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원과 비판 사이에 선 ‘정치’와 ‘팬덤’

<킹메이커> & <한산>

by KinoDAY

영화의 성공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상업영화를 판단하는 잣대는 한 가지입니다. 흥행이죠. 만듦새는 그다음 문제입니다. 만듦새가 별로라 해도 흥행에 성공한다면 관객들을 사로잡은 매력이 확실한 영화가 됩니다. 반대의 경우라면 부족한 만듦새가 비판의 대상이 되겠죠.


흥미로운 건 작품성을 인정받은 작품들의 흥행 성적에 담긴 함의입니다. 어떤 두 영화가 있습니다. 두 작품을 본 모든 관객은 입을 모아 칭찬을 아끼지 않죠. 그런데 가끔 두 작품의 성적은 정반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작품에는 관객들에게 어필할 매력이 있었고, 다른 작품에는 없었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리고 궁금해하죠. 대체 그 매력이 뭘까?


<킹메이커>와 <한산>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살짝 알려 주는 영화입니다. 두 작품은 공통점이 많습니다. 실화와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한 점, 흥행 성수기를 겨냥한 작품인 점, 정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한 점, 공개 직후 완성도에 대패 호평이 많았다는 점까지 수두룩하죠. 반면에 흥행 성적은 극과 극이죠. 백만을 간신히 넘긴 영화와 7백만 관객을 넘긴 영화는 차이가 크죠. 개인적으로 두 작품 간의 차이는 눈에 쉽게 보이지만, 그렇다고 전면에 두드러지지는 않아 보입니다. 바로 정치를 대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킹메이커> 정치란 빛과 그림자의 공존


수 차례 국회의원에 출마했지만 낙선만 거듭하던 정치인 ‘김운범(설경구)’. 어느날 그 앞에 약방을 운영 중이던 선거 전략가 ‘서창대(이선균)’가 찾아와 세상을 바꾸기 위해 도전하는 그의 뜻에 동참하고 싶다고 밝힌다. 선거 캠프에 합류한 서창대는 객관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도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선거 전략을 펼치며 김운범에게 연이어 승리를 선사한다. 마침내 강력한 경쟁자 '김영호(유재명)'까지 제치고 김운범을 대통령 후보 자리에 올려놓는 데 성공한 서창대. 그러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동료이자 사제지간이라 할 수 있던 김운범과 서창대의 정치적 신념이 충돌하기 시작하고, 중앙정보부 '이 실장(조우진)'의 견제까지 더해지자 둘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정치인 대신 전략가의 시선으로 정치를 보다

변성현 감독의 영화 <킹메이커>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그의 선거 전략가였던 엄창록의 사연에서 모티브를 얻어 제작된 작품입니다. 엄창록은 1960-70년대 당시 추세였던 공권 선거와 금권선거에 반발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죠. 대신 그는 유권자 심리를 이용하는 획기적이고 전략적인 선거 전략을 수립했습니다. 실제로 상대편 후보 캠프 사람인 것처럼 꾸며 비호감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등의 교묘한 선거 전략을 실행에 옮기기도 했죠. 그의 전략은 악명 높은 중앙정보부가 주시해야 할 만큼 대단했다고 전해집니다.


흥미로운 것은 <킹메이커>의 초점입니다. 영화는 김대중을 떠오르게 하는 ‘김운범’(설경구)'보다는 엄창록에게서 영감을 받은 서창대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덕분에 <킹메이커>는 실제 사건을 영상화하는 데서 그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정치인의 시점도 아니고, 일반 시민의 눈높이도 아닌 회색지대에서 정치와 민주주의, 그리고 선거를 들여다보기 때문입니다. 특히 민주주의와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일지, 그 본질에 대해 선거에서의 승리가 최우선 목적인 선거 기획자의 눈과 귀를 통해 함께 고민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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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공공선의 추구일까? 사익의 집합일까?

그 중심에는 창대와 운범의 갈등이 있습니다. 창대는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다고 믿습니다. 그런 그에게 목적과 수단의 정당성이 수반된 승리만 의미가 있다고 믿는 운범은 순진해 보이죠. 흥미로운 건 이들의 충돌에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두 접근법의 차이가 함축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창대는 실증적으로 민주주의 정치에 접근하고, 운범은 규범적으로 대하죠.


창대는 선거에 참여하는 유권자, 정당, 후보 모두가 공공선을 꼭 추구하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이해하지는 않죠. 대신 선거의 참여자는 각자 합리적인 선택을 합니다. 정당과 후보는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데에 집중합니다. 즉, 선거는 철저히 권력 투쟁 내지는 게임의 장에 불과하죠. 유권자와 시민들도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거나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노선이 맞는 정당과 후보를 선택합니다. 그들은 정치적 정보를 알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을 투입해 가능한 많은 정치적 이익과 만족감을 얻는 걸 목표로 삼습니다. 예를 들어 이데올로기는 일상을 사느라 바빠 정치, 사회적 이슈를 잘 알지 못하는 유권자에게 유용한 지름길이죠. 즉, 민주주의는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하나의 방법일 뿐입니다.


반면에 운범은 고전적인 이상을 추구합니다. 그의 신념은 상대적으로 익숙하죠. 그는 정당이 각자 기치로 내건 이데올로기에 맞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공공의 이익을 추구한다고 봅니다. 공공선을 추구하는 시민들은 적극적으로 정치적, 사회적 이슈에 관심을 기울이고 대안을 추구하며 공론장에 개입해 의사를 표시합니다. 또 선거를 통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며 사회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운범에게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좋은 세상을 만들 목표인 셈이죠.


국민이 갖는 의미를 보면 두 인물의 차이는 더욱 분명합니다. 창대는 국민의 의지가 허상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저 이익을 좇아 움직이는 존재입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선거 기획자가 어떻게 인센티브를 주느냐에 따라 표를 던질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 그에게 운범은 국민의 정치적 참여야말로 사회 정의를 실현할 유일한 길이라고 일갈합니다. 그래서 철저히 표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정책을 기획하는 창대와 달리 운범은 국민들의 진심과 열망을 정책에 녹여내려 하죠. 표를 얻는 것이나 돈을 버는 것이나 다를 게 없다는 창대에게 그 둘이 엄연히 다르다고 충고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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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는 필연적으로 빛과 그림자가 함께 한다

그 결과 <킹메이커>의 영화적 만듦새는 이들의 갈등을 빛과 그림자에 투영시켜 스크린으로 투사하는 순간 완성됩니다. 그런데 빛과 그림자를 대비하는 연출은 그 맥락을 잘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의미와 속뜻이 살짝 다르기 때문이죠.


영화를 보다 보면 일견 김운범의 방식이 옳고 서창대의 방식이 틀렸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창대의 방식이 이전까지의 통념이라고 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정의와 이상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냉혹하고 불편한 정치의 현실을 전면에 내보이는 까닭입니다. 실제로 영화는 서창대의 선거 운동을 철저히 그림자 속에 가둡니다. 다른 인물들도 창대를 협잡꾼이라고 비하하죠.


그러나 빛과 그림자의 표현에는 다른 의미도 깃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둘은 하나 될 때, 한 팀이 될 때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을 맛봅니다. "정치란 때로는 짐승이 되는 비천함을 감수하면서 야수의 탐욕과 싸워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는 일"이라는 유시민 작가의 표현대로,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려는 운범과 짐승이 되는 비천함을 견딜 줄 아는 창대가 함께할 때 그들은 비로소 정치적인 성과를 낼 수 있죠.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합니다. 빛과 그림자는 실과 바늘보다도 떨어질 수 없는 사이이고,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는 더 짙어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자신의 방식이 옳다고 믿으면서도 김운범이 서창대를 내치지 못하고 선거 때만 되면 다시금 그를 선거 캠프에 합류시키는 이유죠.


그와 동시에 영화는 서창대와 '이 실장(조우진)'이라는 그림자 간의 대비도 보여줍니다. 이들은 오직 표를 가져오는 데에만 몰두하는 이들이죠. 그렇지만 이 둘에게도 차이점은 있습니다. 인정사정없어 보이는 창대도 운범의 대의인 민주화까지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반면에 이 실장은 독재 정권이 유지되든 민주화가 되든 그저 자신의 편이 승리하면 그만이죠. 그림자 속에 있다고 해도 빛을 바라보느냐, 더 깊은 심연을 보고 있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결국 <킹메이커>는 정치가 줄타기라는 것, 민주주의라는 이상적인 비전과 현실적인 제도적 접근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문제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는 운범과 창대가 빛과 그림자 관계인데도 동료나 사제 간처럼 보이지만, 창대와 이 실장이 서로를 이해하면서도 결코 손을 맞잡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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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그림자의 문제. 이건 우리 모두의 딜레마다.

빛과 그림자로 정치와 민주주의의 본질을 그려낸 후 <킹메이커>는 이제 창대의 고민을 관객들, 현실의 유권자들에게 넘겨줍니다. 정치인도, 선거 기획자의 길도 포기한 채 평범한 시민과 유권자의 한 사람으로 되돌아가는 창대의 감정선을 성실히 따라가며 그와 같은 고민을 하도록 유도하죠.


그림자 밖으로 나와서 빛을 보고 싶다는 욕망에 불타는 창대. 그는 선거 기획자의 역할을 넘어서기로 마음먹습니다. 공천을 받고, 선거에 나가서 직접 정치 일선에 나서려고 하죠. 이는 창대와 운범의 만남에서 암시된 변화이기도 합니다. 창대는 목포에서 운범을 만나 그의 그림자가 될 기회를 잡죠. 이때 그들이 만난 방은 바깥 조명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밝아졌다가 이내 그림자와 어둠으로 가득해집니다. 이 방은 마치 창대의 마음 같아 보이죠. 자신이 믿는 대의를 위해 싸우고 함께 하고 싶다는 순수함과 잠재해 있던 정치적 욕망과 야심이 순간적인 빛 속에 깃들어 있습니다. 자신의 선거 전략 덕분에 운범이 정치적으로 성공을 거둘 때마다 창대가 초라해지고, 공천에 대한 야심을 숨기지 못하며 원망과 좌절 속으로 빠져드는 이유죠.


운범이 국회의원에 당선되어도 기념사진 속에 같이 서있지 못하는 아픔. 빛나는 운범을 보면서 언제나 군중 속에 있어야 하는 씁쓸함. 혼자 있으면 빛나고 함께 있으면 기쁜 운범과 달리 고독하고 존재감 없어야 하는 그의 자격지심. 복잡한 감정 속에서 창대는 자신이 진정으로 정치에 참여할 준비가 되었는지 거듭 고민합니다. 본인이 믿는 정치적 신념과 목표가 진정으로 옳은 것인지도 계속해서 의심하고요.


<킹메이커>는 이처럼 창대가 겪은 딜레마가 정치와 선거라는 게임에 참여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내가 행사하는 한 표, 나의 정치적 신념에 달린 무게감을 체감할 수 있는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킹메이커>가 22년도 대선을 앞두고 개봉했던 걸 고려하면 영화 속 빛과 그림자는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한산: 용의 출현>에서 엿볼 수 있듯이 현실의 한국 정치는 <킹메이커>가 강조한 빛과 그림자의 균형이 무너진 상태이기 때문이죠. 민주주의 정치의 본질과 목적에 대한 진지한 고찰은 쉽게 접하거나 듣기 어렵습니다. 자신이 속한 진영의 논리와 리더만이 무조건 옳다고 주장하는 양극화가 더욱 심해진 상황이니까요.




<한산: 용의 출현> 자칫 맹목적 충성이 될 수 있는 의로움


1592년 4월, 왜군은 단 15일 만에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점령하며 파죽지세로 북진한다. 그러나 '이순신(박해일)'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거북선을 앞세워 남해안을 장악하자 이내 왜군은 보급에 난항을 겪는다. 이에 용인 전투에서 10만 명의 조선군을 격퇴한 '와키자카 야스하루(변요한)'는 해전을 통해 이순신을 꺾고 보급품을 전달함과 동시에 명나라로 진격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부산포에 수군을 집결시키고, '나대용(박지환)'이 설계한 거북선의 도면을 훔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반면에 '이순신(박해일)'은 '원균(손현주)'의 방해에 맞서가면서 선조가 의주로 파천하는 등 수세에 몰린 조선을 구하기 위한 최선의 작전을 고민하며 한산도로 출전한다.


<한산: 용의 출현>은 1,700만 관객을 동원해 한국 영화 역사상 최고 흥행작의 반열에 오른 <명량>의 후속작이자 프리퀄입니다. <최종병기 활>과 <명량>의 김한민 감독이 다시 한번 메가폰을 잡았고요. 영화는 1592년 음력 7월 8일에 펼쳐진 한산도 대첩을 스크린으로 옮깁니다.


흥미로운 건 <한산>이 그려내는 전쟁의 성격입니다. 영화는 임진왜란의 두 주체, 조선과 일본을 각각 의(義)와 불의(不義)로 설정합니다. 즉, 임진왜란은 불의에 맞서 들고일어난 의로운 전쟁이라는 것이죠. 이는 역사적 사실과도 어느 정도 정합하죠. 일본군은 아무런 명분 없이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길을 빌려달라는 이유로 조선을 침략했기 때문입니다. 조선과 일본은 순도 100%의 피해자와 가해자 관계이고, 그러니 임진왜란이 의와 불의가 싸우는 전쟁인 건 명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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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에 비추어 의를 강조하다

그렇기에 <한산>은 이순신이라는 존재의 의로움을 강조하는 데 주목하는 영화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존재, 그의 대쪽 같은 심지가 불의라는 바람 앞에서 흔들리는 촛불인 의로움을 어떻게 지켜 낼 것인가를 지켜보게 만들죠. 이는 영화가 의도적으로 일본군의 시점을 강조하며 이순신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이유입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한 영화는 가장 먼저 부산의 일본군 진영을 비춥니다. 또 일본군이 이순신과 거북선에 대비하는 모습을 착실하게 그려냅니다. 걸핏하면 조선인들을 죽이는 평면적인 악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 빈자리는 두려움이 곧 전염병이라면서 아군의 패잔병을 죽여 혹시 모를 불씨를 제거하는 주도면밀함, 간첩의 침투와 그로 인한 정보의 유출을 경계하는 치열한 첩보전, 군사적 약점을 지우기 위해 전력을 증강하고 작전을 가다듬는 철저함이 대신하죠. 반면에 스크린 속 조선군은 취약합니다. 거북선을 잃고, 거북선의 설계도를 탈취당하며, 학익진은 제대로 완성되지 않았죠.


하지만 그렇기에 이순신의 학익진은, 그리고 예상치 못했던 거북선의 등장은 역으로 더 큰 감동을 줍니다. 철저하고 신중했던 불의는 의로움으로 쌓은 바다의 성 앞에서 궤멸합니다. 작중 최고의 씬스틸러인 거북선도 단순한 눈요기로 활용되지는 않죠. 왜군 장수들은 거북선을 마주치자 장님 배라는 의미의 '메구라부네'가 아니라 해저 괴물이라는 뜻의 '복카이센'이라고 부르죠. 영화 초반부에 패잔병들처럼요. 거북선에 대한 일본군의 두려움은 곧 의로움의 힘이자, '국뽕'이 나름대로 품격 있게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한산 바다에 수군 군영이라는 단단한 방패를 만드는 모습으로 영화가 끝을 맺는 이유이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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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의로움

특히 이순신의 의로움을 보호로 해석합니다. 나의 편을 끝까지 지켜주는 것으로 이해하죠. 그래서 나의 사람 역시 나에게 끝까지 충성하도록 만듭니다. 많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존재감이 빛나는 무기인 이순신의 활만 보더라도 의로움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이순신의 활은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칼과 강한 대비를 이루죠. 와키자카의 칼은 명나라로 진격하려는 야욕으로 가득합니다. 명나라로 향하는 지도가 그려진 황금 부채의 또 다른 모습이나 다름없죠. 또 두려움을 제거한다는 목적으로 패잔병을 죽이는 그의 칼은 왜군끼리도 자중지란을 일으키기도 하고요.


반면에 이순신의 활은 의롭습니다. 그는 전투 중 죽을 위기에 놓인 부하 나대용을 구하기 위해 총을 맞으면서까지 활을 쏴 나대용을 지켜주죠. 약점이 드러나 집중 공격을 당하던 거북선도 구해냅니다. 나대용과 거북선은 한산 해전에서 이순신을 위기로부터 구해내며 보답하죠. 그래서 와키자카의 칼도, 조총도, 황금 부채도 이순신을 위협할 수 없습니다. 의로움이 담긴 이순신의 활 앞에서 악의로 가득한 그의 무기는 무용하고, 패배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항왜 '준사'의 서사도 비교적 자연스럽게 한산 대첩에 녹아듭니다. 자칫 전편처럼 억지스럽거나 신파적으로 과장되는 함정을 피해 가죠. 이순신의 함대에 패한 일본 수군의 장수인 준사는 이순신과의 만남과 대화 이후 투항합니다. 아군을 보호하기보다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왜군에게 질린 나머지 부하들을 인간적으로 아끼고 지켜주려 애쓰는 이순신의 의로움에 마음을 고쳐먹습니다. '의'라는 글자가 새겨진 깃발을 들고 의병과 함께 전라 좌수영을 지키기 위한 전투에 임하기도 하죠. 바다에 국가와 백성을 보호하는 강력한 성인 학익진이 있었다면, 육지에는 의로움의 기치에 목숨을 바치는 이들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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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의 양면과 선악의 기준

여기까지가 <한산>을 보는 보편적인 시각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산>을 다소 삐딱하게 보면 유독 눈에 밟히는 지점이 있습니다. 바로 이순신과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관계성이죠. 작중 이순신과 와키자카의 행적에는 사실 큰 차이가 없습니다. 물론 와키자카가 패잔병을 죽이는 걸 보고 잔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전근대 시기에 전투를 앞두고 군의 기세가 꺾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불가능했던 일도 아닙니다. 크게 보면 와키자카는 자기 부하들을 전투에서 살리기 위해 선제적인 조치를 한 셈이죠.


그 외에도 러닝타임 내내 와키자카가 고민하는 것도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침략 모의이지만, 왜군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의로움을 수행해내기 위한 전략적 고민일 뿐입니다. 이순신이 학익진을 고안하며 수군을 훈련시키고 첩자들을 동원해 정보를 빼 오듯, 와키자카도 똑같이 할 따름이고요. 국가와 백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이순신의 의로움이 있다면, 와키자카에게도 자신의 주군과 부하들을 위해 반드시 명나라에 먼저 입성해야 한다는 나름의 의로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관객 입장에서 이순신은 완전한 선이고,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완전한 악입니다. 차이는 딱 하나입니다. 이순신은 우리 편이고, 와키자카는 아니라는 것이죠. 관객들도 '내 편'이기 때문에 이순신의 전략이 통한 순간 엄청난 쾌감을 느끼고, 와키자카의 선택이 실패로 귀결될 때 안도합니다. 이 과정에서 사실 누구의 명분과 대의가 우선인가는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우리 편이 먼저 승리했다는 쾌감, 만족감, 안정감이 우선시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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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에서 보이는 '팬덤'의 문화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한산>은 단순히 민족의 영웅을 기리는 영화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대신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해서 그 의미를 잠깐 잊을 뻔했던 현상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드는 거울로 보이기도 하죠. 바로 팬덤입니다. 팬덤이야말로 내 편과 남의 편을 기준으로 타인과 대상을 규정짓는 대표적인 공동체이기 때문이죠. 특히 영화의 두 가지 연출적 특징은 우리가 팬덤의 영향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는 걸 상기시켜 줍니다. 첫 번째는 클로즈업이고 두 번째는 배들의 대열이죠.


우선 <한산>의 카메라는 인물들의 얼굴을 좋아합니다. 이순신이나 와키자카가 전술을 설명하고 명령을 내릴 때나, 적군의 움직임에 반응할 때나 계속해서 인물들의 얼굴과 표정 변화에 집중하죠. 그런데도 영화의 흐름이 끊긴다는 느낌은 강하게 들지 않기도 합니다. 달리 말해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얼굴 이미지가 대중적으로 이상한 연출이 아니라는 것이죠. 또 한편으로 <한산>은 배들의 진열에 집중합니다. 당포에서 견내량과 한산으로 이어지는 전투의 흐름 속에서 매 순간 변화하는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의 진형(학익진과 어린진)을 넓고 수직적인 구도로 잡아내 그 형태를 직관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뿐만 아니라 배가 움직이는 과정까지도 꼼꼼하게 보여주죠. 결국 <한산>의 후반부이자 클라이맥스인 전투 시퀀스는 배들의 움직임과 인물들의 클로즈업으로 조합된 결과물입니다.


근데 이 모습은 어디선가 많이 본모습입니다. 바로 아이돌 그룹의 무대죠. 배들의 움직임은 아이돌들의 군무와 동선 이동을 방불케 하죠. 밑바닥이 둥근 일본군 함선과 밑바닥이 평평한 판옥선의 차이점을 활용하는 것이나 거북선들의 충파로 인한 박진감이나 전방위 포격으로 적을 섬멸하는 모습은 마치 무대 전 연습 과정을 통해 무대 위에서의 퍼포먼스를 강조하는 연출, 편집과 유사하죠. 이순신과 와키자카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건 직캠까지 동원해 멤버 한 명 한 명의 표정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팬들의 열망이 담긴 듯합니다. 서로의 전술에 놀라거나 당황하거나 비웃는 리액션은 서바이벌 프로에서 경쟁하는 아이돌 멤버들과 무대를 보는 팬들의 얼굴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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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 속 팬덤이 무서운 이유

이렇게 보면 단단한 신뢰로 뭉친 이순신과 나대용의 관계, 그에 필적할 만큼 단단히 묶인 와키자카와 그의 수하들의 모습은 아이돌과 팬덤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또 이순신을 응원하면서 와키자카의 실패를 바라는 관객의 모습 역시도 아이돌과 팬덤의 관계 같죠.


그런데 이처럼 <한산>을 팬덤으로 읽어낼 때는 사뭇 무섭기도 합니다. 영화가 이순신을 그려내는 태도 때문이죠. 김한민 감독은 한산 해전에서 지장(智將)으로서 고민하는 이순신을 그려내고자 했다고 밝힌 바 있지만, 결과적으로 이순신은 여전히 완성된 리더 같아 보입니다. 그의 고민은 항상 완벽한 결과로 이어지고, 그에게 반기를 드는 원균과 같은 몇몇 인물은 그저 한심하고 찌질하게 그려집니다. 마치 자신의 리더, 아이돌을 문자 그대로 우상(idol)화하는 팬덤의 태도처럼 보이는 것이죠. 그를 향한 그 어떤 공격과 비판도 허용하지 않는 완고함이 표현된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현실에서도 이러한 팬덤의 모습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돌 팬덤이 아니라 정치인 팬덤에서 더 찾아보기 쉽죠. 정치인과 리더의 아이돌화, 자신의 정치인과 리더가 무조건적인 선이고 정의의 화신이라는 믿음. 이미 새로운 믿음은 들어서 있다. 사법부의 판단마저 신뢰하지 않으며 유튜브를 매개로 이미 하나의 독자적인 유니버스와 경제적 체계까지도 가져가고 있죠. 서울의 가장 큰 광장을 둘로 쪼개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물론 이런 식으로 <한산>을 읽어내는 게 허무맹랑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과한 자의적 해석이라고 비판하실지도 모르겠고요. 영화적 연출과 아이돌 무대의 연출을 같은 선상에 둘 수 없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의심의 씨앗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한산이 보여준 개성과 특징은 과연 단순히 영화적인 것일까?" "지금 한국 사회의 문화와 분위기가 투영된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내 편 아니면 네 편으로 극단적으로 갈려 싸우고, 일단 이기고 보자는 분위기가 팽배한 정치적 상황에서 양쪽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의 의견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킹메이커> 속 창대처럼 숙고하는 유권자가 설 공간은 과연 존재할까?" 등등.


<한산>은 여름 성수기의 승자가 되고, <킹메이커>는 설날 연휴의 패자가 된 상황에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마냥 허황되었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팬덤의 문화가 어느 영역에서든 익숙해지는 지금 <킹메이커>와 <한산>의 조합은 정치와 민주주의, 선거와 리더에 대해 고찰이 필요하다는 경종을 울리는 듯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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