엄마가 말한 '코드가 맞는 사람'이란 바로 이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왜 남편과 결혼하려고 하냐는 엄마의 질문에 "코드가 맞는 사람이라서 하려고"라고 답변했다. 그리고 코드가 맞는다는 말로 엄마도 아빠도 흔쾌히 "그럼 결혼해야지"라며 OK 싸인이 떨어졌다. 우리 부모님도 딸 가진 부모 입장에서 좀 더 경제적으로 여유롭고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하길 바라셨을테지만, 사람 냄새가 나는 남편의 심성과 근면성실함, 책임감을 보고 미래의 가능성을 더 높게 보셨고 무엇보다 자신들의 딸인 나의 능력을 믿어주셨다.


나와 코드가 맞는 사람이기에 남편은 나를 여자, 아내의 프레임에 가두지 않고 함께 인생의 여정함께 할 파트너로서 나를 존중해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부차적인 남편의 상황이나 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취집'이 되는 결혼이 하고 싶지 않았다. 일을 너무 좋아했고 커리어 로드맵이 확고했으며 또래 여성들에 비해 연봉도 높은 편이었고 자산 관리도 적당히 잘하는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결혼을 준비하면서 돈 문제로 싸운 적이 없었고 결혼 후에도 경제적인 문제가 생긴 적이 없었다.


결혼 후에는 서로 살아온 삶의 궤적을 맞추느라 티격태격 다툼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서로 코드가 잘 맞았기에 이 궤적을 맞춰가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코드가 맞는 서로 덕분에 '함께 하는 일상의 치유력'의 힘을 느끼며, 서로가 '나 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올해는 우리의 결혼 11주년이었다. 결혼기념일에 우리는 영화관에 '스즈메의 문단속'을 보러 갔다. 그리고 집에 와서는 각자 서로 하고 있는 게임을 2시간 정도했다. 그리고 아쉬운 마음에 OTT로 '너의 이름은'을 봤다. 보면서 감독이 이 두 가지 애니메이션을 만드면서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에 대해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어떤 장면이 인상적이었는지를 대화를 했다. 새벽을 넘어서까지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다가 갑자기 하임이를 가운데에 두고 끌어안고 딩굴다가 잠들었다. 우리의 코드에는 가장 완벽한 결혼기념일이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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