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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noDAY Jul 24. 2019

<뿌리깊은 나무>를 다시 보고 싶어졌다

<나랏말싸미> 리뷰

1. 나는 예전에 sbs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애청자였다. 원래 사극을 즐겨 보는 데다가 배우들의 연기와 화려한 액션도 훌륭했고, 훈민정음 창제라는 소재도 흥미로웠지만 내가 <뿌리깊은 나무>를 좋아했던 가장 큰 이유는 이 드라마가 사극다웠기 때문이었다.


사극(내지는 시대극)은 서로 다른 시간대 공존하는 장르다. 사극은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같은 사건을 기반으로 하더라도 그 결과물인 영화나 드라마는 제각기 다르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사극 작품은 과거의 사건과 현재 그 시대를 사는 대중들의 열망, 역사적 시선, 사회적 사유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가가 상상력을 통해 주류 역사학과 다르게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하더라도, 현재의 이슈나 의제를 충분한 개연성과 설득력, 그리고 신선한 관점을 갖추어 재해석 해낸다면 그 작품은 대중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


<뿌리깊은 나무>는 이 조건을 충족시키는 작품이었다. 물론 드라마에 적지 않은 오류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세종대왕을 입체적인 인물로 재탄생시켰고, 태종과 세종의 관계를 비틀거나 허구의 조직인 밀본을 등장시켜 애민정신, 민본 정치, 훈민정음 창제의 참된 이유를 재조명하며 현대 사회의 근간인 민주주의를 숙고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기도 했다. 하지만 <뿌리깊은 나무>와 같은 소재인 훈민정음 창제를 다룬 영화, <나랏말싸미>는 그러지 못했다.



2. <나랏말싸미>는 세종이 신미대사와 협력하여 산스크리트어를 바탕으로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가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그렇기에 훈민정음 창제 이후 불교 경전 서적들이 훈민정음으로 해석되었다는 점, 해례본에서 세종이 작성한 서문이 108배를 상징하는 108 자라는  (이는 확실히 사실이 아니다), 세종 혼자서 혹은 왕실의 일부 인원들과 함께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으로 실록에 기록된 것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승려가 창제에 관여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라는 주장 등 여러 떡밥들이 작중에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뒤 개인적으로는 <나랏말싸미>가 굳이 허구에 가까운 역사적 사건들로 훈민정음 창제과정을 재구성하고, 또 어떤 의도로 재해석하고자 하는지 그 이유와 의도에 대한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다.


 

3. <나랏말싸미>는 현대 세종의 애민정신이 필요하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저 왕으로서, 백성을 사랑해야 한다는 교과서적인 설명을 제시하는 것 외에 백성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방식이 최선인지에 대한 구체적이거나 심도 있는 고찰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종의 입을 빌려 현재의 정치적 상황을 비판하고 있는지? 작중 세종은 유교 국가의 완성을, 신미는 불교의 부활이라는 목적을 지닌다. 그러나 이 둘의 대립과 협력 그저 조선은 유교 국가니깐, 백성들은 아직 불교를 믿으니깐 이라는 현실의 제시를 넘어서는 논쟁, 토론, 협상을 포함하지 않는다. 훈민정음이 완성되어 반포되어야 하는 영화의 전개상 다른 인물들의 힘을 빌려 부자연스럽게 넘어가는 식이다.



아니면 역사적 위업 이면에 담긴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다고 보기에는 <나랏말싸미> 속 인물들은 한 인간으로서의 캐릭터가 전혀 살아나지 않는다. 그나마 세종고 소헌왕후의 경우 서로의 호흡을 통해 늙고 고단하여 남은 시간의 촉박함에 불안해하는 모습을 잠깐이나마 보여주지만, 신미는 전문가로서의 지적 고뇌를 제외하면 인간적인 매력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다른 조연들은 스테레오 타입에 불과하다. 인물들의 동기나 과정이 전무한 셈이다. 이는 송강호의 세종이 아닌 그저 송강호가 보이고, 박해일의 신미가 아닌 그저 박해일이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혹시 현대적 시선으로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 있어서 여성들의 주도적 역할을 반영하고 싶었는지? 작중 세종과 신미를 졸장부, 왕후를 대장부로 묘사되는 장면도 있으며 그녀가 나인들을 동원해 훈민정음을 주도적으로 유포시키는 것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결국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블랙 위도우처럼 여성 캐릭터를 남성 캐릭터들을 자극, 각성, 성장시키는 도우미로서의 역할만으로 활용하는 방식에 불과할 뿐이다. 페미니즘 내지는 정치적 올바름의 프레임을 작품에 씌우려다가 종국에는 기존의 남성 중심, 가부장적 화법으로 회귀하는 전형적인 캐릭터 활용인 것이다.


조철현 감독아 <사도>에서는 모두가 감정 이입할 수 있는 일반적인 부자관계를 통해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를 재조명하는 시나리오를 섰다는 점을 감안하면, <나랏말싸미>에서는 욕심이 과했거나 혹은 여러 방면으로 존재한 스토리 상의 잠재력을 미처 다 활용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4. 또한 <나랏말싸미>는 사극으로서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 재해석하는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스토리의 전개마저도 실망스럽다. 사실 <뿌리깊은 나무>는 한글 창제에 있어서만큼은 작품 안에서 훈민정음에 내포된 정치적, 철학적 의미를 충실히 설명, 제시한다. 창제 과정에서 우연을 최대한 배제하고 언어학적, 성리학적 의미를 부여해 최대한의 개연성과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인 것이다.


반면에 <나랏말싸미>의 전개는 지나치게 우연에 의존하며 개연성이 매우 부족하며 결정적인 순간마다 누군가가 우연히 문제를 해결하는 장면이 반복된다. 이는 마침내 훈민정음이 창제되었을 때의 뿌듯함, 벅차오름 등의 감정을 깎아먹으며 마치 훈민정음이 우연과 우연이 만나 운 좋게 만들어진 글자로 보이게 하는 안일한 연출일 뿐이다. 또한 글자를 만들기까지의 노력과 반포하기 위해 역경을 넘어서는 끈기, 그것을 모두 넘은 뒤의 감동과 슬픔의 감흥마저 살리지 못하는 게으른 연출이기도 하다.   



5. 이러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나랏말싸미>에 한 가지 긍정적인 부분이 존재한다. 우선 이 작품은 흥분하지 않고 담담함을 유지한다. <나랏말싸미>에서는 극적인 음악이나 음향효과가 최소한으로 활용되는 데, 개인적으로는 영화 자신이 다루는 위업이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를 알고서 최대한 차분한 시선으로 그 과정과 결과를 전달하고 제시하는 데 주력한 것처럼 느껴졌다. 이는 위대한 업적 앞에서 영화가 먼저 흥분해 관객들을 억지로 울리고 감동시키려는 <명량>과 비슷한 작품들과 큰 차이점을 보이는 대목이다.


그 결과 <나랏말싸미>는 비록 드라마틱하지는 않지만 한글과 세종이라는 소재 자체가 주는 감동과 흥분이 영화의 분위기와 조화를 이룬 균형 잡힌 영화로 탄생할 수 있었고 (물론 지루한 다큐멘터리 같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이는 곳곳에 포진한 유머들이 만회한다), 한글의 의미와 세종의 애민정신에 대해 재고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데 성공하기도 한다. 실제로 영화를 보고 난 뒤 완성도나 개인적인 만족도가 어떻든 간에 세종대왕의 노력과 집념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도 했다.



6. 결국 <나랏말싸미>는 역사를 재구성했지만 재해석하지는 못한 영화고, 영화가 전달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기 힘든 작품이다. 영화가 선택한 가설과 설정이 대부분 허구인 것도, 이를 통일된 주제의식 속에 녹여내지 못한 것도 다 문제인 것이다. 송강호의 세종을 보며 한석규의 세종이 그립고, 세종과 신미의 대립을 보며 이도와 정기준의 논쟁이 보고 싶어지는 영화, <나랏말싸미>다.



P(Poor, 형편없음)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지만 꿴다고 다 예쁜 것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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