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달라져왔고, 달라질 것이다

<모가디슈> & <승리호>

by KinoDAY

고등학생 때 마음 한구석에서 꿈꿔왔던 장면이 있습니다. 살랑거리는 봄바람 속에서 벚꽃을 즐기고, 공원에서 돗자리를 펴고 기타 치며 술을 한잔하고, 만우절에는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와서 동기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약간의 로맨스가 곁들여진다면 더욱 행복할 것 같은 그런 낭만 가득한 생활을 상상하곤 했죠.


하지만 대학에서 가장 먼저 만난 것은 낭만이 아니라 충격이었습니다. 그것도 예상치 못하게 열린 문에 온몸이 부딪히는 듯한 충격이었죠. 입학식이 끝난 직후, 국사학과 교양 강의 오리엔테이션이 열리던 화요일 오후였습니다. 교수님의 입에서는 한국사 교과서와 수능 특강에서는 만날 수 없는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죠.


그 중심에는 민족이 있었습니다. 사실 민족은 혈연 공동체가 아니죠. 유럽의 각 국가가 국기, 국가와 같은 공통의 상징 밑에서 같은 언어로 된 소설과 노래, 예술을 통해 같은 정서를 공유하고, 전쟁과 재난 같은 동일한 역사적 경험을 통해 만들어낸 핏줄 이상의 공동체가 민족입니다(일단 제가 이해하기로는 그렇습니다). 교수님의 질문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과연 한민족은 무엇인가? 70년 이상 다른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경험을 겪고 세대도 달라진 남한 사람과 북한 사람이 과연 같은 민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질문들에 대해서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교양 수준 이상의 이해나 답을 가지고 있지는 못합니다. 다만 이 질문들이 제 머릿속 우주를 충분히 뒤죽박죽 뒤집어 놓기는 했죠. 흥미롭게도 시간이 흘러 팬데믹 시대가 되자 혼란스러워진 제 머릿속 우주가 마치 세상 밖으로 튀어나온 듯합니다. 세상의 고정관념과 기존 질서를 단번에 뒤흔드는 사건의 여파 덕분일지는 몰라도 한국과 한민족, 한국사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이해와 관점을 여기저기서 많이 접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것도 대한민국의 가장 뛰어난 스타 감독과 팬데믹 속에서 미친 듯이 성장한 OTT 괴물의 손끝에서 만나 볼 수 있었으니, 그저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모가디슈> 달라진 시대, 달라진 민족, 달라진 위치


1991년,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에서는 남북한의 치열한 외교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북한의 '림용수(허준호)' 대사가 '태준기(구교환)' 참사관을 통해 남한의 외교행낭을 탈취해 소말리아 대통령과 남한 대사 '한신성(김윤석)' 간의 면담을 방해하자, 안기부 출신인 '강대진(조인성)' 참사관은 북한이 소말리아 반군에 무기를 판매한다는 증거를 확보해 북측을 압박한다. 이처럼 남북한 로비가 절정에 이르던 때에 소말리아는 돌연 내전에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한 대사와 강 참사관은 통신마저 끊긴 그곳에 고립된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총알과 포탄이 빗발치는 가운데 직원과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림 대사를 필두로 북한 대사관의 일행들이 도움을 요청하며 남한 대사관의 문을 두드리고, 남북한의 외교관들은 오직 살아남기 위한 비공식적 협력에 나선다.


<모가디슈>는 소말리아 내전으로 인해 고립된 남북한 대사관 직원들이 함께 수도 모가디슈를 탈출했던 실화를 영상화한 블록버스터 영화입니다. <베를린>, <베테랑>, <군함도> 등으로 스타 감독 반열에 오른 류승완 감독의 작품이죠. 그래서인지 <모가디슈>는 일단 호쾌한 액션 시퀀스로 눈을 사로잡습니다. 빠른 리듬감에 짧은 쇼트를 더한 대인 격투 장면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와중에도 정확하게 타격감을 전달하며, 긴장감을 가득 끌어올리는 카 체이싱 장면은 클라이맥스를 장식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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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의 클리셰에서 벗어나다

하지만 <모가디슈>의 진가는 다른 대목에서 드러납니다. 냉정하고 절제된, 그러면서도 깊이가 느껴지는 드라마의 힘이죠. 그 중심에는 남북한 외교관이 있습니다. 사실 한국 영화에서 묘사하는 남북관계는 일정한 클리셰가 있습니다. 많은 한국 영화는 시대와 장르를 가리지 않고 <JSA 공동경비구역>부터 <의형제>, <고지전>, <공조> 등에 이르기까지 남북의 긴장 관계가 강조되다가 이내 동포의 이름으로 화해하고 협력하는 전형적인 전개를 선보여 왔죠. <모가디슈>도 그럴 수 있었습니다. 소말리아를 두고 남북한이 펼치는 외교전은 긴장 관계를, 외교관들의 필사적인 탈출기는 남북의 협력을 그리기에 실로 적합한 소재였죠.


하지만 <모가디슈>는 클리셰를 따르지 않습니다. 이번만큼은 동포애를 이유로 남북이 협력하지는 않죠. 대신 '생존'과 '이익'이라는 계산적인 테마가 강조됩니다. 혼란 속에 상대적으로 안전한 남한 측은 반군의 습격을 받은 북한 대사관 직원과 가족을 공관에 숨겨줍니다. 그 이면에는 그들을 망명시켜서 실적을 올리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죠. 북측 역시 인도적 차원에서 보호를 호소하지만 동시에 여차하면 공관을 탈취하겠다는 생각을 품습니다. 이 동상이몽은 양측이 어떤 방법으로도 자신의 생존을 확신할 수 없게 되자 깨집니다.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 동포애와 민족 감정은 합리적인 이익 앞에서 무용지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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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움 대신 냉정함, 이상 대신 현실로 가득한 남북관계

생존이라는 주제는 전혀 다른 전후반부의 이야기를 매끄럽게 연결해주기도 합니다. 외교전이 펼쳐지는 전반부도 거시적 관점에서의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남북의 갈등이 중심축이기 때문입니다. 과거 남북한은 소말리아를 비롯해 여러 아프리카 국가들이 자신에게 UN 가입 찬성표를 던지도록 치열하게 외교전을 벌였습니다. 국제사회에서 우월한 위치를 선점하고 체제 경쟁을 주도하기 위함이었죠.


결국 전반부나 후반부나, 남북한 외교관은 러닝 타임 내내 어떤 의미로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칠 뿐입니다. 이처럼 동포애라는 감성 대신 자국의 이득과 생존이라는 현실을 위해 움직이는 남북의 모습은 한 대사가 림 대사에게 진심으로 '외교'를 하자고 말하는 대사에 고스란히 담겨 있죠.


현실주의적인 스탠스는 작중 가장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자막의 존재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작중 북한말은 전부 자막으로 표기됩니다. 기술적 관점에서 보면 감독의 전작인 <베를린>에서 북한말이 잘 들리지 않는다는 피드백을 수용한 결과죠. 그러나 영화 전반적인 분위기를 고려하면 다른 의미도 있습니다. 북한말을 일반적인 외국어처럼 자막으로 처리한 이상 작중 북한은 말이 조금 더 쉽게 통하고 약간의 동질성을 공유하나 엄연히 외국에 불과합니다. 즉 자막은 북한과의 관계에 섣불리 감정적으로 다가서지 않는, 선을 그어버리는 드라마를 단적으로 상징하는 대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으레 기대할만한, 작중 남북한 인물이 동질성을 확인하는 장면이 좀처럼 나오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밤늦은 식사 자리에서 남북의 직원들이 반찬을 나눠 먹고, 짧게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 이탈리아 대사관을 찾은 한 대사와 강 참사관이 '북한 측 인원을 왜 받았을까'하고 후회할 때 문득 튀어나올 뿐이죠. 물론 이 짧은 순간만으로도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는 남북 인물들의 이야기에 긴 여운을 남기기는 합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곱씹게 하고, 그 이후를 상상하게 만들며, 역으로 드라마를 더 애절하게 만들죠.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철저히 냉정한 국제 외교적 현실의 축소판처럼 보이는 관계가 엔딩까지 유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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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의 한국은 어떤 국가일까?

이처럼 일방적인 애국심과 민족감정의 주입을 피한 <모가디슈>의 드라마는 한 발짝 더 나아갑니다. 영화의 담대한 상상력은 두 장면에 숨겨져 있습니다. 우선 대사관 건물 앞에서 시위대와 정부군이 충돌하는 가운데 한국 대사관은 '한국이 소말리아의 평화로운 친구이고, 서로의 이익을 언제든 도울 수 있기를 바란다'는 음성 메시지를 전파합니다. 또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던 남북한 인원들을 사이에 두고 소말리아 반군과 정부군, 그리고 이탈리아 대사관에 주둔하던 이탈리아군은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있죠.


이 장면들은 그저 충실한 현실적 묘사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남북 관계도 냉정하게 접근하는 영화의 스탠스를 고려하면 더 본질적인 의미를 발견할 기회이기도 하죠. 제국주의 국가, 식민지의 독재정권, 독재정권에 로비를 벌이던 외국, 피지배국의 실질적 주권자인 국민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순간으로도 읽을 수 있으니까요. 결국 "과연 이 사태의 책임이 궁극적으로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셈입니다.


<부당거래>나 <베테랑> 등에서 악역의 행태를 개인에 국한하는 대신 사회적 맥락을 강조할 줄 알던 류승완 감독의 장기가 국제적 맥락에서도 발휘된 결과이기도 하다. 특히 한국의 입장에서도 인상적인 질문입니다. 한국은 제국주의 식민 통치, 군사 독재,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경험하며 선진국 반열에 오른 유례를 찾기 힘든 국가입니다. 그러다 보니 남북 간의 특수 관계 밖에서 한국은 과연 어떤 위치에서 어떤 역할을 외교적으로 맡아야 할지 고민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영화가 그 답을 줄 수는 없겠지만, 미처 인식하지 못했거나 알면서도 회피했던 현실을 직시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죠. 따라서 이탈리아와 영국의 식민 통치와 프랑스의 아프리카 지배력이 얽히고설킨 복잡한 소말리아의 근대사와 현실은 <모가디슈>의 드라마가 펼쳐지기에 최적의 공간적 배경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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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가디슈>는 팬데믹의 한가운데인 2021년 여름에 개봉했지만 3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상업적인 성공을 달성했습니다. 관람객과 비평가들의 호평도 이어졌죠. 이 수치는 꽤 의미심장합니다. 대중들의 취향과 생각을 저격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면 영화계의 파이가 다 함께 줄어든 상황에서는 불가능했을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가디슈>는 남북 관계와 한국의 국제적 역할을 두고 변화한 사회적 인식을 전면에 내보였다는 의의가 빛나는 영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스크린 독점, 역사 고증 부실, 식민 사관 등 여러 논란으로 실패한 <군함도> 이후 류승완이라는 스타 감독이 재기에 성공한 점도 놓쳐서는 안 되겠지만요.



<승리호> 도전적인 세계관의 밑그림을 그려내다


2092년, 지구의 환경오염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설리반(리처드 아미티지)이 우주 위성궤도에 만든 새로운 보금자리 UTS로 향한다. 그러나 UTS에 정착할 수 있는 사람의 수가 한정적인 관계로 돈이 부족한 많은 이들은 지구에 그대로 남거나 우주를 떠돌며 힘겹게 살아간다. 우주 쓰레기 청소선 승리호의 선원인 ‘태호’(송중기), ‘장선장’(김태리), ‘타이거 박’(진선규), ‘업동이’(유해진)도 가족과 동료들을 잃은 파란만장했던 과거는 뒤로 한 채 돈 되는 일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며 살아간다. 어느 날, ‘승리호’는 사고 우주정에서 대량살상무기로 알려진 인간형 로봇 ‘도로시(박예린)’를 발견하고, 그녀와 관련된 음모를 깨달은 뒤 새로운 모험에 나선다.


<모가디슈>가 새로운 관점에서 한민족과 한국을 고찰한다면, <승리호>는 한국적인 것의 영역을 넓힌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측면이 있습니다. 특히 제국주의의 피지배국이었다가 선진국 대열에 올라선 한국의 지위가 역할을 고민해야 봐야 한다는 <모가디슈>에 대한 응답처럼 보이기도 하죠(비록 공개는 <승리호>가 더 빨랐습니다만). 과연 한국이 기존 서구 국가들의 질서와 문법을 따르는 대신 새로운 세계관을 보여줄 수 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해 <승리호>는 아주 과감하게 '네'라고 대답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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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스 오페라와 한국

<승리호>의 대답을 본격적으로 보기 전에 우선 한 가지 짚어야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승리호>가 다름 아닌 스페이스 오페라(space opera) 영화라는 점이죠. 우주에서 펼쳐지는 모험과 전쟁을 주요 소재로 삼는 스페이스 오페라는 사실 국내에서 인기가 없는 장르에 속합니다. 가장 흥행에 성공한 축에 드는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가 320만 관객을 간신히 넘겼고, 그 이후 시리즈는 100만 명을 넘기지 못했죠. MCU에 속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2>도 270만 명을 동원하는 데 그쳤고, <스타트렉> 시리즈도 100만을 간신히 넘긴 바 있습니다.


국내에서 스페이스 오페라에 대한 반응이 좋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죠. 다만 여기서는 스페이스 오페라에 담긴 미국적 특성에 대해 살펴보려 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 영화가 할리우드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서부극의 전통을 이어받은 미국적인 영화의 대명사나 다름없으므로 한국 정서에 잘 맞지 않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용어는 1941년 SF 작가이자 평론가인 윌슨 티거가 최초로 사용했는데, 이는 서부극을 뜻하는 호스 오페라(horse opera)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의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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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다움의 최전선에 있는 스페이스 오페라

서부극을 구성하는 이른바 '미국적' 토대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개인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개척주의 내지는 팽창주의입니다. 우선 서부극의 주인공은 대게 독선적이고 개인적인 반-영웅으로 등장합니다. 기존의 규범과 규율에 복종하기보다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행함으로써 사람들을 구하려는 성향이 강하죠. <스타워즈> 속 주인공들이 대표적입니다. 루크 스카이워커, 아나킨 스카이워커, 한 솔로, 레이 등은 하나 같이 선대의 가르침과 제다이의 규율을 무시하고 자신의 직감이나 판단을 좇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타워즈>의 라이벌인 <스타트렉> 시리즈 속 커크 선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팀원들은 아예 개인의 돌발 행동이 팀 컬러입니다. 스타로드가 순간적인 충동으로 타노스를 때려서 작전을 망친 게 대표적이죠.


한편 서부극은 혼돈과 질서가 없다고 여겨진 땅을 문명화하는 이야기입니다. 흔히 미국인의 정신이라고 표현되는 서부로의 개척주의, 팽창주의가 스크린에서 발견되는 것이죠.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스페이스 오페라는 말이 우주선으로, 미국 서부의 평야나 사막이 우주와 행성들로, 미국의 원주민을 외계인으로 바꾼 것에 불과합니다. 1960년대에 케네디 대통령이 '뉴 프런티어(new fronier)'를 외치며 미국 서부를 전 세계, 심지어 달로 확장한 것처럼요. 동시대에 제작된 <스타트렉>에서 미국(U.S.)을 상징하는 U.S.S. 엔터프라이즈호가 우주 각지를 탐험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 셈이죠.


이러한 미국 중심의 개척주의, 팽창주의의 전통은 <스타워즈>나 <스타트렉> 시리즈에서 백인, 흑인, 황인 등의 인종에 무관하게, 또 지구인과 외계인을 가리지 않고 전부 영어를 사용하는 것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식민지로서 긴 시간을 보내고 생존을 위해 발버둥 쳐야 했던 한국인들에게 미국의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제작된 스페이스 오페라 영화의 정서가 매력적이지 않은 건 필연적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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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다운 우주와 세계관의 등장

그래서 <승리호>의 성취 중 가장 빛나는 대목 역시 미국의 정서가 아닌 한국다움에 기반한 우주와 세계관을 보여주는 데 성공한 점이라 할 수 있죠. 단순히 화면에 태극기가 가득하거나 우주선 이름을 한글로 보여주는 것 이상의 성취를 올렸기 때문입니다.


우선 미국 중심의 세계관을 선보이죠. 단적으로 한국어, 프랑스어, 영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나이지리아 피진어 등 다양한 언어가 등장하는 가운데 주인공들은 통역기를 사용해 소통합니다. 영어는 인간이 사용하는 수많은 언어 중 하나에 불과하죠. 미국의 팽창주의에 반기를 들고 있다는 티도 팍팍 냅니다. 거대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부유층만 사는 우주 도시와 황폐해진 지구를 오가는 초반부 장면은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극단에 다다른 풍경에 대한 상상화로서 미국 중심 자본주의 질서의 폐해를 비판합니다.


이는 생태주의적 접근과도 궤를 같이합니다. 서부 개척을 화성 개척과 등치 하며 자연을 모두 소비한 뒤 새로운 개발 대상을 찾아 나서는 세태를 비판하죠. 한국의 경제 성장을 상징하는 63 빌딩이 미세먼지로 뒤덮이고, 더 높은 빌딩들로 가득한 서울을 비추는 오프닝에서부터 느껴지는 접근법입니다. 도로시를 죽이려는 설리반과 보호하려는 승리호의 대립도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죠. 설리반은 지구를 파괴하고 사람들을 화성으로 이주시키려 하지만, 주인공들은 지구를 되살리기 위해 나무를 심는 선택을 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로 등장하는 도로시가 존재 자체로 미래 세대를 위한 희망을 담은 존재라는 점도 간과하면 안 되겠죠.


마지막으로 <승리호>는 개인주의적인 영웅 서사를 거부합니다. 그 빈자리는 연대와 협력의 메시지가 대신하죠. 당장 빌런과 승리호 일행의 대면은 언제나 '일 대 다' 구도로 이루어집니다. 설리반이 승리호 내부로 들어와 그들을 직접 제압하는 장면, 카밀라가 우주 공장 내부에서 승리호 일행과 격투를 벌이는 장면이 대표적이죠. 초반부만 해도 서로 비난을 퍼붓던 다른 국적의 우주 쓰레기선 승무원들, 신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검은 여우단과 승리호 선원들이 힘을 모아 설리반의 음모를 막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통역기가 중요한 영화적 장치인 배경이기도 하죠. 연대와 협력의 메시지는 통역기 없이는 무용지물이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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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호>의 세계가 한국다운 이유

물론 누군가는 이러한 <승리호>의 세계관이 대체 왜 한국적인 것이냐고 되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답은 의외로 멀리 있지 않습니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임시정부 건국강령과 교육기본법에서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홍익인간'의 정신이 바로 그 답이기 때문이죠.


미국 중심의 세계관 대신 다원적 세계관을 추구하고, 개척주의와 팽창주의를 부정하며 생태주의적 미래를 꿈꾸며, 개인주의 대신 공동의 행복을 이야기하는 <승리호>의 메시지는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라"는 신조로부터 조금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승리호>의 세계관, 큰 그림, 밑그림이 기존에 볼 수 있었던 스페이스 오페라 영화들과는 차별화된 한국형 스페이스 오페라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말에도 어폐는 없을 겁니다.




팬데믹 속에서 기쁜 소식이 하나 들려왔었죠. 한국이 공식적으로 국제 사회에서 선진국으로 분류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광복과 전쟁을 거치며 세계 최빈국이었던 나라의 입장에서는 믿기 어려울 만큼 기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선진국이 된다는 것은 이제 지구촌 내에서 한국이 맡아야 할 책임이 더욱 커진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권력과 권한은 책임과 비례하고, 이는 국제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니까요.


그런데 아직 우리에게는 세계 속의 한국이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에 대해 명확한 비전이나 로드맵이 없는 듯합니다. 물론 우리만의 잘못은 아닙니다. 미, 중, 일, 러 사이에 껴있는 국가가 아무리 체급이 커져도 목소리를 내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한국에게 주어진 새로운 무게를 외면하는 것도 '선진국'으로서 책임 있는 처사는 아닐 겁니다. 이는 <모가디슈>와 <승리호>가 제기하는 문제와 그에 대단 답이 단순히 아프리카의 한 국가와 우주 공간에서만 유효하다고 무시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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